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편 약왕(藥王)
약왕(藥王).
그를 설명하는 말은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모든 의원(醫員)들의 정점.
그가 원각정을 방문했다.
* * *
탈명귀검이 정아에게 속삭였다.
“저분이 정말 그분 맞소? 아무리 죽은 자라도, 약을 먹고 탕을 마실수만 있으면 살릴 수 있다는 그분?"
“예.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탈명귀검이 다시 속삭였다.
“황실에서 직접 약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는 그분?”
“예.”
탈명귀검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 눈에는 그저 망령(妄靈)이 난 늙은이로 보이는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길을 안내 중인 쌍둥이 시녀를 열심히 희롱하는 노인의 모습이 있었다.
“어허, 어허. 이 약왕이 직접 진단을 내려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이냐?”
“……다시 한 번 제 엉덩이에 손을 대면 그 손을 잘라 드리겠어요.”
“아이고. 큰일이구나, 큰일이야. 그 앞에 가는 처자는 어떤가? 혹시 요즘 흉통(胸痛)이 있지 않나? 내가 조금만 만져 보면 금방 고쳐 줄 수 있는데?”
정아는 뒤를 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제 건강은 주인님이 항상 살펴 주시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코가 빨갛게 물든 볼품없는 노인이 펄쩍 뛰었다.
“아니, 그놈이 처자의 그 커다랗고 보드라워 보이는 가슴을 직접 살펴 준다고?! 이런 괘씸하고 부럽기 짝이 없는 놈을 봤나?!”
정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탈명귀검은 한숨을 쉬었다.
의술은 어떨지 몰라도, 정신 상태가 심각한 늙은이였다.
* * *
한참을 음담패설을 떠들어 대던 노인이 갑자기 멈춰 선 것은, 숲길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숲길이 끝나며, 원각정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은 풍경이 시작되는 곳.
그 숨 막히는 풍경에, 그곳에 발을 디딘 이는 누구나 한 번은 멈춰설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쌍둥이 시녀는 속으로 약왕을 비웃었다.
'흥. 늙은이 우리 원각정 풍경 맛이 어때?’
자신도 겨우 반나절 전에 도착한 주제에, 으스대던 그녀였다.
그녀는 약왕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
그 풍경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에는, 감히 어린 그녀가 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회한과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문지르고 말을 이었다.
“이 원각정은 원래 소유(素愈)의 거처 였다.”
정아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어 물었다.
“소유 님이라면, 대공자님의 어머니이신 약선녀(藥仙女)님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탈명귀검이었다.
"맞소. 대공자님은 여기서 태어났고, 그것이 지금도 원각정이 대공자님의 소유인 이유이기도 하다고 들었소.”
약왕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들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눈에 닿는 모든 것에, 모자(母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삼나무 한 그루도, 꽃 한 송이도, 모두 그들의 손길에서 시작되었다.
모두는 약왕과 대공자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감히 말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누구도 안내하지 않았지만, 그는 앞서 걸어 연소현의 처소 앞에 도착했다.
노인은 잠시 그 건물의 곳곳을 눈에 담으려는 듯이 살폈다.
그 무언가 애잔한 광경에 다들 가슴 한쪽이 아려 오려는 찰나,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아! 스승이 여기까지 왔는데, 걸음이 아까워 나와 보지도 않느냐!”
의문 중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가 바로 연소현의 스승이었던 것이었다.
“뭐라고 하였소?”
문이 드르륵 열리고, 평소와 같이 서생 차림의 연소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누가 내 스승이란 말이오? 나의 의술은 전부 나 스스로 깨친 것이오.”
의문이 다시 시작됐다.
노인은 펄쩍 뛰었다.
"네 어미를 내가 가르쳤고, 너는 어미한테 배웠지 않느냐?! 또 내가 쓴 의서들도 보고 공부했을 것이거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약사여래(藥師如來)의 현신(現身)이라 불렸던 약소유가 약왕의 제자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연소현의 의술은 그 어머니께 배웠던 것이고.
다른 이들이 바쁘게 추리를 할 때, 연소현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시오. 내 어머니는 내게 의술을 가르친 적이 없소. 그리고 당신 의서 따위는 수준이 떨어져서 한번 훑어보고 뒷간에서 썼다오.”
듣던 이들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또 시작이구나! 이 무례한 놈!”
“당신이야말로 또 시작하지 마시오! 이 영감탱이가!”
약왕이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정아에게 외쳤다.
“당장 술이란 술은 전부 가져오너라! 내, 오늘이야말로 이 건방진 놈에게 누가 제 스승인지 알려 줄 것이다!”
연소현이 차갑게 비웃었다.
“또 어머니가 담가 둔 술이나 축내러 온 것이겠지.”
“이 구두쇠 같은 놈이! 먼저 떠 난 제자를 기리러 온 스승에게 술한잔을 아까워하느냐!”
“쓸모없는 술주정뱅이 같으니라고. 당신에게는 물 한 잔도 아깝소.”
고성을 질러 대며 펄쩍펄쩍 뛰는 약왕과 평소엔 결코 볼 수 없었던 대공자의 모습에 정아는 깔깔하고 웃었다.
“참으로 정다운 사이로구나.”
그 말에 쌍둥이 시녀와 탈명귀검이 이상한 눈으로 정아를 바라봤다.
정아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쌍둥이 시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는 가서 나머지들을 데리고 술상 거하게 봐 오너라. 술은 내가 챙기겠다. 어디에 있는지 내 짐작 가는 곳이 있으니.”
