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전조(前兆)
지금은 금주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으며, 일과 중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목욕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화강암 욕조 속에 몸을 깊이 담그고 있었다.
검가동패를 얻은 역사적인 날이었기에,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목욕 시간이 더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던 현월각에도 한 방 먹여 줬으니, 더욱 행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마음 한쪽에서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무검자 놈……'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
오늘 그를 만난 것은 그녀로서는 전혀 예측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덕분에 현월각주에게 단단히 경고하려던 계획도 반밖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리 마음에 걸릴 것도 없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계획이란 것은 수립하는 그 순간부터 엇나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침에 받았던 낙양검가의 정보에서는 대공자의 외출 계획이 전혀 없었던 탓이었다.
물론 대공자라는 신분을 가진 연소현의 정보를 그녀에게 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검가동패와 함께 정보를 넘겨준 이는, 금주가 오늘 현월각을 찾아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유도한 바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자신에게 대공자의 외출 정보를 주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그녀는 손톱을 깨물었다.
혹시, 이공자 측도 대공자의 외출 계획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든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아무도 대공자의 계획을 몰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의 옆에서 대기하던 염소수염의 총관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그녀가 만났던, 그 대공자는 자신이 이제까지 익히 소문으로 들었던 무검자와 너무도 달랐다.
-뭐 해? 그거 좀 줘 봐.
그녀는 태연하게 자신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검가동패를 달라고하던 그 모습을 떠올렸다.
'그놈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당당했어.'
아무리 자신을 호위하는 고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장한 이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토록 태연할 수 있는 것일까.
뭔가 대공자에게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아니야.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지.'
점점 상상의 크기를 키워 나가던 금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태연한 태도는 필시 그가 검가의 대공자이기 때문일 터였다.
낙양 바닥에서 자신을 건드릴 사람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무슨 겁을 먹겠는가.
거기다가 소문이란 원래 과장되기 마련이라, 무검자에 대한 소문도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갔음을 참작하는 것이 옳았다.
'게다가 내가 앞에서 그렇게 모욕을 퍼붓는 데도 결국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했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된 그녀의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총관, 물이 식었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총관의 얼굴이 굳었다.
욕조의 주변에서 금주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대기하던 하녀들도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총관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밖을 향해 외쳤다.
“아가씨께서 물이 식었다고 하신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금주의 직속 조직원들이 온몸이 결박당한 소녀들을 메고 들어왔다.
모두가 열두셋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녀들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그 눈망울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읍읍!"
조직원들은 소녀들의 상반신이 욕조에 걸치게끔 일자로 내려놓았다.
소녀들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저항하려 했지만, 조직원들에 의해 뒤에서 거칠게 잡아 눌러졌다.
“흐음, 신선도가 좀 떨어지는 거 같은데……?"
금주가 소녀들을 살피며 하는 말에 총관이 떨떠름함을 감추며 대답했다.
“……좀 더 제대로 선별하도록 지도하겠습니다.”
금주의 손이 번뜩이자, 소녀들의 목이 일제히 갈라졌다.
수하들은 소녀들의 잘려 나간 머리가 욕조에 빠지지 않도록 머리채를 잡고 물러섰다.
“후우, 요즘엔 부쩍 주름이 늘어서 걱정이란 말이지……
새 피가 쏟아지며, 다시 데워지는 욕조 속에서 금주가 자신의 피부를 만지며 투덜거렸다.
'정신 나간 년…….'
염소수염은 속으로 금주를 욕했다.
자신도 뒷골목에서 이날 이때까지 온갖 더러운 꼬락서니를 다 보고 살아왔지만, 자신의 두목 이상의 악질은 본 적도 없었다.
금주라는 이 여자는 두말할 것 없이 악녀(惡女) 중의 악녀였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금주 아가씨의 피붓결은 비단보다도 곱습니다요.”
물론 입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금주가 악녀든, 마녀(魔女)든, 그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거기다가 애초에 그부터도 그녀를 욕하기 미안할 정도의 짓거리를 일삼아 오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었다면, 그가 어찌 이 뭣 같은 세상에서 이 정도로 잘 먹고 잘살 수 있었겠는가.
그저 나이를 먹다 보니, 요즘 들어 부쩍 감상적이 되어 가는 것뿐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조직원 하나가 구르듯이 튀어 들어왔다.
“급보(急報) 입니다!”
총관의 안색이 굳었다.
“뭐냐?”
“고기 공장 하나가 습격당했습니다! 완전히 박살 났답니다!”
“뭐라고?!”
금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납품업자들이 다 죽어 가는 애들 몇 명을 발견했답니다.”
“누구 짓이래?!”
금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조직원이 목을 움츠리고 대답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데다가 금방 숨이 끊어져서…….”
총관이 그를 다그쳤다.
“그래도 뭐라도 한 말이 있지 않겠나?!”
조직원이 우물거리며 답했다.
“무슨 악령(惡靈)을 봤다든가, 악귀(惡鬼)가 그랬다든가, 괴물이라고 하거나…….”
총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악령? 악귀? 괴물?”
