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2화 (32/350)

제7편 인외마경(人外魔境)

“그대는 마기(魔氣)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되어 영락(零落)한 노(老)신선(神仙)은 연소현에게 물었다.

“마기 말입니까……"

연소현은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마기만큼,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기운은 없죠. 패도(覇道)적으로 강력하나, 기운 자체가 사악하기 짝이 없어 사람의 인성을 망가뜨린다는 것 이외에는 거의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마교(魔敎)의 마인(魔人)들이나 마기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무공과 관련 있는 모든 정보를 광적으로 수집하는 것으로 유명한 낙양검가에서도 마기에 대한 근본적인 자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학(武學), 즉 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영역에서 일대종사에 가까운 경지에 도달한 연소현조차도, 마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극히 적었다.

노인은 키득키득하고 웃었다.

"무인이 기를 다루는 것처럼, 마인이 마기를 다룬다고,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잘못된 사고일세.”

“그렇습니까?”

노인은 손을 들어 마기를 불러일으켰다.

“애초에 이것은 자네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비롯된 기운이 아닐세.”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애초에 근본적으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분야들이 몇가지 있었다.

귀신, 저승, 부적(符籍), 주술(呪術), 도술(道術), 선술(仙術), 불법(佛法), 선법(仙法) 등, 사람들의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분야가 그러했다.

그런 분야를 일부에서는 신비학(神秘學) 또는 형이상학(形而上學) 따위로 불렀다.

“마기는 필멸의 존재가 감히 관측할 수 없는 외우주(外宇宙)에서 부터 흘러들어 오는 기운.”

연소현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맥락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마기는 우리의 우주, 현실을 침식하고, 부식시키고, 왜곡하는 힘일세.”

* * *

야간전투를 대비하여 흑골파의 인원들이 여기저기 피워 두었던, 화톳불의 화염이 어두워졌다.

화염이 어두워지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횃불도 주변을 제대로 밝혀 주지 못했다.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고, 밤은 더욱 깊어졌다.

“으으으.......”

조금 전까지 용맹을 넘어 광기에 잠식당했던 혹골파 인원들의 입에서 하나둘씩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들이 잊고 있었던 상처에서부터, 끔찍한 통증이 돌아왔다.

삶을 향한 욕구로부터 비롯되는 공포가 돌아왔다.

금주가 사용했던 주술은 연소현으로부터 비롯된 마기에 의해 허무하게 스러졌다.

흑골파의 인원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움켜쥐고 점차 뒷걸음질 쳤다.

세차게 부는 바람은 눈보라처럼 차가웠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탑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하얀 가면의 시선이 너무나 두려웠다.

“칫…….”

금주는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원초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억눌렀다.

그녀는 강하게 기파(氣波)를 일으키며, 내공을 담아 외쳤다.

“도망치는 놈은 죽는다! 싸워라!”

하지만 울려 퍼진 그녀의 목소리는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효과를 냈다.

“도, 도망쳐!”

“악귀다! 악귀가 나타났다!”

흑골파의 인원들이 형성하고 있던 전열(戰列)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모래성같이 무너져 내렸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켰고,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자도 있었으며, 자신이 믿는 신들의 이름을 외치는 자도 있었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본진 방향이 아니라 방금까지 칼을 맞대고 싸우던 이들의 방향으로 도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현월각의 지휘부, 정신을 차린 부관의 물음에 세아가 외쳤다.

“전 인원 현재 위치 고수하라!”

그녀가 그렇게 외치지 않았더라도, 이미 대다수가 전의(戰意)를 상실한 상태였다.

실전을 거쳐 담금질된 현월각의 정예 전투 요원들조차, 자신들을 지나쳐 도망치는 이들을 어떻게 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소현은, 제암진천경의 연자는 그들을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막(幕)이 올랐으니, 등장인물들이 마음대로 퇴장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이전의 소굴 습격에서는 흑골파 내부의 공포를 키우기 위해, 몇몇을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살려 두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멈춰라.]

의지(意志)는 마기에 담겼고, 언령(言令)이 된 목소리는 무자비하게 현실을 침식해 나갔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도망치던 한 흑골파의 폭력배가 그 자리에서 나뒹굴었다.

그는 자신의 발목을 쥔 하얀 손을 볼 수 있었다.

“으아아……!"

그는 그 손을 향해 반대편 발로 발길질을 가해 떨쳐 냈다.

하지만 곧이어 일어난 수십의 손이 그의 하체를 부여잡았다.

[그 자리에서 죽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지(心地)가 약한 자들부터, 얼굴의 오공(五孔)으로 피를 쏟으며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즉사(卽死)였다.

조금은 저항을 하던 이들도, 하나둘씩 뇌의 혈관이 파열하고, 심장이 터져 죽어 갔다.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실린 언령에, 내공도 없는 일반인이 저항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골목마다 들어찼던 흑골파의 인원들이 순식간에 사방에서 죽어 나자빠져 갔다.

“……원시천존(元始天尊)이시여.”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현월각의 현장 지휘관이 자신의 신을 찾았다.