쌍둥이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차 시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정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주인님께서 직접 차를 준비하실 게다.”
“과연 그러실까요...?”
쌍둥이 시녀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색골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 모자란 놈이?!”
연소현이 차갑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밖에서 입씨름하려니 춥소.”
“좋다! 내가 좋은 찻잎을 가져왔으니, 특별히 네놈이 불쌍한 듯하여 향이나 즐기게 해 주마!”
“하, 나를 손님에게 차 대접도 하지 않는 구두쇠로 만들 참이로군!”
두 사람이 사이좋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쌍둥이 시녀가 황당해 했다.
정아는 그녀에게 '봤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라고 중얼거리며, 쌍둥이 시녀도 떠났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탈명귀검이 중얼거렸다.
“......나는?”
* * *
정아가 약왕의 빈 사발에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두 분은 의술의 경지에 있어서 막상막하를 이루는 좋은 경쟁 상대라는 것이지요?”
약왕은 사발을 들이켜고는 벌컥 화를 냈다.
“뭔 소리야?! 내가 저놈보다 침을 놓아도 수억(數億) 방은 더 놓았는데! 저런 핏덩이랑 이 약왕을 견줄 수나 있겠느냐?!”
연소현이 코웃음을 치고는 정아가 따라 준 술잔을 들이켰다.
“한 번을 처방해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횟수가 중요할 것 같으냐?”
“아, 그러니까 두 분은 서로의 약점을 채우고, 장점을 끌어낼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이로군요!”
“아니다!”
“아니고말고!”
새로운 안주를 대령하던 쌍둥이 시녀가 정아의 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잘 갖다 붙이는 거지.’
연소현은 눈빛을 빛내며, 약왕을 도발했다.
“그렇게 솜씨에 자신이 있다면, 여기 이 아이를 진맥하고, 그 체질을 맞혀 보시오!”
“하! 내가 겨우 희귀 체질 따위에 절절맬 줄 알았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이놈아!”
약왕은 정아가 내민 손목을 잡고 진맥을 시작했다.
“오호라, 이것은……"
그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일단은 전체적으로 혈도의 상태를 보아하니, 절맥 같긴 한데. 흠, 한번 치료를 했던 모양이구나.”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솜씨는 저 모자란 제자 놈의 것이로군.”
“난 당신 제자가 아니오.”
과연 약왕은 약왕이었다.
정아는 감탄했다.
“그런데, 이건……?”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깊은 눈에는 강한 의구심이 가득했다.
“인간의 몸으로 용을 품고 있다니, 도대체 네 정체가 무엇이냐?”
그때 연소현이 재빨리 정아를 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하! 노인네, 역시 모를 줄 알았소.”
약왕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니, 이놈이?! 진맥 중에 환자를 뺏어 가다니, 도대체 중원 천지에 무슨 이런 법도가 있더냐?!”
연소현이 얼굴이 빨갛게 물든 정아를 안은 채로 약왕에게 말했다.
“어떻소? 이 아이의 절맥을 한번 고쳐 보고 싶지 않소?”
그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 절맥을 고치면, 이 아이가 품은 용이 어찌 될지 궁금하지 않소?”
약왕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라는 사람은 결코 호기심을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이놈아. 내가 졌다. 그러니 다시 진맥하게 해 다오.”
연소현이 악당을 방불케 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부탁을 하려면,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시오.”
“뭐라?!”
연소현이 노인의 반응을 무시하고 요구 사항을 꺼냈다.
“어머니 지인들의 소재나 단서를 제공해 주시오.”
노인이 답답해하며 외쳤다.
“이놈아!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약선문에 그놈들 다 있잖아!”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같잖기 짝이 없는 멍 청한 놈들을 말하는 게 아니오.”
"......!"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연소현의 얼굴은 진지했다.
“인척인 것을 내세워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 놈들 말고, 어머니의 '진짜' 지인 말이오.”
노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연소현이 낄낄하고 웃었다.
“이제, 이 생활도 질려서 말이오. 게다가 무검자니 뭐니, 하도 떠들어 대니, 슬슬 열이 받는 것도 있고.”
“웃기지 마라.”
노인이 정색했다.
“그 누가 와서 설득해도, 노자(老子)라도 된 양 무위자연(無爲自然) 같은 소리를 주야장천(晝夜長川)으로 떠들던 네가?”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한창 기분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십 대(十代)가 아니오?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 보고 싶어진 것이지.”
노인이 들고 있던 사발을 내려놓았다.
“헛소리 말고, 제대로 이야기해 보아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야?”
연소현도 안고 있던 정아를 옆으로 놓아주었다.
“……나도 책임을 지고 싶은 것 뿐이오.”
노인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이냐?”
“정말이오.”
노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네 어미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네가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연소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자신의 방 한구석에 두었던 서류 뭉치를 꺼내어 왔다.
“이걸 보면 대답이 될 거요.”
노인은 서류를 풀어 읽기 시작했다.
“정북위(正北位)에 새롭게 등장한 천살성(天殺星)에 대한 보고……!"
그 서류는 검가 천문각(天文閣)의 천문관들이, 기관의 감독인 연소현에게 전한 보고서였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이건……!”
노인은 몇 번을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을 네게 알려 주도록 하마.”
“이해해 주어 고맙소.”
“하지만 그 전에 나도 조건이 있다!”
노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해 보시오.”
노인은 연소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너를 먼저 진맥해 봐야겠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술기운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현기(玄機)로 가득한 깊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소현아. 도대체 몸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 말에 옆에서 정아가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