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멸시(蔑視)
“그거 내가 좀 봐도 될까?”
박살 난 창문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헛차.”
연소현과 문지기는 창틀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와중에 연소현이 자신의 몸에 묻은 나뭇조각 따위를 탈탈 털었다.
“공자님, 도와 드리겠습니다.”
“어, 고맙다.”
어느새 다가온 정아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연소현을 도왔다.
정아의 손길로 옷매무새까지 완전히 다듬은 연소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해? 그거 좀 줘 봐.”
흑골파의 인원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황당함이 분노로 바뀌었다.
"네놈은 누구냐?!”
금주의 뒤에 서 있던 무림인 하나가 일갈했다.
내공이 담긴 고함이 실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이고, 귀야.”
연소현은 익살스러운 태도로 귀를 후비고는 말을 이었다.
“이 옷 보면 모르겠냐?”
연소현이 문지기의 복장을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문지기에게 쏠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문지기는 태연하게 서서 그 시선들을 마주했다.
“……검가의 경비대원?”
“으음..”
다들 표정이 미묘했다.
검가라면 이 낙양 땅에서 누구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지만, 경비대원이라니.
평범한 백성들 사이에서라면 몰라도, 그들은 낙양의 악명 높은 무법자들이 아니던가.
연소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조심해. 이 친구가 옷을 이렇게 입고 있어서 그렇지, 엄청난 고수라니까.”
모두의 미묘한 시선이 경비대원을 향했다.
고수는커녕, 평범한 무림인으로도 보이지 않는 기도를 가진 중년인의 모습에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그러자 너 나 할 것 없이 흑골파의 모두가 왁자지껄 웃음보를 터트렸다.
“고수래, 고수.”
“저놈이 고수면, 나는 천하제일인이다!”
금주는 함께 웃음을 터트리지는 않았지만, 역시 의심쩍은 눈초리로 연소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
별것 없어 보이긴 하는데, 상대가 워낙 당당하게 나오니, 당장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었다.
“……쩝.”
입맛을 다신 연소현이 문지기에게 명했다.
“안 되겠다. 좀 가져와.”
“……존명.”
문지기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모두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그들의 눈가에 살기가 어렸다.
그리고 두 발 앞으로 나섰을 때, 금주의 주변에 있던 세 명의 무림인들은 일제히 출수(岀手)를 준비했다.
다음 세 발자국을 걸었을 때, 금주의 손에 들려 있던 검가동패는 문지기의 손에 들려 있었다.
".....?"
가장 놀란 것은 그것을 직접 들고 있었던 금주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휘날린 느낌이 들었을 뿐인데, 어느새 자신이 쥐고 있던 검가동패가 상대의 손에 넘어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고수(高手)……!’
묵직하고 싸늘한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흐음.”
좌중이야 놀라든 말든, 연소현은 손에 든 검가동패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정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진품(眞品)이 맞습니까?”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진짜.”
검가동패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음울한 기색이 어렸다.
“과거, 검가동패는 원래 검가에 은혜를 베푼 은인께, 받은 은혜를 언제 어디서든 갚겠다는 맹세의 증표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동패를 지닌 은인이 위기에 처하면, 검가의 사람들은 그곳이 어디라도 달려갔다.”
그의 손에 들린 검가동패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그들은 은인과 함께 검을 들었으며, 죽음도 불사했지.”
“무한한 신뢰의 상징이었군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세아의 목소리였다.
이미 정아의 행동에서 연소현의 정체를 알아챈 그녀는 그의 앞에서 감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세아에게 잠시 시선을 보낸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지금에 와서는 그저 사업 상대에게 맡기는 한낱 신물(信物)에 지나지 않게 되었지만.”
그는 금주를 향해 검가동패를 가볍게 던져 주었다.
탁, 하고 허공에서 검가동패를 잡아챈 금주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연소현에게 말했다.
“말씀대로 한낱 신물이지만, 검가의 눈먼 칼날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증표이기도 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다분히 연소현의 뒤에 서 있는 '검가의 고수'를 의식한 그녀의 말이었다.
“그건 그렇지.”
연소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가동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면, 이제까지 검가가 쌓아 올린 신용이 무너질 테니까.”
금주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검가 내에서 권력이 있다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겠지만, 그러긴 힘들겠지요?”
연소현이 동의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금주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당신이 그 이름 높은 무검자(無劍者)로군요.”
'무검자'라는 멸칭을 입에 담는 금주의 입가엔 짙은 비웃음이 걸렸다.
“맞아, 내가 연소현이다.”
연소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웃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녀는 너무 웃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면서 입을 열었다.
“아, 개 쫄았네. 맵시 다 구겨지게.”
그녀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그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명백한 멸시가 담겨 있었다.
“신선놀음이나 하며 도낏자루를 썩히고 산다는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신지요?”
그녀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에 정아의 고운 아미가 꿈틀거렸다.
“별것 아냐. 내 시녀가 여기 각주에게 볼일이 있어서.”
연소현은 태연했다.
“낙양검가를 안에서 망치는 것도 질리셨나 보네요. 이제는 밖에 돌아다니며 검가의 이름을 더럽히고 다니실 생각이신지?”
세아가 담뱃대를 탁, 하고 탁자 에 내리쳤다.
