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운명(運命)
연소현의 이야기를 듣는 세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과거와 미래가 혼재(混在)된, 그의 이야기는 그녀에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너는 네가 하려는 그 옳은 일에 수많은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해내고야 말 생각이더냐?”
세아는 희생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과 그 뜻을 함께하는 이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하는 일들로 인해서, 상관도 없던, 죄 없는 이들까지도 죽게 되더라도?”
“그럴 리가 없잖사옵니까!”
그 대답에 소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읏?!”
세아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새하얗고 삐뚤거리는 어설프지만 동시에 섬뜩하기 짝이 없는 하얀 가면이 가득 찼다.
가면을 쓴 연소현이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서였겠지. 그렇게 선한 마음을 깊은 곳에 간직한 이들은 홀로 스러져 버렸던 게지.”
그가 손을 들자, 차디찬 겨울바람이 그 손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에 역사라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바꾸려면, 그만큼의 피가 흘러야 하건만.”
그가 손을 휘젓자, 어째서인지 바람이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그 얼어붙는 듯한 바람에 세아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선한 이들은 강의 흐름을 뒤틀 정도로 그 엄청난 수의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볼수 없는 게지.”
그는 그 차가운 바람을 쥐려 했지만, 바람은 흩어져 흐를 뿐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이 오명으로 남고, 더럽혀져도, 스스로만을 희생했던 게지.”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휘저은 그가 손을 내렸다.
“그 결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었음에도 말이지.”
가면을 쓴 그의 얼굴이 옆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헛된 희생이었을까? 그것이 결국 자매의 불가피한 운명이었던 것일까.”
세아는 연소현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저는 무슨 이야기인지……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연소현의 모습은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꿈을 꾸었지만, 그것이 삿된 꿈임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음울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삼아 살아왔다.”
세아는 급히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
소현은 어느새 담 위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연소현이 부린 조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낙양검가의 무검자가 무공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무공 이상의 짙은 그림자를 느꼈다.
“하지만 타고난 신분이 있었기에 안빈낙도는 불가능했지.”
그와 세아의 거리는 멀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평온을 추구했다.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또 버리면, 그물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 목소리에는 고막을 긁는 것 같은 금속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실패했다.”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펼쳐 보였다.
“나는 내가 타고 태어난 운명(運命)을 바꾸는 것에 결국 실패했다. 결국에 나를 지배하는 별의 아래에 무릎 꿇었다.”
그 동작은 연극에 출연한 배우의 그것처럼, 과장되었으나, 우스꽝스럽지 않았고, 깊은 감정의 흔들림을 끌어냈다.
“……그러나 너희 자매의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대공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목소리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짙은 금속성으로만 이루어진 것같은 그 목소리는 거칠고, 잔혹하며, 어딘가 슬픈 울림으로 가득했다.
“나는 너희 자매의 운명을 주시하겠다.”
그 가면에는 눈구멍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세아는 누군가의 눈을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선명한 시선을 느꼈다.
“과연 너희의 운명이 나와 교차하게 될지, 혹은 겹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하얀 가면을 쓰고, 서생들의 백의를 입은 그의 신형이 어둠 속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나의 길은 인외마경(人外魔境)의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진 명부마도(冥府魔道).”
짙은 어둠 속으로, 칼날 같은 겨울바람의 속으로, 녹아들듯, 흩어지듯,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부디 그 위에서 만나게 되지 않기를……"
그가 남긴 말은 우려를 담은 기도였을까, 아니면 운명에 대한 조소였을까.
세아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대공자가 사라진 담 위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담 위의 기와들을 아름답게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은은하고 포근한 달빛 아래, 대공자의 모습은 없었다.
* * *
혹골파라는 조직이 뒷골목을 주무대로 하는 이상, 급속한 인원 손실은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골파는 낙양 전체를 통틀어 가장 쉽게 새로운 조직원을 충원하는 조직이었다.
낙양은 수백만의 인구가 살아가는 거대하고 호화로운 상업 도시였고, 그 화려함을 지탱하는 것은 그보다도 거대한 어둠이었으니까.
관청에서도 감히 수를 파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이, 빈민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살아남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입하라.'
흑골파는 뭔가 특기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종류의 조직이 아니다.
사실 하나 이상 모자라는 것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쪽이 더 좋았다.
인정이라든가, 상식이라든가, 자비라든가, 그런 것들이 모자라는 쪽이 훨씬 채용에 유리했다.
그리고 그런 '모자란 이들'은 빈민가에 썩어 넘쳤다.
나머지는 상관없었다.
일단 들어와서 형제자매들과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훌륭한 흑골파의 조직원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그들의 머릿수는 순조롭게 증가 중이다.
* * *
낙양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빈민가의 풍경 속에, 어느 흑골파 지부가 있었다.
자신들은 지부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잘 쳐줘도 소굴에 불과한 곳이었다.
“하암……"
그 소굴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덩치도 앞서의 과정을 통해 훌륭한 조직원이 된 사례였다.
그의 아비는 표국에서 일하다 산적에게 목숨을 잃었다(적어도 그는 그렇게 들었다).
