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44화 (44/350)

제19편 시녀장

집사부(執事部).

낙양검가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부서가 존재했고, 당연하지만 바쁘지 않은 부서는 드물었다.

그중에 가장 바쁜 부서가 있다면, 누구나 집사부를 꼽았다.

집사부는 낙양검가 본가(本家) 전체의 하인과 하녀의 기본 교육, 배치, 인사관리 그리고 배치 전의 시녀와 시종의 훈련 등등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런 집사부였기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 집사부의 전각 앞은 낙양의 장마당을 방불케했다.

물론 집사부 또한, 대로와 뒷길이 나누어져 있기에, 대로 쪽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래도 대기가 길어지다 보면 한 시진이 넘을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대기열과 관계없이 얼마나 빨리 들어가는지를 보는 것만으로 그 권력과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와. 엄청난 옷차림이네. 분명 지체 높은 분의 시녀가 분명해. 부럽다.”

“저거 봐 봐. 검도 차고 있어. 시녀가 아니라 호위무사가 아닐까?”

"얘는, 호위무사가 저렇게 화려한 옷차림을 하신 것을 본 적 있니?”

물론 그녀들의 수다 대상은 정아였다.

그녀는 붉은 자수가 인상적인 화사하면서도 아름다운 외출복을 입고, 강조된 늘씬한 허리 뒤로 검을 패용한 채였다.

집사부의 대로라는 특성상 주변의 모두가 대부분이 시녀나 시종들이었다.

그렇기에 정아의 옷차림과 장신구, 그리고 검은 더욱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접객원에서부터 빙화(氷花)라 불렸던 정아였기에, 그 정도의 시선이나 소곤거림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수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정아의 곁에 다가온 것은 일단의 시녀들이 었다.

나름 미모가 뛰어난 이들이었는데, 정아 앞에 서니 부족한 감이 없잖았다.

그들 중 여왕벌로 보이는 이가 한 발 더 다가왔다.

“못 보던 분이라, 통성명이라도 좀 나눠 보려고요 우리 같은 시녀들은 인맥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용안이 시녀들에게서 전해져 오는 호기심과 약간의 시기심을 포착했다.

“예, 안녕하세요.”

정아는 딱 선을 그어 보였다.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 그러지 말고 소개 좀 해 주시지요. 저희는 이번에 접객당에 배치가 예정된 시녀들이랍니다.”

과연 미모들이 다들 뛰어나다 했더니, 정아의 후배들이었다.

“낙양 사교계에서 못 뵙던 분 같아 말이에요. 혹시 어떤 가문의 영애이신지……?"

정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시녀라는 직위는 그 속성상 기본적으로 타고난 신분이 남부끄럽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새로 배치되는 이들 중에서는 이렇게 '멍청이'들이 더러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군요.”

정아는 그녀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저 걷는 것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위엄에 '병아리'들의 안색이 질려 갔다.

그 압박감은 결코 아가씨들의 사교계 따위에서 느낄 수 없는 종류였다.

“당신들에게 선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하나 드리죠.”

정아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검가에 들어온 이상, 자신의 원래 가문 따위는 잊도록 하세요.”

“가, 가문 따위라뇨……?!”

정아는 아직도 자신을 가문의 영애로 착각하는 병아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곳에서는 그대의 알량한 가문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병아리의 눈에 오기가 서렸다.

“당신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때 뒤에서 집사부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아 님이 맞으십니까?”

정아는 병아리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요.”

시종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집사부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부장이라는 말에 병아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고작 이제 배치될 시녀들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이 나온 것이었다.

낙양검가의 집사부장이라면, 그들 가문의 가주도 버선발로 뛰쳐나와 맞을 인물이었다.

정아는 하얗게 질린 병아리들을 둘러보며 집사부의 시종에게 말했다.

“이번 기수의 아이들은 교육이 부족하군요.”

시종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교육 담당에게 전달하여 조치를…….”

정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아뇨, 됐어요. 제가 직접 집사부장님에게 전하지요.”

이제 병아리들은 한겨울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당신들은 운이 좋아요. 이런 행동을 접객당에서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아는 접객당주(接客堂 主)님이라면……"

정아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은 제 발로 걷지도 못할 만큼 매로 다스린 후, 최소 일 년간은 뒷간 하녀로 강등시키셨을 테니까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 다들 안녕히. 이것도 인연이니, 다음엔 서로 통성명이라도 하죠.”

정아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섰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길은 저도 압니다. 저기 병아리들이나 단속하도록 하세요.”

정아는 성큼성큼 걸어, 집사부장의 집무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들이 정아가 다가오자, 후다닥 물러서 길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 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종이, 병아리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이런 멍청한 것들! 저분이 어떤 분이신지나 알고 입을 놀린 것이냐!”

혼이 나간 병아리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러자 구경하던 이들 중 하나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저분이 누구시기에 그러오?”

그러자 접객당의 시종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저분은 원각정의 시녀장(侍女長)이자, 대공자님의 수석 전담시녀이시오.”

