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0화 (30/350)

제5편 전초전(前哨戰)

“휴우, 끝났다.”

요리를 마친 정아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들어, 이마를 닦았다.

음식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뚜껑들을 잘 덮어 두고, 언제든 데우기만 하면 식사 준비를 마칠 수 있게끔 준비를 끝냈다.

앞치마를 벗어 두고, 잠시 멈춰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윽고, 정아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짐을 들고 부엌을 나섰다.

닫힌 아궁이 속에서 꺼져 가는 숯불이 발갛게 빛났다.

* * *

겨울의 짧은 태양이 뉘엿거리며 저물어 가기 시작하는 시점.

흑골파 본진 근처의 높은 건물 지붕 위.

저 멀리서 보내는 수신호를 확인한 요원이 대기 수신호를 보냈다.

질 좋은 검은 야행복은 요원의 숙련도를 의미하듯 군데군데 닳아있었다.

등에 단단히 고정한 무장과 몸 곳곳에 단검이나 비침(飛針) 등의 부무장이 눈에 띄었다.

지붕 위의 요원이 보낸 신호를 확인한 전령이 현장 지휘관에게 보고했다.

“십오조 위치했다고 합니다.”

“십오조 정위치, 확인.”

마찬가지로 야행복을 입은 현장 지휘관이 그 보고를 받아 상황을 종합했다.

상황을 모두 확인한 지휘관은 자신의 옆에서 대기하던 전령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령은 몇 개의 지붕을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넘어, 한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 노대(露臺)에 착지 했다.

그가 착지한 노대에는 야행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야행복 차림의 여인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보였다.

여인은 한쪽 눈에 현월(弦月) 문양이 새겨진 안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각주(閣主). 지역의 민간인들을 소개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요원과 협력자들까지 위치 확보하여 대기 상태입니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은 다름 아닌 현월각주, 세아였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자신의 입가를 가리고 있던 천을 끌어내렸다.

“모두 현 위치에서 경계 유지. 상황이 시작되면, 교전 수칙에 따라 움직인다. 모든 돌발 상황에 대한 대응은 모두 후보고. 이후 지휘권은 현장 지휘관에게 일임한다.”

전령은 작지만 명료한 목소리로 지시를 복창한 후, 다시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일개 정보 단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체계화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월각이 중원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낙양에서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잠시 후, 인원이 자신의 임무를 위해 하나둘씩 빠져나간 자리에는 세아와 그녀의 호위만이 남았다.

벽에 기댄 채, 찬 바람을 쐬는 세아에게 호위가 말을 걸었다.

“불안하십니까?”

세아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다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솔직하게 대답을 하기로 했다.

“……불안하다기보다는 복잡해.”

“그렇습니까.”

그리고 아무 말도 없는 호위였다.

세아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대공자님과의 대화 다 들었었지?”

호위가 고개를 저었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특히 '혁' 어쩌고 하는 단어는 더 못 들었습니다. 저를 더 이상 끔찍한 일에 끌어들이지 말아 주시죠. 당장 그만두겠습니다.”

세아는 무시하고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네가 보기엔 어땠어? 대공자님말이다.”

호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아가 조금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그 대화를 듣고도? 그가 암천존자라는 걸 알아도?”

“일단 그 대화는 무슨 대화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말 돌리지 마.”

호위는 검은 천으로 감싸인 뺨을 긁었다.

“무서운 분이죠. 안 무서울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호위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어째서인지 그 대공자님이 마음에 듭니다.”

세아는 한숨을 쉬었다.

“얄미운 대답이네.”

잠시 대화가 멈췄다.

이번에는 호위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아가씨가 정한 대로, 따릅니다. 가시는 대로 함께 갈 뿐입니다.”

세아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것이 인외마경의 시산혈해가 펼쳐진 명부마도라도?”

“……그건 다시 좀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만.”

호위가 세아를 마주 바라봤다.

“마음 가시는 대로 정하시면 됩니다.”

“응."

호위의 어깨를 툭 하고 쳐 준 세아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위장이 철저하게 된 난간의 너머로 멀리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흑골파의 본진이 보였다.

슬슬 어둠을 대비하기 위해 횃불을 든 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세상이 변할 때까지 악인들을 죽이고 또 죽인다고?’

평소의 열 배는 넘어 보이는 이들이 무장을 단단히 한 채, 순찰을 돌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미친 소리를 태연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사람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주겠어.'

그때 전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각주. 현재 다수의 골목에서 산발적으로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초전인가?”

“옛. 현장 지휘관은 미리 퇴로를 확보하는 움직임으로 분석했습니다.”

세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시작이군.”

* * *

좁은 골목.

“이 X같은 새끼들! 우리가 조금 만만해지니까, 개나 소나 깝치고 자빠졌어!”

얼굴에 빼곡하게 검은 해골 문신을 새긴 사내가 쭈뼛거리는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뭐 해, 이 새끼들아?! 당장 공격 들어가!”

뒤에서 칼을 휘두르며 명령하자, 각종 무기를 챙겨 든 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야행복을 입은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야행복을 입은 삼(三) 인 중 가장 앞에 선 이가 몸을 숙여 발도 자세를 취했다.

“죽어라!”

가장 앞장선 덩치가 휘두른 도끼는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동시에 덩치의 뱃가죽이 길게 찢어지며 피와 내장을 흩뿌렸다.

