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8화 (28/350)

제3편 연소현(淵昭賢)

세아는 최측근들과의 회의가 끝난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흑골파가 단 이틀 만에……"

낙양은 너무나 거대한 도시고, 암흑가 또한 그만큼 거대했다.

그 거대한 암흑가 전체에서 흑골파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지만, 인원수와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흑골파가 단 이틀 만에 괴멸 직전까지 몰려가고 있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혹골파의 피해 상황에 대한 첩보가 밀려들고있을 정도였다.

시체도 혈흔도 남지 않는다는 기이한 현장에 대한 정보부터,

흑골파와 사업을 연계하던 이들이 손을 떼고 있다는 정보,

암흑가에 관련된 일이라 관에서 소극적으로 대처 중이라는 정보,

낙양검가는 아직 움직일 기미가 없다는 정보,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얀 가면을 쓴 악귀에 대한 정보까지.

'암천존자(暗天尊者)라고……?’

현월각은 그 이름이 시작된 빈민가까지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 이름을 처음 입에 담았다는 예언가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정보들은 넘쳐 났지만, 정작 핵심적인 정보는 없었고, 핵심 정보를 얻기 위한 실마리들은 모두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현월각의 핵심 인사들은 모두 흑골파의 몰락에 기뻐하는 중이었다.

특히 검가동패의 등장으로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더욱 기뻐했다.

하늘의 도움이라고 하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세아 또한 자신들의 각오가 다른이의 손에서 실현되는 것이 조금 허무하긴 했지만,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복잡한 까닭은, 그녀에게 그 암천존자라는 존재의 정체에 대한 심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생과 십 년 만에 재회하고, 흑골파가 습격을 해 왔던 그날 밤.

그녀는 분명히 하얀 가면을 보았다.

낙양검가의 대공자이자 무검자라는 치욕적인 멸칭으로 불리는 연소현.

그는 지금 세아와 함께 현월각의 안가에 머물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여성 호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씀입니까?”

세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대공자 말이야, 검가의 대공자. 내가 마주칠 때마다 눈여겨보라고 했었잖아.”

“아, 무검자 말입니까?”

특이하게도 그녀는 무검자라는 멸칭을 입에 담으면서도, 경멸의 기색은 보이질 않았다.

“그 명칭 입에 담지 말라니까!”

“죄송.”

단정한 흑의무복(黑衣武服)을 입고, 짧은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 호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소문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느꼈습니다.”

담백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세아가 한숨을 쉬었다.

“……너 어디 가서 현월각에서 일한다고 말하고 다니지 마라.”

호위가 손을 들어 보였다.

“뭐, 아가씨가 사업으로 만나는 젊은 사내 중에서는 제일 당당했습니다. 담대하기도 하고.”

그날 밤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인상을 남겨서 그렇지, 금주를 앞에 두고 보였던 연소현의 모습도 충분히 인상 깊긴 했다.

특히 대화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를 자신의 마음대로 끌고 가는 능력은 대단했다.

순간적으로 그녀 스스로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건 그렇지.”

“거기다가 마음도 상당히 넓은것 같았습니다. 통이 크다고 해야 할까요? 기세로 압박해 보기도 하고, 살기도 보내 봤는데……"

“뭐라고?!”

새파랗게 질린 세아에게 호위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도 별말 안 했습니다. 속이 넓은 건지, 배알도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흠.”

세아가 벌떡 일어나 호위의 멱살을 잡았다.

“이 정신 나간 년아! 도대체 낙양검가의 대공자에게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내공도 없는 세아가 흔들어 봐야, 꿈쩍도 하지 않는 호위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아니, 그 공자는 얼굴부터가 무지하게 무해하게 생겼잖습니까. 애 늙은이처럼 허허, 하고 웃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그래도 그렇지!”

* * *

다음으로 세아가 소환한 것은 연소현을 곁에서 모시도록 명을 받은 하녀들이었다.

“대공자님요?”

한 하녀가 눈을 반짝였다.

“너무 잘생기지 않으셨나요? 미소년 그 자체! 그 훈훈한 미소랑 가끔 보여 주는 우수에 젖은 분위기가 진짜 대박이라니까요.”

“맞아, 맞아! 나도 대공자님이 검가로 돌아가실 때 따라가면 안 될까?”

“이직(移職)이다! 나도 같이 가야지!”

“그 낙양검가에서 너희 따위를 받아 주기나 한대?”

한 하녀는 소중히 품에 안고 왔던 족자(簇子)를 펼쳐 보였다.

극한까지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글자체 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훌륭한 글씨였다.

“자아, 여러분. 이게 바로 대공자님께 받은 글씨입니다!”

다른 하녀도 작은 족자를 펼쳐 보였다.

“나는 이 그림을 받았지!”

“와! 미친! 당장 나한테 팔아!”

“닥치고 내 돈을 가져가!”

꺅꺅거리며 야단법석인 하녀들의 모습에 세아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음, 확실히 잘생기긴 했지.”

“그렇죠?”

자신의 호위도 어느새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세아는 들고 있던 담뱃대로 자신의 책상을 내리쳤다.

