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42화 (42/350)

제17편 용안(龍眼)

금주와 처음 만났던, 그날.

정아는 기절하듯이 쓰러졌지만, 사실 그 현상은 일반적인 과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단순한 과로가 아니로군.”

그것을 알아챈 것은 연소현뿐이었다.

앞에서 진맥(診脈)했던 모든 의원은 그녀가 단순히 피로해서 자고 있을 뿐이라고 했으니.

그는 쓰러진 정아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을 듣고 있겠지?”

'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신체는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네 체질을 조사해 보았다. 사실 꽤 오래 걸렸지.”

오늘 진맥을 마치고서야,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희귀한 체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더군.”

그녀는 하나도 아니고, 두 가지의 매우 희귀한 체질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용안(龍眼)인데, 솔직히 용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지도 확신이 안 든다.”

심지어는 중원국에서는 찾아볼수 없어서, 먼 나라의 기록에서 찾았다고 했다.

“이 용안을 타고난 이는 인간보다는 용인(龍人)에 가까운 신체를 가졌다고 한다. 대단히 귀한 체질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이것보다 자세한 번역은 어려웠다.”

그녀의 '눈'을 용안이라고 부른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단히 귀한 체질이라는 말은 조금 의문이 들었다.

이제까지의 경험상, 자신이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표현될 정도의 능력을 타고났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의문은 나도 알고 있다.”

그는 용안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전부 두 번째 체질 때문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절맥(絶脈)의 일종이다. 명칭은 어차피 말해 줘도 모를거고.”

그 절맥은 타고난 무골(武骨)을 가진 그녀가 내공을 전혀 쌓을 수 없게 하고, 용안이 흐르는 맥까지 끊어 용안의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부터 너의 그 절맥의 치료를 시작할 거다. 물론 한 번에 모든 치료가 되길 바라지는 말도록.”

그의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했고, 또 따뜻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무섭게만 보이던 주인이었는데.

의술(醫術)을 펼치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곧 그녀는 깊이 잠이 들었다.

* * *

“이번 치료까지 하면, 일단 첫 단계는 완전히 끝났다고 봐도 좋다.”

온몸이 빽빽하게 금침(金針)들로 뒤덮인 채, 정아는 물었다.

“주인님.”

“왜? 그런데 웬만하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꼭 묻고 싶었다.

“금안마녀(金眼魔女)가 무엇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연소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때도 의식이 깨어 있었구나.”

그녀가 처음 원각정에서 기절했을 때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녀는 연소현이 자신을 향해 불렀던 명칭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이옵니다. 이번에 주인님께 치료를 받다 보니, 기억이 났사옵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 이제 입 다물어.”

그는 정아의 얼굴 쪽에 금침을 꽂아 갔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가 곤란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전혀 읽을 수 없었던 것이, 주인의 심기(心氣)였다.

아마 이것도 그의 치료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것은 너와 전혀 관계없는 이름이다. 그러니 잊어도 좋다.”

정아는 더 듣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주인은 약간의 이야기를 더 해 주었다.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인의 별호(別號)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세상을 증오했었다.”

그에게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어느 날, 결국. 내 손으로 그녀를 부검(剖檢)해야 했다.”

침을 모두 처방한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마치 그때와 같은 손길이었다.

원각정에 처음 온 날, 쓰러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때의 손길.

그에게서 강한 후회와 슬픔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엄청난 분노도.

그 분노는 그녀가 감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자라.”

그가 혈도를 두드리자, 그녀는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말했듯이, 너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그 말은 어째서인지, 그가 정아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잊도록 해라.”

* * *

연소현은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의 황금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치료의 효과가 더 좋구나. 이제 첫발을 뗐을 뿐인데……. 아니면, 용안이라는 것이 훨씬 더 대단한 걸지도.”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보이겠구나.”

그는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안심하거라. 나는 네게 나와 같은 길을 걷기를 명령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는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네가 이 대공자의 전담시녀로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뿐이다.”

그는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

“이 치료는 그저 대공자 연소현에게 충성을 바친 네게 베풀어 주는 작은 선물일 뿐이니, 부담 가지지 마라.”

* * *

자신의 언니, 세아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둔 채 수하들과 함께 안가를 비웠다.

흑골파에 대한 마지막 공략이 시작될 참이었다.

주인을 위한 야식 준비를 마친 그녀는 그를 찾았다.

“음……?"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검은 이제 영원히 당신의 것이옵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주인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리라.

그것은 시녀로서 충성을 바쳤던 것과 별개로, 주군을 섬기는 검으로서의 의식이었다.

