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편 천재(天才)
“대장(大將), 정말로 전출(轉岀) 요청 취소해 버린 거요?”
문지기는 별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그와 함께 원각정의 입구를 지키는 동료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정신 나간 거 아니오? 그 무검자(無劍者) 놈한테 개처럼 부려 먹히려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생고생을 한 거요?”
"진짜 미친 거 아니오? 다시 한 번 생각을 좀 해 보시오. 대장 정도 되는 수준의 무사라면, 검가 내에서 어딜 가도 대접을 받으실 텐데?”
문지기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왜 출셋길로 안 가고, 이런 경비대 옷이나 입고 여기서 문이나 지키고 있나?”
동료들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당연히 검가에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길이니 그런 거 아니겠소.”
“그래도 일선(一線)에서 구르는 것보다는 지금이 낫지 않소?”
“게다가 권력가 놈들 뒷구멍이나 핥고 다니면서 목에 힘주는 것보다도 훨씬 낫고.”
그들은 껄껄하고 웃었다.
가주(家主)가 쓰러진 이후,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검가가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버리지 않은 것은, 이들과 같은 이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자네들의 꿈은 무엇인가? 계속 지금처럼, 주어지는 임무만 수행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을 텐데?”
그러자 다들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무사(武士)의 꿈은 주군(主君)을 섬기는 것 아니겠소.”
“우리의 유일한 주군은 태상가주님이고.”
“태상가주님께서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건만.”
“옛날처럼 태상가주님께 직접 명령을 받아 보았으면 좋겠소. 무슨 책상물림 고위직들의 지시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는 태상가주가 가주로서 왕성히 활동했던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갔다.
즐거운 듯이 추억 속 대화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문지기가 작게 중얼거렸다.
“……주군이라.”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흑골파인지 뭔지 하는 하류잡배 놈들에게 분노하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던 날이 떠올랐다.
'죄송할 것이 뭐가 있어? 너는 역할을 다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무검자의 얼굴에서, 그는 예전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꼈었다.
그 산악(山岳)과도 같던 모습.
절대 무너지지 않는 절벽과도 같은 모습.
'뭐가 그리 죄송한가.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그가 자신의 주군, 그러니까 태상가주와 직접 대면했던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는 외부에서 주로 활동하던 무사였고, 주군은 낙양검가의 가주였으니.
오히려 그래서일까.
어째서인지 그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 * *
그는 원각정의 숲길을 걷고 있었다.
정기 연락 같은 별것 아닌 서류가 한참 쌓인 것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하다는 표현이 전혀 부족함이 없는 진법을 통과하자, 아름답기 짝이 없는 풍경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잠시 멈춰서 신선한 공기를 즐긴 그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터에 이른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검가비검(劍家秘劍), 섬영찰나(閃影刹那)……?"
그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보아도, 자신의 시야에 보이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낙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간 자신의 딸을 떠올리게 하던, 그 시녀가 틀림없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 내공도 없는 일반인에 불과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서는 미약하지만, 내공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펼쳐 내고 있는 검법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검가의 고수들이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지기로 악명 높았던 상승무공(上乘武功)이었다.
'저 수준은 결코 일(一), 이성(二成)이 아닌데?’
내력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형(形)은 분명 완성(完成)이라 할만한 경지였다.
멍하게 서 있는 그를 향해, 형을 모두 펼치는 것을 마친 정아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땀이 송골송골 흘리는 검은 무복의 모습이 낯설었다.
“한번 펼치면, 마지막까지 멈추지 말라는 엄명이 있어, 인사를 올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아, 아니오. 전담시녀, 언제부터 그 무공을 익히셨소?”
“미천한 재주로 눈을 더럽혀 부끄럽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들고 있는 검을 뒤로 숨겼다.
“……그저 배운 지 한나절도 채 되지 않았으니, 재롱이라 여겨 귀엽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
“예?”
그때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문지기! 쓸데없이 방해하지 말고 일로 와!”
* * *
“어, 마침 잘 왔다.”
얄미운 대공자는 언제나처럼, 손에서 서책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 그게 대공자님. 저기 방금 제가 이상한 것을 보았는데…….”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그를 향해 대공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쓸데없는 말 한 거 아니지? 다른 건 몰라도, 섬영찰나는 쟤가 너보다 나을 테니까, 괜한 헛소리 하지 마라.”
“아니, 근데 그게 한나절…….”
대공자는 그의 손에서 서류 뭉치를 빼앗아 들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대공자는 그를 향해 명했다.
“너밥 좀 해라.”
* * *
'나는 이러려고 전출 요청을 취소했던 것인가.’
'분명 며칠 전까지는 내공 한 줌없는 여인이었는데……'
"한나절이라고?’
따위의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가 준비한 밥상에 앉아 쌀밥을 한 숟갈을 입에 넣는 순간, 연소현의 안색이 굳어졌다.
“……정아야.”
“……즉시 인력 보중을 요청하겠사옵니다.”
그녀는 입에 들어갔던 숟가락을 그대로 꺼내어 내려놓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문지기, 너는, 인마. 밥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거냐?”
