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편 고사(古事)
문지기는 매우 화가 났었다.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것들이 검가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을 해도,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에 이가 갈렸다.
그다음엔 대공자에게 분노했다.
그가 만약 대공자란 지위에 어울리는 권력이 있었다면, 현장에서 검가동패 정도는 쉽게 회수했을 것이고, 검가를 모욕한 죄를 물어 그것들을 모두 토막 쳐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결국 그가 연소현을 향해 입을 열었을 때 나온 것은 원망이 나 분노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결국, 자신도 보신(保身)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감당할수 없는 일을 벌이지 않은 것뿐이 었다.
“죄송할 것이 뭐가 있느냐? 너는 역할을 다했다.”
연소현에게 처음으로 듣는 격려의 말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너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검가동패를 금주에게 쥐여준 이가 너까지 나와 한 묶음으로 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는 대공자님의 호위를……!"
연소현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검을 바치지 않는 대상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 없다.”
“그건……
그는 몇 번이나 무언가 항변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죄송합니다.”
연소현은 미리 작성해 둔 명령서를 그에게 건넸다.
“이거나 받아.”
가주의 직인이 찍힌 그 명령서는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연소현의 명에 따라서 일시적인 호위 임무를 행했음을, 그리고 현시점으로 복귀 명령을 받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명령서를 들고 돌아선 그의 발걸음이 몇 번이나 멈췄지만, 결국 그는 돌아서지 못했다.
'제기랄……".'경지에 이르고 나서도, 많은 무력함을 느껴 왔지만, 오늘만큼 기분이 나빴던 것은 처음이었다.
'제기랄.'
석양이 만든 긴 자신의 그림자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 * *
“흐음.”
연소현이 정아의 진맥을 마치기를 한참 동안 기다리던 세아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불렀던 유명한 의원(醫員)들이 다녀갔고, 그들이 정아가 단지 많이 피로한 것뿐임을 장담해 주었었다.
그저 깊이 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연소현이라는 이가 가진 의술이 일가(一家)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안가(安家)의 보완은 완벽합니다. 그리고 명하신 대로 평소의 두배 이상으로 경계를 늘렸습니다.”
수하의 보고에도 그녀는 담뱃대를 신경질적으로 씹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밖을 서성이며,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결국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대공자님, 소녀, 들어가겠사옵니다.”
그녀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그녀가 나오기 직전과 거의 똑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대공자는 그런 여동생의 손목을 잡고 진맥중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연소현에게 물었다.
“……정아는 괜찮은 것이옵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연소현이 그녀를 돌아봤다.
“괜찮냐니? 자고 있을 뿐이라는걸 들었었잖느냐?”
연소현의 말투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태연했다.
“그……!"
담뱃대를 쥔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가, 겨우 참았다.
“……크흠. 그럼 왜 이리 진맥이 오래 걸리시는 것이옵니까?”
연소현은 그런 그녀의 물음을 무시하고 손을 내밀었다.
“흑골파의 정보는 가져왔겠지?”
이번에는 담뱃대를 거의 꺾어 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 인(忍)' 자를 거듭 되새기며, 연소현에게 한뭉치의 서류를 들어 보였다.
“그 전에 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부터 말씀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게 전부 맞겠지?”
“……전부입니다.”
끝으로 갈수록 이를 악물었기에 발음이 뭉개졌다.
그러자 연소현이 턱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흠. 사실 진맥을 해 보니 정아는 큰 중병(重病)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네.”
그가 혀를 찼다.
“하지만 그대의 태도를 보니......."
세아는 단숨에 그에게 서류 뭉치를 던지듯 넘겼다.
“무, 무슨 병입니까?!”
연소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받아 든 서류 뭉치를 풀어서 읽기 시작했다.
서류를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홅어만 보는 것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흐음.”
이윽고 모든 서류를 넘겨본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아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오는 것을 참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정아는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것이옵니까?”
그러자 연소현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피로해서 자는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결국에 그녀의 손아귀에서 담뱃대가 부러져 나갔다.
“……중병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연소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과로(過勞)는 중한 병이야. 젊은 사람이라도 부지불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제어하기가 힘든 진귀한 경험을 하는 세아였다.
“그럼 정아는 별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이마를 감싸 쥐며 세아가 물었다.
“……흑골파에 대한 정보는 왜 달라고 하셨습니까?”
어느새 극존대를 버린 세아였지만, 연소현은 언제나 그랬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정보를 모아 둔 정도와 흐름을 보니, 혹골파에 대해서 상당히 위험한 짓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
머리에 열이 올라 있었던 세아는 자연스럽게 부정할 기회를 놓쳤다.
한 박자가 늦어 버린 이상, 그녀가 이제 와 부정해 봐야 별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쉰 후에 입을 열었다.
“그게 대공자님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연소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둬.”
세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는 대공자님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수하가 아닙니다만.”
