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5화 (35/350)

제10편 명부마도(冥府魔道) (2)

“둘 ”

금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벗어났다.

“..?!”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에게 당해 저 멀리 날아갔던 이가 자신의 옆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물고 있는 손가락은 누구의 것인가?

그의 입가가 길게 찢어지며 미소를 그려 냈다.

오도독一, 오도독-.

그녀의 귓가에 뼈를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거리를 더 벌린 그녀가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있던 자리가 텅 빈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어어……?"

넋을 잃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바로 옆에서, 다시 암천존자의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

그녀는 뭐라 괴성을 지르며, 그 하얀 가면에 강력한 일격을 박아 넣었다.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그의 머리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뒤로 머리를 젖힌 채 그는 속삭 이듯 말했다.

"셋.”

이번엔 왼손 검지였다.

오도독, 오도독.

그렇게 손가락을 세 개나 잃은 금주가 분노의 비명을 질렀다.

“살려 달라고 비는 소녀들의 목을 베어, 그 피로 목욕을 즐기던 네년이 고작 손가락 세 개에 그리 비명을 지르느냐?”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미 실성을 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건만, 고수에 버금가는 내력이 그녀의 상단전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녀가 시전했던 주술이, 그녀의 영혼을 지켜 내고 있었다.

간신히.

금주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네놈! 네놈! 네놈을 갈아 마시고야 말겠다!”

* * *

금주가 암천존자를 향해 혼신의 공격을 퍼부었다.

퍼붓고 또 퍼부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모든 절기(絶技)를 동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줄어들어 나갈 뿐이었다.

금주의 눈앞에 선 저 하얀 가면은 아무리 얻어맞아도, 타격을 입지 않는 것 같았고, 아무리 꿰뚫려도, 뚫리지 않았다.

“불사(不死)……?"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아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건…….”

* * *

“……엄청난 경지다. 도대체 저 암천존자라는 존재의 정체가 무엇이지?”

덩치가 탄식했다.

금주를 상대하며 입었던 상처가 만만치 않았다.

몸 구석구석을 감은 붕대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저 앞에서 벌어지는 암천존자라는 존재의 기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터무니없어.”

그와 함께 숨어서 전투 아닌 전투를 지켜보던 미소녀가 혀를 내둘렀다.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 맞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있는 거잖아.”

상당한 수준의 무림인인 그들의 눈에도 금주의 공격은 너무나 빨랐고, 강력했다.

심지어 그 불규칙한 궤도까지 더해지자,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공격이었다.

그것마저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해서 죽음의 바로 앞까지 갔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 암천존자라 불리는 존재는 지금 그런 금주의 공격을 장난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일견(一見)하기에 그는 그 공격들을 모두 얻어맞고도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지켜본 결과, 그들은 그 소름 돋는 결과에 도달했던 것이었다.

“도대체 저게 뭐야?”

미소녀는 닭살이 돋은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그 기이한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멋지잖아?”

* * *

“그가 더 빠른 몸놀림으로 금주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는 건가?”

세아의 물음에 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제 알겠습니다.”

그녀는 모든 내공을 안력(眼力)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는 모든 공격을 바닥으로 흘려 보내고 있는 겁니다.”

금주의 일격이 몸에 닿는 순간마다, 그의 발끝이 닿아 있던 지면이 쩌억 하고 갈라졌다.

갈라진 지면은 소용돌이 모양을 그려 내고 있었다.

사뿐사뿐 움직이는 그의 발끝을 따라, 연꽃이 피어나듯, 그렇게.

* * *

“그런데 저게 도대체 무슨 원리야……?"

미소녀가 인상을 쓰며 물었지만, 덩치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글쎄, 솔직히 나도 가정은 해볼 수 있지만…….”

“가정이라도 좀 해 봐. 너도 알다시피 나는 무공이라고는 거의 독학(獨學)으로 터득한 게 전부잖아.”

덩치는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일단 공격을 받는 것은 침투경(浸透勁)의 원리를 역으로 이용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발끝으로 전사경(纏絲勁)의 묘(妙)를 살려, 상대의 경력(勁力)을 지면으로 발출(發岀)하는 거지.”

말을 마쳤던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러면 신체 내부를 통과하는 적대적인 성격의 경력이 가지는 흐름이……"

한참을 횡설수설하는 것을 듣던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너도 네가 무슨 말은 하는지 모르겠지?”

“사실, 그렇다.”

미소녀가 코웃음을 쳤다.

* * *

“규, 나는 솔직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세아는 정보 조직의 수장으로서, 무공에 대해서는 웬만한 무림인보다 훨씬 많은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규가 말하는 상승무학(上乘武學)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규는 암천존자의 움직임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세아의 물음에 답했다.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전부 잊으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간단히 말하면, 각기 다른 몇개의 문파가 보유한 경(勁)에 대한 정수가, 저 움직임에 집대성(集大成)되어 담겨 있는 겁니다.”