어느새 뽑아 든 장도가 번뜩이자, 달려들던 이들의 목이 잘리고, 팔이 덜렁거리며, 가슴팍이 열렸다.

단숨에 선봉의 예기가 꺾였다.

“이 새끼들아! 더 밀어붙여!”

뒤로부터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호통에 흑골파의 인원들이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예봉을 꺾어 버린 전투 요원이 뒤로 빠지며, 그들의 돌진력을 죽였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두 요원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오며, 들이닥 치는 이들을 베어 넘겼다.

일방적이 었다.

서로 내공이 없는 이들이 맞나싶을 정도의 차이였다.

애초에 혹골파의 인원들은 대부분이 이런 종류의 전면전에는 전혀 조예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깡패나 폭력배 수준에 불과한 정도였고, 그런 이들이 혹독한 훈련과 실전을 거쳐 온 현월각의 정예 전투 요원들을 제압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야, X발. 안 되겠다.”

흑골파 행동대장이 자신의 뒤를 향해 외쳤다.

“야! 전부 옆으로 붙어 서! 뒤에서 대기하는 애들이 먼저 나오게끔 길을 열어 주라고!”

그의 말에 따라 혹골파의 인원들이 골목에 붙어 섰다.

“제길……"

갈라진 인원들 사이로 새로 투입되는 이들을 본 현월각의 요원이 이를 갈았다.

“창이다.”

수십 개의 창날이 석양빛을 반사해 번뜩였다.

* * *

“지휘관님! 창입니다! 놈들이 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지휘 참모가 외쳤다.

“고작 퇴로를 확보하려는 싸움이 라기엔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점차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본진 방비를 해야 할 병력까지 전부 다 빠져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월각 측의 현장 지휘관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예비대를 전부 투입해라!”

“옛!"

현장 지휘관은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골목들을 내려다보았다.

“본진이 허술해져도 기세를 더욱 중요시하겠다는 건가.”

* * *

“더 밀어붙여! 이 새끼들아, 이렇게 된 거 팍팍 밀어붙여라!”

흑골파 간부의 외침에 골목으로 향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났다.

“이렇게 본진을 지킬 놈들까지 빠져도 되는 거요?”

다른 간부가 옆에서 불안함을 표했다.

처음은 단순히 퇴로를 확보해 볼겸 인원을 투입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투입이 다수의 인원에게 도망칠 기회로 인식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하나둘씩 뛰어들기 시작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본진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후퇴시켜 봤자, 혼란만 부추길 뿐이야! 기세라도 살리는 게 낫지, X발!”

군관(軍官) 출신다운 간부의 판단이었다.

“거기다가 어차피 진짜 싸움은 저놈들이 할 거 아냐?”

그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했다.

담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흑도 무림인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야! 시X. 그래도 무기는 들고 가야지! 아니구나, 저 새끼는 진짜 도망친다! 죽여 버려!”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전초전에 불과했던 전투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 * *

“인원 부족은 걱정하지 마라.”

세아가 전령에게 말했다.

“곧 내 연락을 받았던 이들이 도착하기 시작할 거다.”

전령이 현장 지휘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자리를 떴다.

“얼마나 올 것 같습니까?”

호위의 물음에 세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엄청나게들 올걸.”

그녀는 난간에 두 손을 올리고, 말을 이었다.

“흑골파는 너무 많은 원한을 샀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양각색의 복장을 갖춘 이들이 속속들이 합류를 시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합류하자, 전황은 다시 역전되어 가기 시작했다.

“다들 간도 큰 것 같습니다. 금주에겐 검가동패가 있는데. 낙양검가가 두렵지도 않다는 겁니까?”

그 말에 세아가 멈칫했다.

“아가씨?”

세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내가 다 책임질 거라고 큰소리를 좀 쳤지.”

"......."

할 말을 잃은 호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세아를 바라봤다.

“그, 그렇게 보지 말라고. 어차피 암천존자가 소문처럼 그렇게 대단하다면, 우린 충분히 묻어갈 수 있을......”

그때 세아는 자신의 몸이 순간적으로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귓가에는 굉음이 몰아닥쳐, 멍해졌고,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려, 위 아래를 구별할 수도 없었다.

“……가씨! 아가씨!”

정신을 차리자, 자신을 강하게 흔드는 호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무슨……!"

그리고 그녀의 뒤로 자신들이 있던, 건물의 상층부가 반파(半破)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엄청난 내공이 담긴 그 웃음소리에 골목마다 진행되던 교전이 잠시 멈출 정도였다.

“아가씨, 저길 보십시오!”

호위의 외침에 세아의 시야가 반파된 건물의 위를 향했다.

홁먼지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여인, 금주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드러난 피부 곳곳마다 홍측하게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눈에 보일 정도로 유형의 기파를 사방으로 줄기줄기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파를 따라 그녀의 옷자락이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흔들렸다.

"......!"

세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아는 내공이 전혀 없었음에도 금주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호위가 세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우리가 알던 그 금주가 아닙니다.”

세아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금주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월각주!”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놈이 오기 전에, 너부터 죽여주마!”

호위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세아를 떠밀었다.

“도망치십시오!”

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뛰었다.

“규(奎)! 반드시 살아야 해!”

규라 불린 세아의 호위가 검을 빼어 들며 외쳤다.

“아가씨야말로!”

세아는 이를 악물었다.

'대공자! 암천존자! 어디서,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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