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강림(降臨)
남과 자신을 비교하길 좋아하는 무림인들과 무림에 관심이 많은 호사가(好事家)들의 가장 큰 화제가 있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무림인의 경지를 체계화하기를 원해 왔다.
마치 차(茶)나 옷감의 등급을 매기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시도는 실패했다.
내공의 양으로 기준 삼는 것도,
기(氣)를 외부로 발출할 수 있는 시점을 기준 삼는 것도,
심지어는 전투력을 기준으로 삼는 것까지,
어떤 것도 기준으로 삼기엔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가장 기준을 세우기 괜찮아 보였던 것은 전투력이었다.
결과는 처음 언급했듯, 실패였다.
전투라는 것은 결국 개인 간의 상성(相性)이 너무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등급을 세분화하는 작업은 실패했고, 단 하나의 기준만이 남았다.
벽(壁).
모든 무림인은 성장하다 보면, 성장이 둔해지는 시점이 오게 되고, 결국 하나의 벽을 만나게 된다.
그 벽을 넘은 자들은 일순간 다른 사람이 된 정도의 강함을 손에 넣게 되고, 다시금 성장의 여지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벽을 넘은 강자들을 일컬어 '고수(高手)'라 부르게 되었다.
* * *
세아의 호위, 규는 사실 금주를 보자마자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벽에 가까스로 다다른 자신과는 다르게, 지금의 금주가 보여 주는 강함은 명백히 벽을 넘은 '고수'의 그것이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그리 쉽게 당해 주진 않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가씨를 지켜야 했다.
자신은 호위였다.
“일검(一劍), 태세(態勢).”
그녀의 사문에서는 검을 세워 기수식(起手式)을 취하는 행동을 첫번째 검격(劍擊)과 같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기수식을 취하는 행동과 동시에 심신(心身)이 완벽하게 전투태세로 전환됨을 의미했다.
단번에 규의 기세(氣勢)가 달라졌다.
극한까지 끌어 올린 그녀의 안력(眼力)에 금주가 반파된 건물을 박차는 것이 보였다.
'온.......'
규를 살린 것은 무수히 쌓아 왔던 실전 경험에서 길러진 감각이었다.
'……다!'
그저 감각이 이끄는 대로 보법(步法)을 운용했고, 빛살처럼 날아온 금주가 그녀를 스치며 서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미친……!’
직격은 피했지만, 금주가 바닥을 내리찍은 위력으로 발생한 충격파가 규를 강타했다.
규는 사문의 보법이 담은 묘(妙)를 살려 충격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그녀는 판단했다.
금주의 첫 공격은 대단히 강력한 공격이었고, 두 번째 공격이 바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를 준비했다.
사검(四劍), 연무(煙霧).
그 검(劍)은 면面)을 제압하여 차단하는 방어의 오의(奧義).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의 감각은 정확했다.
홁먼지를 뚫고 날아든 두 번의 공격이 '사검, 연무'에 가로막혔던 것이었다.
“큭!”
내공을 쏟아부은 방어였다.
하지만 금주가 날린 두 번의 공격은 규의 손목과 어깨가 뒤틀려 버릴 것 같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뒤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사용했던 보법과 공격의 여파 때문에 벽에 처박힌 것 또한 타격이 있었다.
하지만…….
“호오?”
그래도 시간은 벌었다.
흙먼지 속에서 금주가 홍의궁장을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이네?”
규의 판단대로 오만한 금주의 성격상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규는 이번에도 자신의 판단과 다르게 움직였다.
이검(二劍), 격류(激流).
상대 공격의 맥(脈)을 끊어 제압하여, 그 여력으로 반격을 가하는, 공방일체(攻防一體)의 기술.
'제길, 공방일체는 무슨……'
금주가 대화를 거는 척하며 날린 일격을 비껴 내는 것이 한계였다.
아니, 사실 비껴 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 일격은 궤적을 예측할 수 없는 기괴한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야, 너 진짜 좀 하는구나?”
금주가 손목을 털며 감탄했다.
'적수공권(赤手空拳)?'
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채찍(鞭)이나, 유성추(流星錘) 같은 계열의 무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은 설명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관절이 있는 사람의 팔이 저리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야, 사람이 칭찬하면 감사를 해야지. 예의 없는 계집년 같으니라고.”
물론 기수식으로 돌아온 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경지 차이가 분명한 상대를 앞에 두고 대화하느라 호흡을 망가트리면, 다음 순간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화하든 안 하든 이미 자신의 한계가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공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내가기공(內家氣功)을 너무 연속적으로 사용한 것이 탈이었다.
“대답 안 해?”
이번 공격도 궤적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기괴하게 뒤틀리며 들어온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은 상성 때문이었다.
이검, 격류와 규의 뛰어난 감각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결과였다.
“대답하라고.”
다시 한 번.
'제기랄……!’
원래 전투는 내공(內功)과 외공(外功)의 조화를 통해 풀어 나가야했다.
하지만 상대와의 수준 차이가, 그녀에게 불가피하게 연속적으로 내가기공을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 연속적인 내가기공의 사용은 그녀의 내력 소모를 배가(倍加)하고 있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버틸 수 있으려나.'
벌써 손목에는 감각이 없어졌고, 어깨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단전이 허했다.
“그래, 좋아. 이번 공격도 막아보렴.”
"......!"
살기가 몸을 꿰뚫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아예, 아무런 궤도가 보이질 않았다.
'사검, 연……!’
내력이 이어지질 않았다.
