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화 (21/350)

제21편 금주(金蛛)

“어이, 진짜 좀 그만두래도?”

우두머리 사내는 골치 아픈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딱 옷차림이나 생김새만 보아도, 지체 높은 집안 아가씨가 분명했는데, 도통 말을 들을 생각을 않는 것이다.

“X발.”

이윽고 그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경고는 끝났다, 계집.”

그가 손짓하자, 수하 하나가 튀어 나갔다.

낮은 자세 낮은 중심축에, 안 그래도 빠른 속도가 더욱 빨라 보였다.

부지깽이에 한 대 정도는 맞을 수 있지만, 단번에 들이박아 제압 할 생각이었다.

'잡았……!'

정아의 몸이 딱 한 발자국 옆으로 움직여, 사내를 피해 냈다.

조금만 빨랐어도, 사내가 궤도를 수정했을 터였고,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붙들렸으리라.

“우윽......!"

그리고 그녀가 든 부지깽이의 끝은 정확히 상대의 명치를 찌르고 빠진 뒤였다.

정아는 높이 치켜들었던 부지깽이를 그대로 사내의 목덜미에 내리쳐 의식을 끊었다.

그것이 검이었다면, 상대의 심장을 뚫고, 목을 끊었을, 무섭도록 정확한 자세였다.

그제야 사내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보통 계집이 아니다! 사정 봐주지 마라!”

정아의 좌우에서 사내들이 덮쳐들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물러나 두 명에게 동시에 공격당할 수 있는 각도를 줄였다.

“흐읍!”

먼저 달려들게 된 사내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다음 휘두른 주먹도 그녀의 코앞을 스쳤다.

그사이에 아래에서 불쑥 솟아오른 부지깽이의 자루가 사내의 아래턱을 박살 냈다.

“크헉……!"

두 번째 사내가 그사이에 달려들었지만, 정아는 이미 물러나 간격을 벌렸다.

“X발!”

간격을 계속 빼앗기자 그는 전술을 바꿨다.

그는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러, 그녀의 너풀거리는 옷자락을 잡아채려 했다.

어디든 잡아챌 수만 있으면, 그녀의 움직임을 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잡아채려 해도, 그녀의 옷자락은 너풀거리며 그의 손아귀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갈 뿐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앞의 사내가 모든 타격이 빗나갔던 것처럼, 옷자락을 노리는 사내의 손짓 또한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분명히 눈앞의 여인은 무림인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모든 공격이 빗나간다는 말인가.

“억……!"

정신없이 달려들던 사내가 기절해 있는 동료를 발견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어떻게……?’

분명, 이 여인은 자신을 앞에 두고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뒷걸음을 치면서 어떻게 기절해 있는 이를 피했단 말인가?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운 사내의 뒤통수에 부지깽이가 날아들었다.

“……대단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아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상대는 맨손에, 부지깽이를 들었다지만, 저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내공이 요구되는 '무공(武功)'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무술(武術)'로 단련된 흑골파의 정예들이었다.

수십 개의 해골 문신이 알려 주듯, 저들은 수십 명의 인명을 해치며, 경험을 쌓고 능력을 증명해 온 이들이 아닌가.

“……미친.”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홀로 남은 우두머리가 품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단도(短刀)를 꺼내 들었다.

“계집. 이게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그저 칼날이 번쩍이는 것만 보였으리라.

하지만 정아의 '눈'은 정확하게 칼날을 보았다.

칼날뿐만 아니라, 칼날의 결, 손잡이에 감은 가죽에 탄 손때, 손질하지 않아 검은 때가 잔뜩 낀 손톱도, 잘 씻지 않아 더러운 모공조차도,

모두 그녀에게 보였다.

부지깽이를 슬쩍 들어서 그 궤도에 끼워 넣자, 단도가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이격(二擊)은 바로 이어서 들어왔다.

아무리 그 모든 걸 보아도, 내공 한 줌 없는 몸으로는 연격(連擊)을 모두 피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의 호흡을 듣고 있었고, 상대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의해서 극대화된 감각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있었다.

즐거웠다.

정아는 어느새 자기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미소를 본 우두머리의 눈이 뒤집혔다.

“이 개 같은......!"

퍼억

호흡을 완전히 빼앗은 일격이었다.

이제까지 수비적인 태세로 일관하던 정아가, 상대가 말을 하는 틈을 단숨에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었다.

인중을 부지깽이에 강타당한 사내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뒤로 자빠졌다.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완벽한 일점(一點) 찌르기였다.

“하악, 하악.”

정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부지깽이로 땅을 짚고 버텼다.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체력적인 한계는 그녀도 어쩔 도 리가 없었다.

“정아야!”

급히 달려온 세아가 그런 정아를 부축했다.

언니의 품에서 정아가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니, 이거, 힘드네요.”

세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너 검가에서 검술(劍術)을 배웠던 거니?”

정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

“그러면?”

정아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냥 오고 가며 어깨너머로 '봤어요'."

세아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정아야, 그게 무슨 뜻……"

그때 정아가 그녀의 부축에서 벗어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직 일각은 멀었나요?”

“아직이야.”

정아는 줄입구 방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에는 저도 무리예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좀 전에 보고했었던 세아의 수하가 피투성이가 되어 굴러들어 왔다.

“가, 각주님, 도, 도망……!”