그의 말에 주변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무검자라는 이름이 검가에서 공공연하게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아랫것들 또한 남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의 흉을 보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없는 자리에서는 임금 욕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감히 아랫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그 낙양검가의 대공자라는 위치를 가볍게 볼 수가 있겠는가.

“이 모자란 것들!”

병아리들은 이제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접객당의 시종이 병아리들에게 사나운 말투로 말했다.

“너희는 저분의 관대함에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저분께서 지위에 맞게 처분을 요구하셨으면, 너희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알겠느냐?!”

병아리들은 그렇게, 낙양검가의 본가 생활을 몸으로 배워 나가고 있었다.

* * *

“……쉽지는 않았습니다.”

한숨을 쉬는 정아의 모습에 집사부장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아주 모범적인 행동이었다. 훌륭해. 충분히 네 지위에 맞는 위엄을 보였어.”

그의 말에 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주인님의 얼굴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위치에 맞는 위엄과 행동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지. 너는 이제 접객당의 한낱 시녀가 아니니까. 그 마음가짐으로 앞으로도 더욱 정진(精進)하도록 하여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네가 조금은 물렀음을 알아야 할 것이야.”

“그렇습니까?”

정아는 귀를 기울였다.

“만약 그곳이 원각정의 안이었다면, 그것은 내부의 일을 다스리는 것이었으니, 네가 베푼 자비에 다들 마음 깊이 감사했을 것이다.”

정아는 병아리들의 최종 책임자인 집사부장에게 직접 말하겠다 하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그들이 마땅히 감사해야 할 자비에 불과한 것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외부다. 그렇다면 너는 좀 더 단호하게 그들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은 판단이다. 기회가 왔을 때, 주인의 위엄을 크게 세우는 것이지.”

그가 이야기하는 단호하게 다스리는 정도는, 절대로 단순히 곤장을 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례에 대한 대가치고 일견 혹독해 보일 수 있지만, 이곳은 낙양검가였다.

정아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오늘도 크게 배웠습니다.”

“아니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 으나, 내가 노욕(老慾)을 부리는 것 뿐이야.”

집사부장은 이전에 대공자에게 그녀를 보내며, 그녀가 굽힐 줄 모르면 처분하라는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앙금도 없어 보였다.

집사부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정아를 보며 말했다.

“그분의 신용을 이리도 크게 받다니, 나는 네가 대단히 자랑스럽구나.”

“모두 주인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덕이 아니겠습니까. 주인님께 감사할 일이지요.”

모든 것을 주인의 공으로 돌리는 모습에 집사부장이 만족하여 크게 웃었다.

정아는 이제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집사부장은 자신의 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것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섬기는 주인을 위해서.’

그들은 권력의 복마전, 낙양검가에서 태어난, 비틀린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정아는 용건을 꺼냈다.

“실은 주인님께서 원각정에 인력을 보중하고자 하십니다.”

그녀의 말에 집사부장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구나. 하긴 원각정이 대단히 넓긴 하지. 혼자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는 말을 이어 가며, 지필묵을 끌어와 붓을 휘갈겼다.

[그분께서 드디어 움직이실 모양 이구나.]

[와룡(臥龍)이 오랜 잠에서 깨어 나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저 혼자서는 벅차다 보니…….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후후후후, 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냈다.

물론 연소현은 그저 밥을 지을 아이를 데려오라는 것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최고의 주인에게는 항상 최고의 인재가 따라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집사부장의 얼굴에 감개무량함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드디어 그분이…….]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주인님은 어르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거인(巨人)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셨지요.]

“좋다, 좋아. 그럼 허드렛일하는 솜씨가 좋은 아이들로 꾸려야겠구나.”

"예, 요리에 익숙한 아이도 부탁드립니다.”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들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내가 이런 일이 올까 하여, 최고의 아이들은 항상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집사부장님을 믿고 맡기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필담을 주고받은 흔적을 없앴다.

그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화로에서 재가 되는 것을 확인했다.

“자 자,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겠구나.”

"예, 따르겠습니다.”

그는 문을 열고 큰 소리로 시녀를 불렀다.

“여봐라!”

멀찍이 떨어져 대기하던 시녀가 황급히 다가와 대답했다.

여1, 집사부장님.”

“원각정에서 인원 보충 요청이 들어왔으니, 내가 직접 인원을 고를 것이다. 그러니 내 이후의 일정은 일단 모두 취소해 두어라.”

원각정이라는 말에 시녀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교육 담당자 중에, 갑(甲)종 특수반 담당을 불러 직접 안내하라 이르거라.”

시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종 특수반이란 말씀입니까?”

집사부장이 발칵 소리쳤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움직이지 않고 무엇 하느냐! 이 집사부가 그리도 한가한 곳이더냐?!”

“말씀 받들겠습니다!”

시녀가 꽁지에 불붙은 듯이 달렸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집사부장은 몸을 돌려 정아를 바라보았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다만……"

그의 시선이 정아의 허리에 걸린 검을 향했다.

“알고 있겠지? 검가에서 검을 차고 다닌다는 것의 의미를.”

정아는 미소를 지었다.

“무사는 누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에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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