지나친 연속적 내가기공의 사용으로 그녀의 혈도가 과부하 상태에 빠진 탓이었다.
“꺄악-!”
하지만 규의 몸에는 아무런 타격이 오질 않았다.
방정맞다시피 한 비명은 규의 것도, 금주의 것도 아니었다.
규의 뒤를 향해 날아왔던 금주의 일격을 막아 낸 소녀가 바닥을 몇 바퀴 구르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규를 향해 권갑(拳鉀)을 낀 손을 흔들었다.
대단한 미소녀였다.
“많이 기다렸죠? 지원군이에요!”
“이 벌레 같은 년이!”
“소저, 조심……!"
금주의 다음 일격은 또 다른 이에게 막혔다.
“어이쿠…….!"
곰 같은 체격의 남자였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이거 엄청난 상대로군. 우리 살아서 걸어 나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소.”
소녀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어요!”
그들이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혈도의 과부하를 다스릴 수 있었던 규가 그들에게 합류했다.
“우리로는 무립니다. 지원은 더 없습니까?”
단호한 규의 말에 소녀가 울상을 지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전부예요.”
규는 짧게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금주는 그들을 향해 조소(嘲笑)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상의가 끝났으면, 다 같이 덤벼보렴. 이 벌레들아.”
* * *
세아는 현장 지휘관 곁으로 피신하여, 규에게 지원을 보내는 것에 성공했다.
“……어떻게든 지원 가능한 무림인은 더 없나?”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세아의 낯빛은 어두웠다.
“3조, 10조, 인원 손실이 커 후퇴합니다!”
“17조에서 지원 요청!”
금주가 전선에 등장한 직후, 어째서인지 흑골파 쪽의 사기가 말도 안 되게 치솟았다.
“크아아아!”
한낱 폭력배에 지나지 않던 이가 칼에 꿰인 채로 달려들며 도끼를 거칠게 휘둘러 댔다.
앞의 이가 죽든 말든, 자신이 죽든 말든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자신의 목숨조차 도외시하고 덤벼드는 그것은, 이미 사기라고 부르기보다는 광기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으헉!"
그때 세아의 눈에 금주를 상대하던 커다란 덩치의 무림인이 튕겨 나가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의 팔 한 짝은 사라졌고, 전신은 걸레짝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돼!”
세아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미소녀 쪽도 튕겨 나갔다.
“꺄악!”
다행히 그녀의 부상은 크지 않아 보였지만, 단전에 타격을 받았는지, 안색은 창백했고, 입에서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상처투성이의 규뿐이었다.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검을 들어 금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먼 거리에서도 그녀의 검이 형편없이 떨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규, 도망쳐!”
그 소란 중에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을 리가 없었다.
규는 세아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바라봤다.
마치 마지막으로 세아의 모습을 눈에 새기길 원하는 것처럼.
'주군(主君)……"
규의 앞에 선 금주가 손을 치켜 들었고, 그 손에는 눈에 보일 정도로 유형화된 기가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세아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던 하얀 입김이 한층 강해진 것을 느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느꼈다.
땀으로 젖었던 등판이 얼어붙듯이 시려 왔다.
그녀는 무엇에 홀린 듯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서 명령을 전달하던 현장 지휘관도, 부관들도 그대로 멈춰, 그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흑골파의 인원들도, 당장에 칼을 휘두르려던 현월각 소속의 전투 요원도, 움직임이 멎었다.
심지어 자신의 손에 기를 응축하던 금주도, 마지막을 준비하던 규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던 무림인들도,
모두가 침묵했다.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서녘.
붉은 해가 빠른 속도로 멀리 산 너머로 모습을 숨겼다.
땅거미가 한없이 길게 뻗어, 깊은 어둠에 섞여들었다.
어스레한 그 풍경 속에서 높은 건물들이 노을빛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 가장 높은 탑의 지붕.
그 위에서 '어둠'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의 몸에는 오한이 치달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담이 강한 이도 두려움에 떨었고, 이 자리에서 가장 낙천적인 이도 절망을 느꼈다.
'……밤(夜).'
세아는 무의식중에 느꼈다.
'밤이 왔다.'
가장 어둡고, 가장 추운, 가장 잔혹한 밤이 그들을 찾아왔다.
지붕 위의 어둠은 날개를 펼치듯 거칠게 날갯짓을 했다.
그 어둠은 무엇보다 짙고 더욱 어두웠다.
그것은 완전한 빛의 부재(不在)였다.
그것이 한 번 홰치자 밤이 거리를 뒤덮었다.
가장 홍포한 야수의 기세처럼 그 어둠의 장막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쫓기듯 저문 태양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달빛도 별빛도 들지 않았다.
어떤 공간이든 어둠이 가득 차 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둑에서 터져 나온 격류와 같이 쏟아진 어둠이 지켜보던 이들을 휘감고 지나갔다.
’……하얀 가면.'
그 칠흑 같은 어둠은 세상을 비웃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무력한 하늘과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을 조소하는 그 하얀 가면만이 처절하게 빛났다.
그가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기다렸나.”
끓는 쇳물 같은 그 소리는 처음에는 목소리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 귀기(鬼氣) 가득한 소리는 귀를 후벼 파고들어, 고막을 난자하고, 뇌까지 도달하자 의미가 되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세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저것이……:
하얀 얼굴을 한 사신,
천고(千古)의 마물(魔物) 제암진천경(制暗震天經)의 연자,
암천존자(暗天尊者)가 오롯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