어미가 살아남으려 최선을 다하는 동안, 그 또한 홀로 최선을 다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왔다.
그 성장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뒤집을 수 없는 법칙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흑골파에 합류했다.
그는 새로 생긴 형제들과 함께, 이제까지 쌓인 그 울분과 한을 풀어내는 것에 심취했다.
몸에 새겨 넣는 해골 문신이 하나둘 늘어 갔다.
그는 이 길이 자신의 적성에 놀랍도록 적합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드디어 몇 건만 더 올리면, 승진이다. 흐흐, 그러면 밑에 생길 꼬붕들을 데리고 옆집의 그년부터 손에 넣고...'
심지어 이런 건설적인 미래 계획도 생겼다.
앞으로 늘어날 수하들을 이끌고 거리를 싸다닐 생각만 하면,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렇게 되면 동네에서 자신을 무시할 놈들도 없어질 것이다.
사실은 좀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그쪽이 더 끌렸다.
항상 자신을 더러운 것처럼 보던 옆집의 그년도, 그래서 더 눌러 주고 싶은 것 아니던가.
"여기가 흑골파 지부 맞느냐?”
옆집의 그년과 있을 일들을 상상하니, 사타구니가 묵직해져 오던 중이었다.
그는 대충 손을 내저었다.
“꺼져.”
하지만 상대는 끈질겼다.
“여기가 흑골파 지부 맞냐니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꼬맹아. 너처럼 작고 비쩍 마른 새끼는 안 뽑아 주니까, 좋은 말 할 때 꺼져라.”
“굳이 뽑아 달라는 건 아닌데?”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평소라면 저딴 '기분 나쁜 가면'을 쓰고 있는 놈은 마주치자마자, 두들겨 패 주었을 테지만, 지금 그는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좋다. 이 형님이 특별히 네 면접을 봐 주도록 하마.”
그는 관절마다 굳은살이 듬뿍 박인 주먹을 들어 보였다.
“두 대만 버텨 봐라. 그럼 내가 특별히 추천해서 뽑힐 수 있게 해주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가면 아래에서 그를 노골적으로 비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입하러 온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답답한 종자로다.”
“X발 새끼가, 그럼 뭔데?!”
얼굴의 반절을 가리는 가면의 아래로, 소년의 입이 찢어져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어? 어……?!”
덩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만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도 '문지기'라서 친절하게 알려 주는 건데……,”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온 그것이 발돋움하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의 입김은, 살을 엘 듯한 한기였다.
“나는 너희를 모두 먹어 치우러 왔다.”
“...?!”
그것이 덩치를 슬쩍 밀자,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를 날려 버렸다.
그는 자신이 지키던 출입구를 가볍게 날아서 통과해, 더럽기 짝이 없는 좁은 복도에서 두세 번 튕긴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으으어, 어……
충격에 숨도 쉴 수 없었다.
고통이 그의 뇌리를 치달았다.
그가 등을 바닥에 비비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동안 그것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것은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티 없이 맑은 미소였지만, 그 입안에는 송곳이나 바늘 같은 이빨들이 빽빽했다.
그는 그 미소에서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공포를 느꼈다.
“자 자, 이제 노래를 불러 보아라.”
“으으윽!”
이 상황에 무슨 노래를 부르란 말인가?
곧 그는 자신의 신체를 통해 그것의 말을 너무나 확실하게 이해할 기회를 맞이했다.
“노래를 부를 때 중요한 것을 꼽자면, 첫 번째는 역시 호홉이지.”
그것의 손이 살금살금 그의 복부로 다가왔다.
“그리고 호흡은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그 모습은 마치 극을 공연하는 이들처럼 익살맞은 구석이 있었다.
“자, 숨을 깊게 들이쉬고一.”
그의 복부 정중앙에 도착한 손은 가차 없이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끄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배 속을 파고든 손은 지독하게도 차가웠다.
그리고 이어서 무언가 지독하게 뜨거운 기운이 그의 내장을 녹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단계는 완전히 터득했군!”
제암진천경의 마기에 의해서 내장이 다 녹아내린 덩치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쉽게도 두 번째 단계는 배울 기회가 없었구나.”
키득키득, 가면이 흔들리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완성되지 못했던 가면이, 광기(狂氣)와 한(恨)을 만나 귀물로 완전해진 결과물이었다.
“무, 뭐냐?!”
“어떤 새끼야?!”
덩치의 단말마(斷末魔)에 놀란 흑골파 조직원들이 놀라서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그 비명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자다가 맨발로 뛰어나온 이들의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나름 빠르게 뛰쳐나온 것과 별개로, 다들 복도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 어어?!”
다들 말을 잃었다.
죽어 나자빠진 동료의 복부는 뻥 뚫려 있었고, 녹아내린 내장과 부글부글 끓는 혈액이 기울어진 복도를 따라 진득하게 흘렀다.
그리고 악몽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과 같은 그것은 시뻘건 피가 범벅된 손을 흔들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들 하신가. 좋은 밤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