“내가 다시 정리하면,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진 무공이론들을 뒤섞어서 하나로 완성했다는 말인가?”

“예.”

규는 눈을 떼지 않는 것이 아니 라,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직접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아가 규의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검가의 기술인가?”

공식적으로든 아니면 비공식적으로든 온갖 무공을 모으는 것으로 알려진 낙양검가였다.

그런 검가라면, 혹시 몇 개의 문파가 가진 비전을 녹여 새로운 무공을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핵심은 저 기술이 어디 것이냐, 혹은 누가 만들었냐가 아닙니다.”

규는 이를 악다물었다.

무림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모래알처럼 많다고 했던가.

가끔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로 복잡하긴 하지만, 어떻게 단순히 이론적으로는 성립하긴 하는 무공을 만들어 내는 이들도 있었다.

“아가씨.”

예를 들자면, 자신의 사문(師門)에도 그러한 것이 있었다.

십검(十劍), 혼돈(混沌).

지금의 시대에 와서는 누구도 익히지 못한 환상 속 오의(奧義)처럼.

“……애초에 문제는 저걸 어떻게 사용할 수 있냐는 겁니다.”

심지어 실전에서.

거기다가 연속적으로.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그때야 상황을 이해한 세아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무(武)의 세계에 겉핥기 수준으로 발을 담그고 있는 자신도 이렇게 황당함을 느끼는데, 벽을 눈앞에 둔 규의 입장에선 어떻겠는가.

“……그럼 저 암천존자는 불가능한 일을, 실제로 해내고 있다는 말이로군.”

“예.”

그것은 규로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었다.

암천존자, 낙양검가의 대공자는 벽을 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게 뛰어나다는 재능으로 주변에서 칭찬받던 자신이 그저 손놓고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벽이었다.

그 거대한 벽을 십 대(十代)에 불과한 그가 훌쩍 넘어 버렸다는 것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암천존자라는 존재가 아닌, 연소현이라는 이에게서 느끼는 외경(畏敬)과 강한 호승심(好勝心)이었다.

* * *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

덩치는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 말이다, 손가락.”

“응?”

잠시 덩치의 손가락을 괴이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미소녀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

암천존자는 그저 공격을 받아 흘리기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와중에,

금주의 손가락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전력으로 펼쳐 내는, 그 끔찍하게 빠르고 강력하며 동시에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는 공격의 끝에서.

차근차근 하나씩.

* * *

처음부터, 금주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처음 그 건물 안에서 그녀가 처박혀 있었을 때, 목을 비틀어 버리는 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고수?

일시적으로 상승한 경지 따위,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 자리에 자신 대신에 '문지기'가 있었다고 해도, 과정은 달랐을지언정, 결국 깔끔하게 금주의 패배로 끝났을 터였다.

그녀가 가진 기괴한 무공은 연원을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딱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씩 실험했다.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된 이후,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기술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가진 육신은 처음부터 너무나 완벽했고, 거기에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깃들기까지 했다.

현실을 침식하고, 부식시키고, 왜곡하는 힘인 마기는 상궤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내공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마기에 영향을 받는 것만으로도 심지(心地)가 부서지고 이지(理智)를 박탈당해 실성(失性)하기 일쑤였다.

내공을 가진 무림인은 너무 약했다.

그들은 너무 느렸고, 자신들이 익힌 무공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배운 대로, 익힌 대로, 흉내만 내는 꼭두각시 같은 것들이었다.

가끔 싹수가 조금 보이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을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그들을 죽이는 건, 얼굴 근육을 움직여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물론 그들을 죽이는 것이 보람있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즐겁기까지 했다.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되어 악인을 잡아먹는 것은 암천존자로서의 사명이기도 했으며, 무검자 연소현으로서 거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는 초석(礎石)이기도 했으니까.

그러함에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학자(武學者)로서 느끼는 허무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실험하기로 했다.

금주는, 적어도 실험 대상으로는 충분한 자질이 있었다.

근성도 있고, 체력도 훌륭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괴롭혀야 할 이유도 넘쳤으니, 금상첨화라 할 만했다.

그래서 그는 과거 자신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었던 것들을 실제로 행해 보았다.

복잡한 무리(武理)를 몸으로 실현하고, 즉석에서 떠오른 이론을 당장에 실천해 보았다.

마치 자신의 신체가 이미 기억이라도 했었던 것처럼 따라 움직이는 감각을 즐겼다.

그는 옛일을 떠올렸다.

그가 검을 처음 잡았을 때의 기억을.

검을 잡는 순간, 그 검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전능감에 취했던 그 순간을.

어째서 그 즐거웠던 기억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걸까.

* * *

“열.”

오도독, 오도독.

금주는 손가락이 모두 사라진 자신의 손을 보며 비명을 질러 댔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발악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암천존자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커헉……"

금주는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그의 손아귀에는 방금까지 힘차게 맥동하던 그녀의 심장이 들려 있었다.

“이걸로, 열하나.”

와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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