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편 그 도시의 밤(夜)
정아는 가져왔던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서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연소현의 두툼한 겨울 외투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다가가 그 외투를 공손한 태도로 걸쳐 주었다.
“아직 날이 춥사옵니다.”
“……고맙군.”
연소현의 온몸에는 대량의 혈액이 묻어, 지금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정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렇게 흐르던 피가 점차 검은 재가 되어 흩날렸다.
한 여인의 남은 잔해 또한 하얀 손들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기괴하고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세아는 그 모든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연소현은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겠지?”
세아는 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제게 정체를 알려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딱히 알려 준 적이 없는것 같은데?”
연소현은 능청을 떨었지만, 세아는 말려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감추시지도 않으셨지요.”
“……그렇지.”
잠시 눈을 감았던 연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항상 거칠 것이 없어 보였던 그에게도, 무언가 마음에 걸릴 것이 있었던가.
세아는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내게는 앞으로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세아는 말라 오는 입술을 핥았다.
“그것은 낙양검가의 대공자로서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암천존자로서?”
“대공자와 암천존자 둘의 목적이 일치한다면, 하나로 봐도 좋겠지.”
이번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까?”
세아의 물음에 연소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였다.
조금 전의 모습이 떠올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꺾이지 않을 사람, 변하지 않을 사람. 모든 것을 희생할 사람.”
세아는 잠시 멈춰, 대화를 정리했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까?”
“그래.”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이라도 하듯이.
“어떻게 그걸 확신하십니까? 그렇게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을 믿으시는 겁니까? 만난 지 며칠 되지도않은 이에게, 자신을 가장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비밀을 드러내면서까지?”
다그치는 모양새였지만, 언제나 그랬듯 연소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호통을 치는 대신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낙양(洛陽)의 봄(春).”
"......!"
그의 말에 세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맹렬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듯이 연소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검가는 아직 그대들의 존재를 모른다.”
창백하게 질렸던 세아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어떻게……?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계신 겁니까?”
연소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는 아직 내게 답을 주지 않았다.”
세아는 떠올렸다.
인외마경(人外魔境)의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진 명부마도(冥府魔道).
연소현이 걷는 길을 자신은 함께 걸을 각오가 있는가.
“저는……"
그녀가 뭐라 대답을 하려 할 때, 연소현이 뒤로 돌아섰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나는 시장해서 야식이라도 먹으러 가 봐야겠다.”
정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천녀가 이미 준비를 해 두었으니, 데우기만 하면 바로 식사를 즐기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연소현의 얼굴에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대단하군.”
“과찬이시옵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더니, 이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연소현의 목소리가 세아의 말을 끊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이번이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
정아는 자신의 언니에게 시선을 보내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 자신의 주인을 따랐다.
그들의 뒷모습이 동굴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세아는 자신에게 물었다.
각오가 되어 있는가?
“각주님-!”
저 멀리서 자신의 수하들이 찾는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 * *
아주 깊은 밤.
현월각 안가(安家)의 가장 높은 지붕 위에 연소현이 걸터앉아 있었다.
언덕 위에 있는 안가에서는 평지에 펼쳐진 엄청난 규모의 낙양의 유흥가가 아주 잘 내려다보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 불야성(不夜城)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벌써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온것은 세아였다.
그녀는 기와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우리는 그 난리를 겪었는데, 낙양은 여전하군요.”
멀리서 바라보는 거리는 아름다웠다.
홍에 겨운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기녀들이 연주하는 가락들이 여기까지 들려올 것만 같았다.
“그만큼 거대한 도시지, 낙양은.”
그녀는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흑골파는 대단한 골칫거리였어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그녀는 끈으로 그 머리카락을 묶었다.
“그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정도였죠.”
그녀의 태도도, 말투도 예전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흠.".
“하지만 이 도시에 문제는 넘치고 넘쳤죠. 흑골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언덕에서 부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저는, 저희는 언제나 중과부적(衆寡不敵) 이었어요.”
그 추위 때문에 그녀의 말이 가녀리게 들리는 것만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연소현은 자신이 덮고 있던 겨울 외투를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감사해요.”
그녀는 외투의 옷깃을 여미며, 연소현에게 물었다.
“저희 조직, 낙양의 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시나요?”
“별로.”
연소현은 짧게 덧붙였다.
“낙양에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씨 좋은 이들이 모인 비밀결사(秘密結社)라는 것 정도?”