연소현은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다.
“그 검가동패는 진품이었다. 금주가 가진 연줄은 진짜야. 검가의 정보부서가 가진 힘은, 같은 업계에 있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물론이었다.
적어도 이 낙양 땅에서 검가의 정보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렇기에, 세아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당신이……!"
연소현이 벌떡 일어나 터져 나오는 세아의 고함을 막았다.
“환자가 쉴 수 있도록, 나가자고.”
연소현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 * *
어느새 하늘엔 어둠이 드리웠다.
구름 낀 밤하늘에는 달조차 얼굴을 감추었고, 겨울바람이 지붕의 기와를 스쳐 지나며 울었다.
연소현은 뒷짐을 진 채,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아는 그런 그의 뒷모습에 외쳤다.
“낙양에서, 아니,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상가(商家)는 어딥니까? 검가이지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무가(武家)는 어딥니까? 검가이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당연히도 이 낙양 바닥의 정보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검가이지요!”
그녀는 이 순간 중립적인 정보상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런 검가가 흑골파 같은 흑도조직에 검가동패까지 준 것 아닙니까?!”
그녀의 하나 남은 눈이 불을 뿜는 듯했다.
“낙양의 온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굶주림에 죽어 가는 동안! 검가는 무엇을 했습니까?!”
연소현의 뒷모습은 답이 없었다.
“흑골파와 같은 도리(道理)라고는 없는 그 잔악무도한 무리가 낙양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또 그와 같은 조직들이 셀 수 없이 늘어나는 동안……!”
“본가(本家)는 뒷짐을 지고 있었지.”
연소현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니, 오히려 본가는 그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미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연소현의 태도에 세아는 더욱 분노했다.
“그럼, 그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녀가 손에 아직도 쥐고 있었던 부러진 담뱃대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솔직히 나는 금주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이, 그 표현이 천박했을뿐,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순간 세아는 자신의 말이 과해지 고 있다고 느꼈다.
“과거의 당신이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으로 이제까지 무얼 했습니까?”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렸던 칩거 명령을 핑계 삼아, 지금도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을 뿐이 아닙니까?!”
연소현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세아는 그 표정이 너무도 거슬렸다.
“당연히 이유야 있겠지. 욕을 먹으면서도,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틀어박혀 있는 이유가 있겠지!”
마치 혼자 모든 짐을 지겠다는것 같은 태도.
“하지만! 당신은 결국 제대로 한 것이 없어!”
그녀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런 주제에 목숨을 걸고 뭐라도 해 보려는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마!”
그녀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지만, 곧 삭풍(朔風)에 묻혀 사라졌다.
"......."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던 세아는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의 담담한 눈길은, 그녀의 매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 순간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더 이상 금주를 건드리지 마라.'
연소현이 그녀에게 했던 조언이었다.
그것도 정확한 조언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검가동패를 금주가 손에 쥔 이상, 흑골파를 자신이 무력화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오히려 어떻게든 현월각이 남겼던 흔적들을 없애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 위대한 낙양검가의 힘없는 대공자에게 마음껏 퍼붓는 것으로 기분을 풀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 대공자가 어찌 속이 그리 넓은지, 자신이 무례를 범해도 넘어가 줄 것까지도,
어쩌면 자신은 은연중에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 아니. 죄송하옵니다. 대공자님.”
그녀는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사죄를 했다.
그 모습은 낙양의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현월각을 세운 철혈(鐵血)의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귀엽다고 표현해도 좋을 그녀의 행동에 연소현은 쿡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에 세아는 더욱 얼굴을 들질 못했다.
“옛날에 우애가 좋았던 자매가 있었다.”
뜬금없는 옛날이야기에 세아는 고개를 들고 연소현을 바라봤다.
“언니는 정의감에 넘쳤어. 자신이 사는 동네를 망치던 원흉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지.”
세아는 그것이 자신과 정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언니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들었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모두 죽임을 당했지.”
그것은 불길한 예언인가.
세아는 연소현의 의도를 이해할수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능 넘치던 동생은 그런 언니의 죽음을 알게 되고, 광인이 되었어. 그녀는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이들을 공격했다. 피해를 누적시켜 나가긴 했지만, 적들은 너무 강했어. 결국에 동생 또한 공적이 되어 살해당했다. 사냥당했지.”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미래의 이야기였다.
비어 있던 조각들을 끼워 맞춘끝에 완성된 그림을, 연소현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름도, 그 숭고했던 뜻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어. 마음대로 꾸며진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반역도이며, 무림공적에 불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자매들을 욕했고, 저주했다.”
이야기를 마친 연소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아둔한 탓에 대공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세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한 이들은 너무도 허무하게 스러진다는 이야기다.”
연소현의 어조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리고 악한 이들이 너무도 당연한 듯이 승리하곤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빠득-.
연소현에게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거칠게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