제22편 조손(祖孫)
“너희는 모두 자리를 비우거라.”
정아의 지시에 쌍둥이들이 후다닥 자리를 떴다.
그들이 나가고도, 방에는 한동안 적막만이 감돌았다.
“……소현아.”
노인이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자, 연소현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늙은이가 눈도 좋지. 감춘다고 꽁꽁 감추었는데, 그것을 다 알아 채시오?”
정말 솔직하게 이 상황은 연소현으로서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증명한 셈이 되었다.
“……몸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얼마나 단단히 감추었으면, 백회(百會)에서 시작되는 상단전(上丹田)의 호흡조차 느껴지질 않는다는 말이냐.”
결국, 제암진천경의 마기(魔氣)를 감추기 위해서 모든 것을 철저히 숨긴 것이, 오히려 드러나게 만든 까닭이란 말이었다.
“늙은이의 눈치가 백(百) 단이군. 이러니 세간에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오.”
정아는 그의 말에서, 끝까지 스승의 마음에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연소현의 절박한 마음을 느꼈다.
“……소현아, 손목을 다오.”
그는 노인의 눈을 보지 못해, 차라리 눈을 감았다.
정아는 아무 말 없이 주인의 어깨를 살포시 짚었다.
그러자 한숨을 깊게 쉰 연소현이 손을 내밀었다.
“……까무러치지나 마시오. 여기 늙은이의 똥오줌 치울 사람 없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그러나 노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진맥(診脈)을 시작한 참이었다.
손자나 다름없는 아이를 걱정하는 할아비를 감히 누가 말릴 것인가.
“……이게.”
약왕의 얼굴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임맥(任脈)도, 독맥(督脈)도 뒤틀렸구나. 아니야, 그뿐이 아니야.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모두 역위(逆位)가 되었구나……!"
그의 이마에서 쉴 새 없이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정아는 조용히 노인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말도 안 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건 살아 있는 사람의 기운이 아니야……!”
노인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이건 마기(魔氣)로구나……! 하지만, 마교(魔敎)의 것과는 너무나 달라.”
노인의 눈동자가 뒤집히고, 온몸에 크게 경련이 일었다.
“나는, 나는……! 이런 끔찍한 마기라니……! 이런 것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소현이 손목을 강제로 빼냈다.
그 이상은 노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을 넘어서, 정신과 육체를 파괴할지도 몰랐다.
"......."
노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끔찍한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신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릴 뻔했다.
심지어 연소현이 알 수 없는 기이한 수법으로 그 정체불명의 마기를 단단히 막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노인은 그사이 몇 배로 늙어 보이는 얼굴을 들어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인간이 아니구나.”
연소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 *
방 안은 무거운 침묵이 지배했다.
노인은 짤막한 담뱃대를 물고, 조용히 과거를 회상했다.
[아이를 낳았습니다. 건강한 사내아이랍니다.]
약소유가 그녀의 지인을 통해 서찰을 보내어 출산을 알렸을 때, 노인은 몇 년째 천축(天竺)에서 중요한 연구를 이어 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친딸이나 마찬가지인 제자가 아이를 낳았다는데, 연구 따위가 중요할쏘냐.
그는 한달음에 낙양에 닿았다.
[이 아이의 이름은 소현이랍니다.]
씻지도 않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스승에게 약소유는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웃었다.
그녀는 보자기에서 작은 숨소리를 내는 새 생명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감히 그 아이를 넘겨받을 수 없었다.
세상 어떤 때도 묻지 않은 아이를 어찌 몇 달간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만진단 말인가.
그는 멀리 떨어지지도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저 아이를 아련한 눈으로 바라만 보았다.
약소유는 봄날의 햇살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로 아이에게 소곤거렸다.
[이분이 네 외할아버지란다.]
내가 무슨…….
평생을 의술과 함께한 그는 약왕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자손을 얻지는 못했다.
그를 외할아버지라 칭해 주는 마음 따뜻한 제자의 소개말은, 노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게 하는 데 충분했다.
그는 그 물기를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아이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꼬물거리며 까만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이는, 그가 이제까지 보았던 어떤 아이보다도 선하고, 고귀했다.
[우리 소현이. 너무 귀엽죠?]
결코,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제자였다.
그녀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누구나 그녀를 알았지만, 그녀가 어떤 역경을 거쳤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너무나 눈부신 제자의 모습에 노인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그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모자의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제자가 수명을 대가로 자신의 아이를 지켰음을 알아챈 것은 너무 늦은 뒤였다.
[스승님, 가끔은 낙양에 들러 우리 소현이를 살펴 주십시오]
손에 쥔 약소유의 서찰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그녀의 유언이었다.
서찰에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 한 줄이 전부였다.
그녀는 너무나 아리따울 나이에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몇 달 동안 그녀의 육신이 잠든 방향으로 밤마다 제를 올리고,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빌었다.
중원국 황실에 협박에 가까운 친서를 보내, 전국에 그녀를 기리는 사당을 짓도록 한 것도 그였다.
[오셨습니까.]
첫 번째 방문은 약소유가 떠난 지 두 해째였다.