세아가 그의 익살맞은 표현에 미소를 지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죠. 참다 못한 사람들이고.”
“듣기만 해도, 어울리기에 썩 유쾌한 친구들은 아닐 것 같군.”
세아가 깔깔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유쾌하려고 노력하기는 한답니다.”
그녀의 웃음은 곧 쓴웃음이 되었다.
“처음엔 그저 조그만 불합리를 고쳐 보기 위해서 모였던 것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곧 그 작은 불합리를 해결하려면, 더 큰 불합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맞아요”
“그리고 그 큰 불합리를 해결하려면, 더욱더 큰 불합리가 해결되어야만 했겠지.”
그녀는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낙양이라는 도시는 시야가 닿는 저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굶어 죽는 이들을 구휼(救血)하려면,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는 것으로는 부족하지. 결국, 그들을 굶게 만드는 이들을 없애야 하지.”
“하지만 그들을 없애면……"
“또 다른 이들이 그 자리에 나타나지. 그렇다고 그 자리를 없앨 수는 없지.”
연소현이 차갑게 웃었다.
"그 자리라는 것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체제나 마찬가지니까.”
세아는 의외라는 눈으로 연소현을 바라봤다.
“……잘 아시네요.”
연소현은 껄껄하고 웃었다.
“낙양의 구휼 기관을 정비한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구홀 제도를 만든 것은?”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게 당신이 한 일이었군요! 저는......"
“맞아. 어머니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들이지. 실제로 어머니가 많은 노력을 부단히 기울이시기도 하셨고.”
하지만 그 전체 설계는 어린 연소현의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두 유명무실(有名無實)해졌다.”
세아가 그런 그를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래서인가요? 암천존자로 활동하게 된 것이? 어머니의 도시를 망치는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거칠게 기승을 부렸지만,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방기(放棄)했던 모든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다.”
그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그것이 무검자 연소현이든, 아니면 대공자 연소현이든, 암천존자이든.”
그의 기세가 거칠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갈라놓는 것만 같았다.
“내가 나의 의무를 다하기로 한 이상, 책임이 있는 모두가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으르렁거리는 쇳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것이 낙양 뒷거리의 한낱 폭력단이든, 암흑가의 큰손이든, 고관 대작이든, 거대 문파(門派)의 수장이든……
그의 두 눈에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그것이 심지어 만인지상(萬人之上)의 황제라 할지라도……!”
무력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들보다도 더 무력한 이들을 착취(搾取)해야 했다.
허기(虛飢)와 평생을 함께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이 몸을 뉠 장소를 빼앗아야 했다.
왜냐면, 그것이 강자들이 그들에게 허락한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강자들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에 지배되는 세상.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獨食)하는 세상
상대가 강자이기에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세상.
약자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 순리(純理)인 세상.
약자에게는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옳은 세상.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순리라면, 세상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그는 준비가 되었다.
그는 천고의 마물, 제암진천경의 연자이자 암천존자로, 그 자신이야 말로 지상 최강의 패자(覇者)였다.
그는 그들의 논리로,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철퇴(鐵槌)를 가하리라.
“그렇다면……"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찬 바람에도 그녀는 용케 균형을 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호신용으로 구비해 놓았던, 세검(細劍)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연소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검가의 오랜 전통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세검을 거꾸로 들어, 칼자루를 그에게 내밀었다.
연소현은 아무 말 없이, 그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세아는 연소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검은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연소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않겠나?”
세아는 한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눈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섬겨야 할 이를 모를정도로 모자라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세아가 연소현의 말을 받았다.
“인외마경(人外魔境)의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진 명부마도(冥府魔道)이더라도.”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연소현은 그녀의 검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손잡이가 아니라, 어색하게 칼막이 부분을 잡았다.
“너의 검, 낙양검가의 대공자이자 암천존자, 연소현이 받았다.”
의식은 성립되었다.
집안이 몰락한 후, 빈민가에서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겨우 십 년 만에 현월각이라는 중견 정보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주변의 존경과 두려움을 사는 철혈(鐵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주군(主君)을 찾았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있던 세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연소현이 어색하게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무검자가 검을 쥔 모습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네요.”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이 의식은 네 동생이 먼저였다.”
“……네?!”
겨울이 끝나지 않은 낙양에는 칼바람이 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춥지 않았다.
이제부터 추위를 걱정해야 할 이 들은 따로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