북부의 그 거친 전장에서 복무하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낸 그였다.

그는 이민족의 주술사들이 펼친 것으로 의심되는 기괴한 현상들을 몇 번이나 보았었다.

피를 말리는 전투 후에 비를 맞으며 먹고 있던 밥의 쌀알이 눈앞에서 구더기들로 변하는 것도 보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린 병사들의 피부 전체가 종기로 뒤덮이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보았던 그 어떤 끔찍한 주술도,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상보다 기괴하고, 두려운 것은 없었다.

“저, 저길 보십시오!”

세아는 부관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시체가……?!”

그녀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드리운 짙은 어둠으로부터 솟아오른 하얀 손들이 죽어 나자빠진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당겨진 시체들은 바닥의 어둠,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가라앉아 갔다.

시체를 먹어 치운 그림자로부터 그르렁거림이 들려오기도 했다.

몇몇 그림자는 마치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상리(常理)를 뒤틀고, 상식을 초월한 광경에 현월각의 몇몇 인원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구토하는 이들도 있었고, 울음을 터트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 이게……'

세아는 그 모습을 보자, 어째서 암천존자가 습격했던 흑골파의 현장에 전혀 시체가 남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다시 탑의 꼭대기를 바라봤다.

“빌어라, 너희는 무심한 하늘에 기도해라!”

하얀 가면을 쓴 괴물이 광소(狂笑)를 터트렸다.

“나는 너희가 괴롭히고, 죽어 간 순박한 이들의 부름에 여기 임했도다!”

그 웃음소리가 하늘을 뒤덮은 짙은 구름을 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겨우 살아 버티던 혹골파의 생존자들은 그 웃음소리에 전부 죽음을 맞이했다.

세아는 무릎이 휘청였지만, 간신히 버텼다.

그를 직접 보기 전까지, 그녀는 현월각의 주요 인사들과 많은 분석을 했다.

고수, 혹은 벽에 다다른 수준의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일 것이다.

우수한 능력을 갖춘 조력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몇몇 이들은 소문이 많이 과장되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예측도 분석도 소용없었다.

저것은 완전히 상궤(常軌)를 벗어난 존재였다.

“……저것이 암천존자.”

저것이 바로 낙양검가의 조롱받는 대공자, 연소현의 참모습이었다.

* * *

금주는 가만히 앉아서 당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이 자식들이 뭐 하고 자빠졌어?! 당장 공격해라!”

애초에 흑골파가 보유한 흑도 무림인은 누구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모두 지금을 위해서였다.

“전부 움직여!”

수십 명의 흑골파 소속 무림인과 급히 초빙된 흑도 무림인들이 일제히 경신법을 펼쳐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에서 지붕을 넘어 몰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흑골파에 무림인이 저렇게 많았단 말이야?!”

세아는 그 모습에 경악했다.

“우리의 정보보다 두 배는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장 지휘관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정도 숫자의 무림인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벽을 넘어선 고수라고 해도 충분히 상대해 볼 수 있을 전력이었다.

거기다가 저쪽에는 금주까지 있지 않은가.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고, 상리에서 벗어난 기괴한 능력을 사용하는 암천존자라지만, 상대의 전력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도와야……"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

세아를 제지한 것은 규였다.

요원들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에 세아가 반색했다.

“규!”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꼴은 엉망이었지만, 부상은 그리 심해 보이지 않았다.

세아는 그런 규를 부축해 바닥에 앉히며, 물었다.

“도울 필요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저것, 아니……"

규는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말을 교정했다.

“암천존자는 진짜 괴물입니다.”

“하지만 저쪽에는 고수의 경지에 오른 금주까지……"

“아닙니다, 절 믿으십시오.”

규를 바라보던, 세아는 충격을 느꼈다.

금주 앞에서도 그리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던, 규였다.

목전에 닥친 죽음 앞에서도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깃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두려움이었다.

“그는 벽을 넘고 말고가 의미가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고수를 봐 왔던 저입니다.”

주변의 이들은 모두 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만약에 제가 대적한다고 하면……"

규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저 따위는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누군가 규에게 다시 물으려 했을때, 그들의 뒤에서 엄청난 살기가 터져 나왔다.

마치 지금까지의 살기는 장난이 었다는 듯이, 암천존자를 중심으로 살기가 폭발하고 있었다.

“저, 저기를 보십시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암천존자가 서 있던 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

탑을 순식간에 타고 오른 이들이 일제히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오히려 튕겨 나가는 것은 그들이었다.

암천존자의 공격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무언가 한번 검은 번개 같은 것이 번쩍일 때마다, 흑골파 측의 한명이 탑 밖으로 튕겨 나갔다.

허공에서부터 팔다리가 비산하고, 내장이 흩날렸다.

탑 꼭대기 근처가 뿌옇게 피어오른 피 안개로 뒤덮일 지경이었다.

“지, 진짜 괴물이잖아……"

누군가의 말에 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제가 볼 땐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규가 덧붙였다.

“그는 아직 진짜 실력을 내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의 담담한 말에 모두는 할 말을 잃고, 그저 탑 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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