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4화 (34/350)

제9편 명부마도(冥府魔道) (1)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작은 전장(戰場)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없이 명령과 보고가 오고 갔었고, 기세를 높이기 위한 고함과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 비명과 신음으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암천존자가 나타나고, 그는 마치 해일처럼 모든 것을 쓸어 가 버렸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간간이 들려오는 부상자들의 신음과 수습을 위해서 조곤조곤 주고 받는 전령과 부관들의 대화 정도만이 적막을 뚫고 들려올 뿐.

싸웠던 이도 있고, 피를 흘린 이도, 죽은 이도 있었지만, 적들의 흔적은 남은 것이 없었다.

시체도, 혈흔도, 아무것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 상궤(常軌)에서 어긋나는 모습에 세아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각주님.”

현장 지휘관의 보고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사상자들에 대한 조치가 진행되는 중이며, 거리의 봉쇄(封鎖)를 지속하기 위한 재편성 또한 진행 중입니다.”

“그래요.”

짧게 대답한 세아는 돌아서는 현장 지휘관에게 물었다.

“이 광경, 그 많은 전장에 섰던, 당신에게도 이상한가요? 아니, 틀림없이 이상하겠지요.”

그녀의 질문 아닌 질문에 현장 지휘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돌아서서 잠시 주변을 살폈다.

다들 자신의 임무에 매진 중이라 아무도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 머리에 쓰고 있던 가죽 투구를 잠시 벗어, 옆구리에 꼈다.

그의 머리에서 땀 냄새와 함께 더운 김이 피어올랐다.

“그렇긴 합니다. 말씀대로 엄청나게 이상합니다.”

그는 하얗게 세기 시작한 턱수염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불길하면서,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무엇에 홀린 것 같기도 합니다.”

의외라고 느껴질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였다.

그는 의외라는 표정의 세아에게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원래 전장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당시엔 결코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발생하고는 하지요.”

그는 뭐라 설명을 더 하려다가, 무관(武官) 출신의 짧은 말주변을 탓하고는 익숙한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잊으십시오.”

“예?”

그는 느슨해진 갑주의 가죽끈을 다시 조였다.

“전장에서는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기에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집중하면, 일을 망치기에 십상입니다.”

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모든 일은 시간이 한참 지나 나중에 돌아보면, 어떻게든 이해가 되고, 적당히 설명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가요……"

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빠른 동작으로 세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에는 얼른 잊으시죠, 사령관.”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전장에서의 경험이 묻어 나오는 좋은 조언이네요.”

그는 다시 가죽 투구를 머리에 쓰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이런 기괴한 경험이 시간이 지난다고 설명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와의 대화는 효과가 있었다.

세아는 다시 업무로 돌아와 그에게 물었다.

“암천존자와 금주의 행방은 아직 입니까?”

암천존자가 모든 무림인을 제거하고, 모습을 감춘 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것은……"

그때 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규가 대신 답했다.

“금주는 암천존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머지않아 모습을 감추었었습니다. 그리고 암천존자는……"

그녀는 전방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의 기운이 너무도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입안이 말라 오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아직 분명히 이 거리 어딘가에 있습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어라 지시를 내리려던 때였다.

“그렇다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강한 진동이 그들을 덮쳤다.

누구보다 빠르게 세아를 껴안아 보호한 규가 외쳤다.

“저쪽!”

폭발의 중심지에 휘말려 산산조각이 난 건물의 잔해에서 튀어 오른 것은 붉은 궁장의 여인, 금주였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특유의 거친 금속음으로 이루어진 암천존자의 웃음소리가 거리 전체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 * *

그 웃음소리에 의해 먼지구름이 빠르게 흩어지며, 암천존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맞은편 건물 위에 내려앉은 금주가 그에게 다시금 다그쳐 물었다.

“누구에게 내 이름을 들은 것이야?! 당장 말하지 못해?!”

그 순간 그의 웃음소리가 뚝 하고 끊어졌다.

목을 옆으로 뒤틀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암천존자가 말했다.

“네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내가 네 이름을 모를 줄 알았던 것이냐?”

그 물음과 함께, 암천존자의 하얀 가면의 뚫리지 않은 눈구멍 위로 시퍼런 귀화(鬼火)가 피어올랐다.

“우, 웃기지 마!”

그는 분명 저 아래에 서서 지붕 위의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가 저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이름을 숨긴다고, 네 악행까지 숨겨질 것으로 생각했더냐?”

암천존자의 귀화로 타오르는 눈은 다른 이들과는 다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세유화! 내 오라비를 돌려줘! 우리 가족을 돌려줘!]

눈이 파내어져, 눈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여인이 금주의 머리채를 붙잡고 곡(哭)했다.

[유화 이년아! 그깟 이십 전이 뭐라고 너를 키워 준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느냐?!]

복부에서 내장을 길게 홀리며 기어 온 중년 남자가 금주의 한쪽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세유화 아가씨! 내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울고 있어요! 제발 내 젖가슴을 돌려주세요!]

상체가 피투성이가 된 아낙이 울고 있는 아이 세 명을 금주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머리를 잃은 아이들은 목구멍으로 힘차게 울어 댔다.