“금주,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누가 뭐래도 이분은 검가의……"
“검가?”
금주가 코웃음을 쳤다.
“네 눈에는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 낙양검가로 보이니?”
그 말에 정아가 이를 악물었다.
"......."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서지 못했다.
아무 힘도 없는 자신이 나서 봐야, 주인의 명예를 회복하기는커녕, 더욱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금주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현월각주,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뭘 믿고 이러는지?”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가동패를 흔들어 보였다.
“내가 잡은 줄은 말이야. 낙양검가의 이름뿐인 대공자 따위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황금 동아줄이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이런 권력의 변두리에도 끼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아니란 말이야! 제대로 된 검가의 후계자 중 일인이신 이공자님의 최측근께서 오늘도 나와 만나……"
말을 하던 금주의 시선이 정아에게 머물렀다.
“오늘도 나와 만나서 말이지......."
말끝을 흐린 그녀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정아와 연소현을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그녀는 곧 무엇인가 눈치챈 듯 정아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 네가 바로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그 골치 아픈 계집이구나!”
"......."
정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손가락의 끝이 마치 자신의 영혼 가장 연약한 곳까지 찔러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정말 재밌는 우연이네. 오늘 오전에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당사자를 이렇게 만나다니.”
금주는 정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기까지.”
문지기는 금주가 더는 정아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검가동패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얘, 말 좀 해 보렴. 어째서 이공 자님의 측실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는 그 황금 같은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고, 가도 하필이면 그 무검자한테 갔니? 응?”
금주는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정아를 조롱했다.
“아니, 측실이 아니더라도 한낱 노리개가 되더라도, 그게 낫지 않아? 이런 한량을 믿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니?”
정아는 연소현을 삿대질하는 금주의 앞을 막아섰다.
“주인님을 모욕하지 마라. 너 따위가 감히 함부로 입에 올려선 안될 고귀한 분이시다.”
그녀의 항변에도, 금주는 그저 깔깔 웃어넘길 뿐이었다.
“고귀한 분? 그래 고귀하기 짝이없는 분이시지.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얻었던 모든 권리를 팽개치고, 책임도 내다 버리고, 자기 가문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그녀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그래도 나같이 근본도 없는 거리의 천한 년보다 훨씬 고귀한 분이시겠지.”
정아는 무시무시한 금주의 기세에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직시 했다.
하지만,
"......."
하지만 할 수 있는 항변은 없었다.
무검자(無劍者).
그것은 낙양검가에서, 낙양이라는 거대한 대도시에서, 심지어는 하남성(河南省) 전체에서도 조롱당하곤 하는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낙양검가의 이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만큼, 동시에 그 가문의 은둔자인 무검자라는 이름도 너무나 잘 알았다.
태상가주인 아버지가 병상에서 두문불출하면서도, 온 힘을 쏟아 가문을 지탱하는 동안, 존재감이라고는 없는 불효자.
비겁자.
겁쟁이.
만약 그가 칩거하는 동안에도, 낙양검가가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발전하지 않았다면, 지금 연소현의 이름은 조롱당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할 말이 없지? 혹시 뭐라도 할 말이 있으면 들어 줄 테니 말해 보렴?"
분했다.
너무나 분했다.
대공자 연소현은, 자신이 본, 자신이 섬기기로 한 주인님은 그렇지 않다고, 외치고 싶었다.
자신이 아는 연소현에 대해서 소리 높여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의 말은 허무할 뿐이리라.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이 이리도 무력하게 느껴졌던 것은, 처음이었다.
이공자와 삼공자에게 쫓기듯 접객당을 떠났을 때도,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지진 않았었다.
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 모욕당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에서, 무력함을 이리도 사무치게 느끼다니.
“그쯤 하는 것이 어때?”
정아의 어깨를 감싸 뒤로 돌린 것은 연소현이었다.
“그래도 내 하나밖에 없는 전담시녀다.”
그는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더 하면 나도 화를 낼 수밖에 없다고?”
“이미 재미도 없었답니다.”
금주는 코웃음을 쳤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을 애써 억눌렀다.
머리에 열이 올라, 연소현을 조롱하긴 했다.
하지만 낙양검가의 대공자란 위치는 당연히 그녀로서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지위였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세아에게 말했다.
“각주. 그렇게 열심히 바깥을 홀긋거려 봐야, 네가 기다리는 안전장치들은 안 온다니까?”
세아가 말했던 일각은 지난 지 오래였다.
“네가 압력을 넣었구나......!"
금주는 자신을 노려보는 세아를 향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에 들린 검가동패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완전 만능열쇠라니까.”
깔깔, 하고 기분 좋게 웃어 보인 금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었다.
“원래 오늘 그 몸에 단단히 경고 를 새겨 줄 참이었는데……"
그녀는 홀긋하고 연소현을 향했다.
“아쉽게도 방해꾼이 등장해서 그 것까지는 좀 어렵게 됐네."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문을 나서는 그녀는 등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내가 올 때는, 그 알량한 대공자가 널 구해 줄 수 없을거야.”
금주가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그 수하들도 썰물 빠지듯 그녀를 따라 건물을 빠져나갔다.
“금주……"
세아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정아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대공자님 죄송……"
연소현이 그녀의 몸을 받아 들었지만,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정아야!"
세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