“예, 예. 그 뭐지 하얀 가면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만.”
횡설수설하는 말에 금주가 되물었다.
“하얀 가면?”
“예, 그런데 금방 다들 죽어 버려서 제대로 된 이야기는……"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잠시 서서 생각을 가다듬던 그녀는 다시 욕조에 몸을 담갔다.
아직 심각하게 생각할 단계는 아니었다.
“무슨 고수랑 시비라도 붙은 모양이겠지.”
총관이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낭인(浪人) 고수를 잘못 건드렸다가 지부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던 적이 있었지요.”
애초에 기를 다룰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는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혀 무림인이 되는 이들은 더욱 드물다.
또 그 무림인 중에서 벽을 넘어 고수가 되는 이들은 더욱더 소수에 불과했다.
“……이 바닥에서 장사하면서 느 끼는 거지만, 그렇게 드물게 존재하는 고수를 너무 자주 만난다니까.”
“예, 맞습니다요.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습죠.”
금주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욕조에 기댔다.
“애들한테 당분간 시끄러운 일 만들지 말라고 전해. 닥치고 엎드려 있으면, 그놈도 여기저기 화풀이 좀 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제 갈길을 갈 테니.”
“날이 밝으면, 추가로 조사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하가 문을 닫고 나가자, 금주가 신경질을 냈다.
“또 어떤 할 일 없는 새끼가 또 지X 하는 건지. 하여튼 협사(俠士)니 뭐니 해서, 어릴 때부터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어서 애들을 키우면 안 된다니까.”
그녀의 기분이 급속히 나빠지는것을 느낀 총관이 다급하게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하녀들은 술과 술잔을 대령하고, 향을 피우며, 부산을 떨었다.
“돈도 안 되는 일에 발끈해서 달려들다니. 인생 좀 둥글게 둥글게, 세상사에 적응해서 살 줄도 알아야지.”
“예, 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총관은 열심히 그녀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금주의 호위가 중얼거렸다.
“악귀라고……?"
그 소리를 들은 금주가 호위에게 물었다.
“뭐야? 들은 거라도 있어?”
“아, 그게……"
말꼬리를 흐리는 호위가 못마땅한지 금주는 인상을 썼다.
“너까지 왜 뜸을 들이고 지랄이야?!”
그러자 호위가 얼른 총관에게 말했다.
“총관, 며칠 전에 도박장 쪽 일을 맡겼던 외주 애들이 실종되지 않았습니까?”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증발해 버렸었지요. 그런데 외주 주는 놈들이 워낙 그렇게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호위가 계속 뜸을 들이자, 답답해진 금주가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아, 아뇨. 그게, 제가 그 도박장의 나름 단골인데. 도박장에서 들었던 소문이 생각이 나서……"
“소문?”
“예 예. 소문에 따르면 그날 귀신을 본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악귀라고 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호위가 턱을 긁었다.
“사실, 저도 그런 건 안 믿습니다만, 봤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마냥 무시하기도 그렇고……"
금주가 벌컥 역정을 냈다.
“그게 지금 이야기랑 무슨 상관이야? 다 죽어 가는 놈들이 헛소리하니까, 지금 너까지 그딴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답게 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생산적인 이야기를!”
머쓱해진 호위는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설마……'
하지만 그렇게 역정을 낸 금주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싹트고 있었다.
’……혹시 스승님 같은 존재가 또 있는 건 아니겠지?’
자신의 스승을 떠올린 금주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연원(淵源)의 무공을 가르쳤던 그 기괴한 노인은 진정 불가해(不可解)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크, 큰일입니다!”
그때 좀 전에 나갔던 수하가 문을 열고 뛰쳐 들어왔다.
“또 뭐얏?!”
“또 하나의 지부가 박살이 났다고 합니다!”
금주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또 같은 놈이야?”
“예에, 그 하얀 가면이라고 합니다.”
금주가 이마를 짚었다.
“후우…….”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놈의 성질이 풀리기 전까지 몇 군데 더 밀리는 건 예상했던 거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금주가 손을 내저어 수하를 내보냈다.
“업장마다 무림인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털리는 속도를 보면, 그 하얀 가면인지 하는 놈은 고수가 분명하겠지.”
“그렇습니다.”
총관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냥 두는 게 이득이야. 애들이야 좀 죽어도 금방 보충이 되잖아?”
날이 갈수록 호화로워지는 낙양거리의 이면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빈민층이 있었다.
거기서 자라는 아이들의 절대다수는 뒷골목에서 빌어먹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언제나 암흑가에 몸담게 되어 있었다.
“……낭인 고수나 흑도의 고수를 고용하는 것은 비싸니까 말입니다.”
"그렇지.”
자신이 말을 하고서도, 염소수염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이 바닥의 생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때로는 이곳이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했다.
생각을 정리한 금주가 손을 저으며 그들을 내쫓았다.
“이제 됐으니까, 다들 저리 꺼져. 그리고 안마사를 준비시켜. 안마라도 좀 받아야겠다.”
“예, 그러면…….”
총관이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큰일입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설마, 또……?"
상황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