복도로부터 짜랑짜랑한 여성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찌르는 것 같은 음량은 명백하게 여성이 내공을 가진 무림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너무나 시시하구나. 다들 어딜 갔길래 이렇게 한심한 벌레 같은 것들밖에 없지?”

세아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금주.”

열린 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것은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을 한 미인이었다.

여인의 옷은 온통 새빨간 색이었는데, 얼굴의 색조 화장조차도 전부 붉은 계통이라 그 인상이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세 명이 병장기를 갖춘채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까지도 검은 해골 문신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그들은 세 명 모두가 무림인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복도는 흑골파의 일반 조직원들로 가득 찼다.

“어라 이게 뭐야?”

기분 좋게 등장했던 금주가, 바닥에서 기절한 채 널브러진 자신의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정아와 그녀가 들고 있는 부지깽이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런 것들을 정예라고 내가 먹여 주고 키워 줬다니……"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삼인 중, 승복을 입은 자의 소매가 펄럭였다.

"......."

정아가 급히 세아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이미 승복의 자세는 원래대로 돌아간 이후였다.

다행인 점은 그녀들을 향한 공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소매에서 튀어나온 바늘들은 기절해 있던 이들의 급소에 박혀 있었다.

'역시 대응할 수 없었어……!’

정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은 징조를 느꼈고, 날아드는 것이 바늘이라는 것도 볼 수 있었지만, 속도의 차이가 너무도 컸기에 무의미했다.

내공이 없는 일반인의 한계였다.

만약 저 바늘들이 자신들을 향했다면…….

“금주, 대관절 이게 무슨 짓이지?”

정아의 앞으로 나선 세아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짓을 하면 후환이 따르는것 정도는 알 텐데 말이지.”

금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는 손님 대접이 차암 별로다. 그 흔한 차 한 잔을 내어 오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자 복도에 서 있던 금주의 수하 중 하나가 튀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세아와 정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찻잎을 찾았다.

세아가 정아를 위해 특별히 준비 했던 찻잎이었다.

“……손님이라니, 농담이지?”

세아의 말에 금주가 피식 하고 코웃음 쳤다.

“평소에 똑똑한 척이라고는 다 하더니, 머리가 갑자기 굳었나 보네.”

그녀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손님이 아니라 적이었으면, 네가 아직도 그렇게 멀쩡히 서 있었겠니?”

세아는 곰방대를 흔들었다.

“네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니, 적으로 온 건 확실히 아닌 모양이네.”

그녀는 차를 우려내던 금주의 수하에게서 찻잔을 뺏어 들었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그 수하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럼 말해 봐.”

세아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차향(茶香)을 즐겼다.

“하. 진짜.”

금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배짱은 진짜 우리 새끼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다니까.”

금주가 손을 까딱거리자, 승복이 다시 한 번 펄럭였다.

바늘이 몇 가닥 스쳐 지나가고, 세아의 몇 가닥 끊어진 머리카락들이 흩날렸다.

하지만 세아는 눈 깜짝하지도 않고, 하나 남은 눈으로 금주를 쏘아 볼 뿐이었다.

“쳇."

금주는 재미없다는 듯이 혀를 차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우리 새끼 중에 그래도 쓸만한 애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엄청 잦아졌거든.”

“공격적인 확장의 대가(代價)가 아니겠어?”

“그런데 나는 이 습격의 배후에 왠지 네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단 말이지.”

세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금주를 바라봤다.

“……이 난리를 친 이유가 단지 그 느낌 때문이라고?”

금주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내가 어디서 좀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세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답했다.

“이야기야 입만 있으면 어디서나 생겨나는 게 이야기고.”

그 태연한 세아의 태도에 금주가 이를 드러냈다.

“어떻게 내가 딱 이 순간에 찾아 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네 주변의 방어가 빈 그 순간에?”

세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담뱃대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녀가 길게 뿜은 연기가 천장으로 흩어졌다.

"세작(細作)이겠지.”

금주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아니지, 아니지. 말 돌리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나 금주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구석이 생겼다는 이야기 아니겠어?”

그녀의 내력이 담긴 목소리에, 찻잔에 담긴 차가 가늘게 진동했다.

“더는 너희 같은 어쭙잖은 소꿉장난 단체들에 휘둘릴 일이 없다는 이야기라고.”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기세가 공간 전체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래서?”

세아는 태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진짜배기' 정보 단체에서 내가 배후라고 하던?”

“아직은 약간 부족하지. 그런데 네 말에서 틀린 곳이 있어서 말이야…….”

금주는 자신의 넓은 소맷자락을 뒤적여 원형 패(牌)를 꺼내 들었다.

“여긴 진짜배기 따위가 아니야. 낙양에서, 하남에서, 중원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곳이지.”

금속으로 만들어져 광택을 내는 원형의 패에는 낙양검가라는 네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검가동패 (劍家銅牌)……?!”

그 물건의 이름을 외친 건 정아였다.

금주는 그런 정아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걸 알아본다고? 누구야, 너?”

"......."

하지만 정아는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금주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가동패를 세아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자, 이제 알겠지? 왜 내가 심증만 가지고도 이 난리를 치는지? 이 난리를 쳐도 후환 걱정을 하지 않는지?”

금주는 활짝 미소 지어 자신의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거 내가 좀 봐도 될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익숙한 그 목소리에 정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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