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각오(覺悟)
"대공자께서 그 암천존자(暗天尊者) 이시옵니까?”
연소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표정을 한 채 김이 솟아오르는 따스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쥘 뿐이었다.
“……암천존자가 뭐지?”
세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순순히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흑골파의 인육 공장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들을 구출해 준 이가 하얀 가면을 쓰고 서생들이 입는 백색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들었사옵니다.”
백색 무명옷을 입은 연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인가 보군.”
“대공자께서도 그와 같은 복장과 가면을 가지셨지요.”
“내 소지품 검사라도 할 참인가?”
세아는 탁자에 바짝 당겨 앉았다.
“어째서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때 제게 하셨던 말은 다 뭐였습니까?”
연소현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즐기고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대는 각오가 되어 있느냐?”
세아는 자신의 잔을 꽉 쥐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얼마든지 각오가 되어 있사옵니다.”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순수한 이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도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각오?”
그것은 그날 밤 연소현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날 이후 저는 그 말씀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사옵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바꿀 만큼의 피.
연소현이 묻는 순수한 자들의 희생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대공자께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역성혁명이라는 말에 대화를 듣지 않는 척, 창가에서 딴청을 부리고 있던 세아의 호위가 대경하여, 밖을 경계했다.
그것은 누군가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두가 화를 당할 수가 있는 단어였다.
“역성혁명이라…….”
연소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맹자 왈(日), 인(仁)을 해하는 이는 적(賊)이라 일컫고, 의(義)를 해하는 이를 잔(殘)이라 일컫는다.”
그가 먼저 고사를 인용하는 일은 잘 없었지만, 그가 고사를 모를 일은 없었다.
“잔적(殘賊)한 이는 일개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음이니, 무왕께서 주라는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왕을 시해(弑害)했다는 말은 들어 본 바 없다 하였는바.”
호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의 내공을 최대한 끌어 올려 주변을 경계했다.
세아 또한 자신의 손에 홍건한 식은땀을 느끼며 물었다.
“……대공자께서 말씀하신 길이라는 것이 그것을 일컫는 것이옵니까?”
인외마경(人外魔境)의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진 명부마도(冥府魔道).
연소현은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시대에 그것이 가능할 것 같은가?”
"......."
그것은 너무나 무거운 물음이었다.
단지 황실을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에 대해 논하는 것이 가장 무거운 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감히 제 주제에 사고해 볼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질문 같사옵니다.”
연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 대륙에서 가장 영리하다는 자들을 모아 놓고 토론시켜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중원국(中原國)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제국은 너무나 거대했다.
심지어 그 안에 사는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조차 제대로 집계된 적이 없었다.
“이 땅에 문명이 시작된 뒤로, 이토록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 적이 또 있었을까. 그럼에도 이토록 천하의 정세가 안정적인 것 또한 기이한 일이다.”
연소현은 말을 이었다.
“이런 시대에 혁명이라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지.”
세아는 자신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대공자의 길은 무엇이옵니까?”
연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세아의 호위는 불길이라도 다가오는 양, 급히 창가에서 물러나 반대쪽 벽으로 가서 붙었다.
"......."
그녀는 감히 방 안으로 시선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벽면을 바라보고 섰다.
“나는 생각했다.”
연소현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 다.
“역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피가 흘러야 한다면, 굳이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불가능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나 대의(大義)의 깃발 아래 죽어 가는 순박한 이들의 피만이 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연소현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들었다.
“그냥 그만큼 나쁜 놈들을 죽이면 어떨까?”
“……예?”
“그 모든 무고한 이들이 홀려야할 피만큼, 악인들의 피가 흐르면 어떨까?”
미치광이 같은 발상이었다.
게다가 유아적이고, 유치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무슨 농담입니까. 무고한 이들이 피를 흘린다는 것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황하여 익숙지 않은 극존칭까지 잊은 세아였다.
혁명의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지, 단순히 죽음의 수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가정이야. 한번 생각해 보자는 거지.”
가벼운 연소현의 말에 세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어린아이나 할 법할 생각을......”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선한 이와 악한 이를 쉬이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세상은 절대 단순히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었다.
“만약 나눈다고 하더라도 무슨 기준으로 나누겠습니까?”
법? 도덕? 그런 것들은 상황에 따라서도 변하기 나름이었으며, 무엇보다 인간이 만든 제도는 언제나 불완전했다.
“게다가 그 소위 악인들을 마음대로 분류하여 전부 죽인다니요. 역사를 바꿀 정도로 많은 악인을 전부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있을 리도 없고……"
거기까지 말을 이어 나가던 세아의 말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있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대로 죄인을 판별해서 처벌하는 것은......."
하얀 가면을 쓴 사신(死神).
“훨씬 더 큰 악에 불과한 미치광이......."
암천(暗天)의 주인.
천벌(天罰)의 대행자.