[나처럼 힘쓰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이에게서 팔을 가져갔으니, 내가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내 손! 내 손을 돌려주시오!]

처음엔 한둘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늘어난 그들은 금주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것도 모자라 그 너머로 이어진 원혼들이 만든 줄이 그 끝이 보이질 않을 지경이었다.

그들의 한 맺힌 성토가, 원혼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의 절규가 처절하게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그들의 목소리는 거대한 괴성이 되어 도저히 알아들을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나의 하나뿐인 딸이 무슨 죄가 있어 데려갔느냐?! 그 꽃다운 나이의 아이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리 비참하게 죽게 했느냐? 아비가 지은 죄를 어찌하여 자식들에게 묻느냔 말이다! 내가 저승에서 어떻게 딸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

[내 너를 찢어 죽일 것이다! 내 백골이 진토가 되고, 나유타의 세월을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뒹굴더라도, 네년만은 저주해 찢어 죽이고 말겠다!]

하얀 가면 안, 연소현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들이 느꼈던 억울함, 그들이 느꼈던 원통함, 그들의 원한과 분노가 너무도 생생히 그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제암진천경은 그렇게 원혼들의 사연을, 그 기억을 그에게 쑤셔 박고 있었다.

가면에서 타오르는 귀화는 그의 분노에 반응하듯이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가면을 가렸다.

하지만 시야는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보아도, 피할 수가 없었다.

타오르는 귀화는 멋대로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느새 악다문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 없잖아! 그렇게 계속 헛소리 중얼거리지 말란 말이다!”

금주가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당장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머리를 번쩍 쳐들자, 금주는 반사적으로 두세 걸음을 물러서고 말았다.

연소현은 천둥과 같은 소리로 외쳤다.

[세유화!]

그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치솟아 올랐다.

[네 힘이 닿는 데까지 저항해 보아라! 가진 모든 것을 꺼내어 보아라! 네년은 죽어서도 이 모든 원한이 사그라들 때까지 영겁의 세월동안 고통받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마기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주변의 건물들이 뒤흔들리고, 쌓였던 흙먼지가 공중으로 휘날릴 정도였다.

“닥쳐!”

금주가 반사적으로 펼쳐 낸 기막(氣膜)이 암천존자의 천둥 같은 고함에 격렬하게 진동했다.

“너 따위가, 네까짓 게 뭐라고 나를 마음대로 심판하려 드는 것이냐?!”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자 금주의 얼굴까지도 검붉은 혈관들이 흉하게 불거졌다.

그녀에게서 비롯된 가공할 기세가 사방으로 홑날렸다.

“네놈의 같잖은 영웅 놀이는 죽어서나 즐기라고!”

그녀가 자신의 양손을 벼락같이 휘두르자, 암천존자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이 터져 나갔다.

그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의 연속에서 금속음으로 이루어진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히 금주의 귀에 박혀 들었다.

“일단, 하나.”

“또 무슨 헛소리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금주는 자신의 양손을 들어 손톱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 약지가 사라져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약지가 있던 자리에서 새빨간 피가 솟구쳤다.

“어, 언제 내, 내 손가락이……!"

암천존자의 음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도 쉬이 남의 삶을 파괴하던 네년이, 겨우 손가락 하나에 그리도 놀라는 것이냐?”

홁먼지가 걷히며, 암천존자가 그녀의 손가락을 들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감히! 감히! 네놈이……!"

그녀가 발을 들어 바닥을 내리찍자, 주변이 크게 함몰됐다.

무시무시한 기세였지만, 암천존자는 그녀의 기세 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땅이 진동하는 가운데서도 태연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그가 손가락을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금주의 손가락은 그의 쩍 벌어진 입속으로 떨어졌다.

오도독, 오도독, 뼈를 씹는 소리가 선연하게 들려왔다.

“……별미(别味)로다.”

그의 기다란 혀가 입술 밖으로 홀러내리는 피를 홈쳤다.

“네년이 맨 처음 먹었던, 옆집 아이의 인육(人肉)도 이런 맛이었느냐?,,

“닥쳐!”

금주의 신형이 암천존자를 향해 내리꽂혔다.

암천존자가 귀신처럼 뒤로 미끄러져 그녀의 거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그녀가 상정한 이내의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팔들이 채찍처럼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빛살처럼 빠른 속도의 연격이 그의 몸통을 난타했다.

연속적으로 울려 퍼지는 파열음과 함께 그의 몸이 형편없이 흔들렸다.

“죽어어어엇!”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그의 몸에 내공을 가득 넣은 내가기공(內家氣功)의 일격(一擊)을 찔러 넣었 다.

그 일격에 주변의 공기층이 터져나가며, 그의 몸이 형편없이 구겨져 날아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가 한 건물의 외벽을 뚫고 반대편 외벽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 속도로 몇 개의 벽면을 관통하고서야, 한 건물의 외벽에 처박혔다.

벽에 거대한 구멍이 난 건물들이 순서대로 무너졌다.

그가 처박힌 건물이 마지막에 무너지며, 그의 몸을 깔아뭉갰다.

“겨우 이것뿐이냐?! 겨우 이거 가지고 그리 잘난 척을 했던 것이냐?!”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외치는 금주의 귓가에 거기 있을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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