“아니, 그게……"
결코, 음식을 낭비하는 법이 없는 연소현은, 억지로 음식을 입에 쑤셔 넣으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섬영찰나도 저 아이보다 성취가 부족하면서, 심지어 밥도 못하면, 도대체 어디에 쓰라는 건지……"
혀를 차는 대공자를 향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얄미운 자식.’
한동안 타박을 들으며, 찌그러져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입에 넣고,
당장 뱉었다.
"......."
그리고 다시 찌그러져서, 대공자가 음식들을 전부 먹어 치우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대공자란 양반은 어떤 비위를 가진 것인가.
그러던 중,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의문이 있었다.
“……저기, 대공자님.”
“뭐?”
입안을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으로 가득 채운 대공자는 증오가 깃든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그것이…….”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아가씨에게 섬영찰나는 도대체 누가 전수(傳受)한 것입니까?”
무공이란 배우는 자의 자질도 중요하지만, 가르치는 자의 자질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거대 문파들이 우수한 후학을 계속해서 키워 낼 수 있는 저력이 바로 거기서 오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배운 지 한나절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는 이제까지 수많은 기재(奇才)들을 보아 왔다.
현재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동료부터가 벽을 넘은 이들이고, 자기 자신 또한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한 재능을 가지지는 않았으니.
흔히 이야기하는 기재라는 기준은 한참 넘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한나절만에 상승무공의 형을 완성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만일 며칠 전의 그녀를 보지 않 았다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확신했을 터였다.
“한나절은 무슨……"
연소현의 말에 문지기가 반색했다.
역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가르쳤으니, 아직 반나절도 안 된 거다.”
“……바, 반나절.”
흔히 나이 사십, 불혹(不惑) 이전에 벽을 넘은 고수들을 일컬어 천재(天才)라고 일컬었다.
그런 천재 중의 한 사람인 그는, 오늘 천외천(天外天)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연소현의 말을 곱씹다가,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방금 본인이 가르쳤다고 하셨습니까?!”
무검자라 불리는 대공자가, 검가에서 가장 난해하기로 소문난 상승무공 중 하나를 직접 가르쳤다니.
게다가 그걸 배운 이는 반나절만에 형을 완성했다고 한다.
“아, 시끄럽다.”
연소현은 그의 커다란 목청에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단호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거, 네 몫은 네가 다 먹어라.”
“아니, 그건……!”
뭐라고 외치려던 그는, 연소현이 정아의 몫까지 입에 넣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임무 수행 중에 산에서 뱀을 뜯어 먹고, 나무껍질을 씹는 경험도 해 봤기에 어떻게든 음식을 다 먹을 수는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을 합쳐서, 자신이 오늘 만든 음식이 가장 맛이 없었지만.
냉수를 한 사발 들이켠 그가 다시 연소현에게 물었다.
“진정 대공자께서 직접 그녀를 지도하셨습니까?”
그와는 달리 손수 우려낸 원각정의 차로 입을 행군 연소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왜? 너도 나한테 배우고 싶은 것이냐?”
“아니, 그 이전에. 상승무공을 가르칠 정도로 무학(武學)에 대한 지식이 높으셨습니까?”
연소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애초에 섬영찰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정리한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예?"
연소현이 킬킬거리며 뒤로 기대어 앉았다.
“예전에 무공학관(武功學館) 소속의 무학자들이 모여서 검가 내에서 가장 까다로운 무공이 무엇인지 격론을 벌이더라고.”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이었다.
“그래서 점창(點菅)의 분광검(分光僉)이랑, 소림(少林)의 나한찰나수(羅漢刹那手)에다가, 본가(本家)의 세절예예(細切銳銳)를 적당히 섞어서 정리해 봤지.”
그는 양손을 펼쳐 보였다.
“짜잔. 가장 까다로운 무공 논란 종료.”
"......."
문지기는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많은 검가의 무사들이 도전했다가, 고배(苦杯)를 마셔야 했던, 그 무공이.
그 많은 기재가 덤벼들었다가, 자신의 재능이 볼품없음을 느끼게 하고, 절망하게 했던 그 무공이.
그러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여, 검가의 적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했던 그 상승무공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의 장난기에서 시작된 것이라니.
“……대공자께서는 무검자가 아니셨습니까?”
자신의 입으로 물으면서도,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미가 함축된 물음이었다.
“글쎄다……"
연소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검이 없다는 건 확실한데, 말이지.”
자신을 향해 농담을 던지는 연소현의 모습에서 문지기는 기시감(旣視感)을 느꼈다.
정확히는 기시감이 아니었다.
그가 존경하고, 섬겼던, 유일한 주군.
그 주군의 모습이, 검가가 가장 멸시하는 그의 큰아들에게 겹쳐 보였다.
“탈명귀검(奪命鬼劍)."
그것은 자신이 과거 속에 묻었던 예전 별호였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군의 큰아들이 었다.
“여전히 장난감 같은 검이나 차고 다니는구나.”
대공자의 시선이 문지기, 탈명귀검의 허리에 매달린 검을 향하고 있었다.
“그대의 검이 낡아서, 무엇을 위해서도 뽑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가 오게 될 것이야.”
대공자 연소현.
원래라면 낙양검가의 소가주(小家主)였어야 할 인물이, 과거 낙양검가에서 가장 흉포한 검(劍)에게 물었다.
"그대는 언제까지 그 가짜 검을 차고 다닐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