소현은 전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연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
너무나 명석하고 뛰어난 아이라, 그는 소현을 제자로 맞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소현의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소현의 얼굴에서, 표정에서, 행동에서 약소유의 잔재가 보일 때마다 쌓이고, 쌓이던 감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었다.
딸아이를 먼저 보낸 아비의 마음이 이러할까.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떠나는 것을 비할 데 없는 불효(不孝)라 일컫는 이유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비전(秘傳)이 모두 담긴 서적을 남겨 두었다.
조용히 사라지려던 그의 심중을 어찌 알았는지, 달이 밝은 날 밤에 소현이 그를 배웅했다.
[또 뵙겠습니다, 외할아버지.]
그 이후로 그는 가끔이나마 검가에 들러 소현과 어울렸다.
어느 순간 그들은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서로 악담도 하고, 서로의 기술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손자는 무검자(無劍者)라 불리며, 가문의 수치가 되어 있었다.
노인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몇 번이나 그를 설득했지만, 소현은 그저 부드럽게, 그 어미를 똑 닮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이 내 바람이오. 세간의 풍문도 언젠가는 가실 날이 오겠지.]
만약에 소문이 가시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했다.
조용히 욕심 없이 살다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혼탁한 인세(人世)에 발을 담그지 않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겠냐고 했다.
노인은 가슴을 치고 한탄했다.
너무나 유(柔)한 아이였다.
너무나 부드러운 아이였다.
너무나 제 어미를 닮은 아이였다.
아이는 잔혹한 세상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작고 아름다운 풀꽃을 닮았다.
너무나 영리했던 아이는 일찍 세상에 실망한 것이다.
조로(早老)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자는 그렇게 세상사(世上事)에 관여하길 그만두었다.
* * *
그랬던 그의 아이가, 손자가, 이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잃었다.
그 몸에 생기(生氣)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마기를 몸에 담고 있었다.
[……나도 책임을 지고 싶은 것 뿐이오.]
무슨 책임을 진단 말인가?
이 거대한 가문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세상이 얼마나 잘못 돌아가고 있길래, 이 아이가 인간을 버리고 책임을 지려 한단 말인가.
그의 손자는 얼마나 마음씨가 착하고 고운지, 자신을 무시하던 하인들에게도 소리를 높이지 않던 아이였다.
그저 한평생을 조용히 살다가 떠나고 싶다 할 뿐인 아이였다.
독에 중독되고서도, 가문에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기 싫어 묵묵히 자기 자신을 치료해 왔던 아이였다.
얼마나 많은 독에 중독이 되어 왔던지, 약왕이라 불리는 할아비보다도 해독(解毒)에서 더 높은 경지에 달한 아이였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자신이라면 잠시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 미치광이 같은 가문이……!”
노인이 집어 던진 사발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이 쓰레기들로 가득한 가문 따위가……!"
그의 노성(怒聲)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비통(悲痛)하게 울렸다.
“이 저주받을 놈들이! 권력밖에 모르고, 돈밖에 모르는 빌어 처먹을 놈들이!”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통곡했다.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려 안 그래도 볼품없는 노인의 얼굴이 더욱 흉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비웃지 못했다.
자신의 딸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리고 이젠 그 손자까지 먼저 떠나보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 * *
“그래서 이제 한바탕 휘저어 볼 참이냐?”
“휘젓기만 하겠소?”
방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정아는 노인의 체면을 생각해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연소현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필요하다면 전부 비워 내고 새로 채우기라도 할 참이오.”
섬뜩한 말이었다.
노인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좋다! 기왕 하는 것, 제대로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그는 껄껄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놈들은 자기들이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될 거다!”
두 조손은 잔을 부딪쳐 자축했다.
“내가 더 해 줄 것은 없느냐?”
“한동안 낙양에 머물러 주실 수 있겠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네 아비에게 들을지도 모르는 처방 때문에 방문한 참이었다.”
그가 이빨을 갈았다.
“이참에 이 돈밖에 없는 가문의 재산이나 축내어야겠다.”
연소현이 낄낄하고 웃었다.
노인은 그런 소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 너를 방문하기 전에 비(翡)녀석을 먼저 보고 오던 참이다. 사천당가(四川唐家) 비전(祕傳)의 독이 필요해서 말이다. 물론 독은 받았는데…….”
비는, 사공자의 이름이었다.
“녀석이 또 뭐라고 보채기라도 하오?"
연소현의 말에 노인이 머리를 긁었다.
“맨날 똑같지. 그 녀석이 널 워낙에 좋아하지 않느냐. 그런데 네가 처박혀서 만나 주지도 않고 그러니까…….”
연소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안 그래도 이번에 녀석을 한번 찾아갈 참이었으니.”
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잘되었구나. 그러면……"
그때 밖에서 정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곤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누구더냐?”
그 대답은 정아가 아니라, 그 손 님이라는 자에게서 들려왔다.
“대공자. 본 집사는 염 장로님의 명을 받들고 약왕 어르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약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미친놈들이……"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연소현이 이미 문짝을 걷어 찬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