“제대로 된 정보를 달라고!”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반적인 하녀들과 다르게, 현월각의 하녀들은 모두가 정보 요원으로서 교육과 훈련을 마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사람 좋고 잘생긴 공자님이라는 것 빼고는 의심스러운 구석 같은 건 없었어요.”

“주로 관찰하라고 하셨던 밤에도 방문 밖으로 나오시는 일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학식도 풍부하고, 운치가 무엇인지도 아신다는 것을 빼먹으면 안 되지!”

“맞아! 어제저녁에 피리 연주하시는 거 들었어?”

“당연하지. 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 좍좍 뽑았다니까.”

“아, 나는 못 들었는데.”

어느샌가 다시 꺅꺅거리기 시작한 하녀들의 모습에 세아가 소리를 질렀다.

“당장 다 나가!”

세아는 투덜거리며, 호위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녀가 하녀들과 함께 자리를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또 왜 자연스럽게 끼어서 나가고 난리야?!”

“아, 저도 피리 연주 듣고 싶다니까요.”

* * *

“주인님 말인가요?”

정아가 되묻자, 세아가 부엌의 문틀에 기대서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음. 별건 아니고, 그저 내 동생이 섬기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어서 말이야.”

정아는 국거리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질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별로 할 말이 없는데요.”

어째서인지 동생의 표정이 다 알고 있다는 느낌이라, 세아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사적인 관심이 아니라…….”

정아가 쿡쿡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래……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정아는 더 입을 열지 않고, 요리에 최선을 다했다.

“아니, 저번에는 내가 몇 마디를 했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대공자에 대해서 항변하더니……"

정아는 쿡쿡, 하고 다시금 웃을 뿐이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동생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세아가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

“네. 덕분에.”

“그래. 다행이네.”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턱에서 돌아섰다.

그녀의 뒤에서 정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직접 만나 뵙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세아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는 궁금한 게 없니?”

“글쎄요……

정아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 *

세아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발걸음에 한숨을 쉬었다.

'내 이런 꼴, 누가 보면 절대 믿지 못하겠지.'

그녀는 손에 든 최고급 찻잎이 든 옥함(玉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에서 흐른 땀 때문에 옥함이 반짝거렸다.

이쪽 바닥에서는 철혈(鐵血)의 마녀, 피도 눈물도 없는 독안녀(獨眼女) 따위로 불리는 자신이, 지금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도 무서운 건 무섭다고……'

사실, 지금도 그날 밤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마치 차디찬 삭풍(朔風)이 굴복하고, 어둠조차 경배하는 것 같던 광경.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옥죄는 것 같았던 불길한 이야기들.

그리고 형용할 표현을 찾기도 힘든 그 하얀 가면.

[나의 길은 인외마경(人外魔境)의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진 명부마도(冥府魔道).]

그의 목소리가, 그 금속음으로 가득했던 끔찍한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했다.

[부디 그 위에서 만나게 되지 않기를…….]

그 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뭘 그리 뜸을 들이십니까.”

호위는 세아를 두고 성큼성큼 걸어 연소현이 머무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현월각주입니다.”

호위의 행동에 말문이 막혀, 컥컥거리고 있을 때, 안으로부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 목소리는 자신의 기억 속 하얀 가면과는 다르게, 부드러워, 조금 안심이 되었다.

* * *

연소현은 세아가 가져온 찻잎으로 직접 찻물을 우려내며, 호위에게 말했다.

“오늘은 살기 홀리지 마라. 차(茶) 맛이 변한다.”

호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 임무는 끝났습니다.”

그녀의 말에 연소현이 눈을 들어 세아를 바라봤다.

“임무였다고?”

세아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일을 당한 사람의 눈빛을 자신의 호위에게 보냈다.

“아가씨,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십니까?”

그러든 말든 연소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 우러난 차를 그녀들에게 내밀었다.

“자, 지금 마시는 것이 좋다.”

세아가 급히 일어나 잔을 받아 들며 말했다.

“가, 감사하옵니다. 그런데 호위에게까지 주실 필요는…….”

“잘 마시겠습니다, 대공자님.”

이미 그녀의 호위는 찻잔을 받아든 후였다.

“훌륭한 향입니다. 역시 차에도 조예가 깊으신 모양입니다.”

“과찬이군."

“아닙니다. 저는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여자입니다.”

“하하, 역시 자넨 재밌어. 이직할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내게 말하게나.”

“직장을 잃으면, 찾아뵙겠습니다. 지금 직속상관의 분위기를 봐선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핫!”

그나마 동석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자신의 호위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극심한 편이었다.

그녀는 세아가 사업을 위해 만나는 이들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저리도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대공자도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세아의 머릿속에는 그 날 보았던 연소현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바쁘신 분이 나 같은 한량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나?”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자, 세아의 호위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 떨어져 창가의 옆에 섰다.

“대공자님……"

"음."

연소현은 찻잔에서 올라오는 향을 즐기며, 그녀를 바라봤다.

부러울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마치 여자아이처럼 선이 얇은 얼굴에 긴 속눈썹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보았던 하얀 가면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한 표정과 붓칠이 그대로 느껴졌던 하얗고 거친 표면, 눈구멍이 없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던 그 느낌까지.

세아는 입술이 바짝 말라 오는 것을 느끼면서 질문을 꺼내 들었다.

"대공자께서 그 암천존자(暗天尊者) 이시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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