그와 함께 그의 길을 걷겠다는 맹세였다.

“……너의 검을 받겠다.”

그는 조금 어색하게 그녀의 검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이 검은 어디서 난 것이냐?”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안가를 지키는 여(女)무사에게 노리개 하나와 교환했사옵니다.”

연소현이 껄껄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의 웃음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을 느꼈다.

“주인님. 아마……"

그녀는 이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말을 전할 수 있었다.

“'그녀'도 주인님을 조금만 더 빨리 만났다면, 저와 마찬가지 행동을 했을 것이옵니다.”

그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얼굴에 부드 러운 미소가 걸렸다.

* * *

"......무섭지는 않아?”

언니의 말에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섭지 않냐고?

당연히 무서웠다.

그는 그녀가 이제까지 꾸었던 모든 악몽을 합친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이제까지 만났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 었다.

“저도 그분처럼 되기 위해서예요.”

* * *

예의 그 기운, 마기를 느낀 정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최대한 조용한 발걸음으로 마기가 느껴진 곳으로 향했다.

연소현의 침실에 들어선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잠자리에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

아무래도 주인에게 들러붙어 있는 끔찍한 '그것'이 또 주인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녀는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이윽고 그의 표정이 다시 편안해졌다.

그녀는 그 얼굴을 한참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멀리 가지 않고, 달이 보이는 마루에 앉은 그녀는 그가 가르쳐준 기초적인 운기조식(運氣調息)을 시작했다.

* * *

원각정 밖에서는 아침 태양 빛이 반가울 정도로, 차가운 북풍(北風)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원각정에서는 그저 따스한 봄날의 시원한 바람이 꽃잎을 스칠 뿐이었다.

원각정에 설치된 결계(結界)급 진법의 힘이었다.

연소현은 편안한 일상복 차림으로 공터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를 둘러싼 문제들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단정한 시녀복이나, 우아한 외출복이 아닌, 검은 무복(武服)을 입은 정아에겐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 천녀의 신분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것 같사옵니다.”

노예(奴隸) 제도는 중원국에서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원국 어디를 가든, 노예나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어릴 적, 검가에 팔려 온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맞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 중 최대가, 시녀와 동급의 직위(職位)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검가에서 직계혈족의 전담시녀 정도면, 원래의 신분과 관계없이 웬만한 이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자리다.”

그는 의자 위로 무릎을 세워,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너도 잘 알겠지.”

이공자의 호원집사, 삼공자의 삼절무사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금만 권력이 있고, 권세를 등에 업은 자들에게도 전담시녀라는 자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시녀는 한낱 시녀일 뿐이니까.

“여기 검가에는 신분을 상승시킬 단 한 가지의 방법이 있지. 그게 무엇이냐?”

“무사(武士)가 되는 것입니다.”

'검가에 소속된 무림인'을 뜻하는 무사라는 존재는 그것으로 하나의 신분이었으며, 계급이었다.

“그렇다. 그러니 너는 아무리 힘들어도 최대한 나의 교육을 따라와야 할 것이다.”

“주인님의 은혜에 천녀는 몸 둘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연소현은 그렇게 그녀를 위한 무공 교육을 시작했다.

“네가 배울 검법(劍法)의 이름은 '섬영찰나(閃影刹那)'라고 한다. 검가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가진 상승무공(上乘武功)이지.”

그는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하지만 요구하는 조건이 까다롭고, 따라야 할 무리(武理)가 난해하여, 검가 내에서도 대성(大成)한 이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수련이 어려운 검법이다.”

정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눈'의 힘으로,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이라 해 봐야, 검가의 하급 무사들의 재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고급무학을 배우고 익힐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어렵기로 유명하다고 하지 않는가.

“네 체질상 이 무공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음이니, 아쉬워서라도 한번 시도를 해 보자꾸나.”

“예, 주인님. 이 천녀는 최선을 다해 보겠사옵니다.”

“좋아. 그러면 기초적인 이해부터 시작하자.”

그는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형(形)을 가르쳤다.

내공이 없이 펼치는 형이라,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없고, 그 흐름이 끊어지는 부분도 많았다.

게다가 상승무공이란 그의 말대로 대단히 난해했다.

하지만 연소현의 유려한 설명이 곁들여지자, 어떻게든 용안을 통해 원형(元型)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아는 힘들었지만, 겨우 형을 익혀 낼 수 있었다.

“주인님! 어떻사옵니까?”

"......."

반나절 만에 상승무공의 형을 익혀 낸 시녀를 향해 뭐라고 해야 할까.

연소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 이제부터 식사 준비는 그만 두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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