무심한 하늘과 땅을 대신해서 검은 벼락을 내릴 존재.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그 존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암천존자(暗天尊者).”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이 웃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좋은 이름이야. 그 암천존자라는 이도 마음에 들어 할 것이야.”
그는 해맑게 웃었다.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가정이, 그 암천존자라는 이의 행동이 성공할 수 있을지, 실제로 가능할지, 나는 궁금한 것이다.”
세아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인외마경(人外魔境).
그것은 사람의 이해와 법도를 벗 어나,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와 피로, 산과 강을 만드는,
명부마도(冥府魔道).
인간을 포기한, 저승의 마귀만이 걸을 수 있는 길.
원래라면 홀렸어야 할 모든 선량하고 무고한 이들의 피를 대신 흘리고, 원래라면 치렀어야 할 모든 악한 이들의 죗값을 대신하여 묻는것.
“그런……"
세아는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과연 여기서 더 깊은 곳에 발을 들여놓을 무모함이 있는가.
세아는 연소현이 정체를 묻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그날 밤 연소현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아직 너희 자매의 운명은 결정되지 않았다.'
세아는 혼미해진 정신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씀 감사했습니다. 저도 이제 할 일이 있어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가 많군.”
세아는 그 뒷모습을 향해 인사를 올리려다 입을 열었다.
“이제 사실상 흑골파는 본진만이 남은 상황이지요.”
“그러한가?”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 저와 소수의 정예 전투 요원들은 협력자들과 함께 그 본진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위험한 거 아닌가? 금주는 검가동패를 가졌다고. 아무리 그쪽에서 먼저 습격을 했다는 명분이 있어도 검가는 참작(參酌)해 주지 않을 것이다.”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안으로 돌입하지는 않습니다. 그 일을 해 줄 이는 어차피 따로 있으니까요.”
그녀의 시선이 연소현의 등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지도 않을 겁니다. 오늘 어떤 잔당(殘黨)도 본진을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세아는 나직하게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 정도 가지고도 검가가 트집을 잡는다면, 한번 붙어 봐야겠지요.”
세아는 무림인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무림인의 기세를 방불케하는 그녀만의 기백이 있었다.
“어차피 검가 전체도 아니고, 금주에게 동패를 수여한 이만 상대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소현은 이견이 없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도 그 정도의 각오는 있습니다.”
세아는 자신 몫으로 있던 찻잔을 들어 식어 버린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녀는 빈 잔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깊이 고개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그럼.”
“그래.”
세아는 자신의 호위가 열어 주는 문으로 향했다.
"......."
연소현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아의 눈에는 그것이 어째서인지, 태양의 밝은 빛과 따스함에 목 말라하는 이의 몸부림으로 보였다.
* * *
흑골파의 간부가 휘두른 칼이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이의 목덜미를 끊어 냈다.
도주를 기도했던 이들이었다.
그는 시체를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겁쟁이 같은 놈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칼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금주 아가씨의 명이다! 다들 옥쇄(玉碎)를 각오해라!”
* * *
금주는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총관에게 물었다.
“……역시 아버지도 도움을 거절했을 테지?”
“……예. 그렇습니다.”
도움을 구하기 전부터 이미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 괴물 같은 하얀 가면의 경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
전력이 파악되지 않은 상대를 잡기 위해서 그 귀한 고수를 아무렇게나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였다.
게다가 허울뿐인 관계임에야, 더욱
금질에게 있어서 그의 수양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으니까.
금주의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총관은 금질이 자신의 수양딸에게 전하라 했던 말을 어렵게 늘어 놓았다.
그 말을 모두 전해 들은 금주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아끼던 흑단목 탁자를 집어 던지며, 괴성을 질렀다.
날아든 벼루에 머리를 얻어맞은 하녀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구석에서 공포에 질려 떨고 있던 다른 하녀들이 달려와 쓰려진 하녀를 살폈다.
쓰러진 하녀는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켰고, 터진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흘러나와 바닥에 퍼져 나갔다.
“……쓸모도 없는 것들.”
금주는 총관에게 물었다.
“본진에 남은 노예들이 몇이나 되느냐?”
총관이 급히 대답했다.
“그, 그것이 아시는 것처럼 본진에서는 거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에 머릿수가 많진 않습니다.”
금주는 동료의 시체를 끌고 나가는 하녀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노예들과 쓸모없는 비전투 인원까지 모두 지하에 모아라.”
“무, 무슨 생각이신지……?"
총관이 말을 더듬었다.
“스승께 배운 의식(儀式)을 행할것이다.”
“의식, 말입니까?”
의식이라니, 아닌 밤중에 무슨말인가.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라도 지내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악귀를 쫓아내는 기원?
금주는 총관을 무시하고, 자신의 손톱을 깨물었다.
’……그 괴물 같은 스승이 알려준 괴이쩍은 비술(祕術) 따위는 끝까지 피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에게 이제 대안은 없었다.
'제길.'
그녀에게는 필요하면 모두를 희생시켜서라도 살아남을 각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