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회포(懷抱)
근 10년 만에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된 자매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확실한 것은, 이 자매가 모범적인 모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언니, 제 주인님은 언니가 말씀하신 것과 전혀 다른 분이에요.”
정아의 말은 시리고 메마른 삭풍(朔風)을 닮았다.
“……과연 그럴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너도 알겠지. 지금의 낙양검가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지. 후계자들의 권력은 점차 커져만 가고, 그들을 노골적으로 옹립하는 이들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그녀의 하나만 남은 눈이 정아를 직시했다.
“두문불출하는 태상가주의 영향력이 이제 끝났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많지. 심지어는 예전엔 음모론에 불과했던, 태상가주 음독설까지도 다시 이쪽 계통의 사람들 사이에서 떠오를 정도니까.”
정아는 '음독설'이라는 말에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전부 헛소리군요.”
정아의 반응을 잠시 살피던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공자에게 아직 신임을 못 받는 모양이네.”
뻔히 보이는 명백한 도발에 넘어 갈 정도로, 정아는 순진하지 않았다.
자신의 언니가 무언가를 확신해서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정아를 통해 확신을 얻으려고 하는 말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검가 내부의 기밀들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캐내는 것이 언니의 목적이었을 테니.
정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애초에 제가 신임을 받고 못 받고의 이야기가 주제가 아니었을 텐데요?”
도발의 의도를 읽혔지만, 상대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래. 주제는 천하제일의 가문이라고 불리는 낙양검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 건, 전적으로 대공자의 책임이라는 이야기였지.”
그러고는 태연하게 연소현의 측에서 가장 아픈 곳에 '말'을 찔러 넣었다.
“대공자는 어디까지나 대공자일뿐이니까요. 가주를 완전히 대행하는 소가주가 아니니까, 전적으로 주인님께 책임을 묻는 건……"
언니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정아에게 쐐기를 박았다.
“아직도 소가주가 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대답이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
정아의 입이 닫히고, 시선이 가늘어졌다.
"......."
그러자 맞은편의 상대 또한 턱을 살짝 치켜들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정아가 화려한 의상 속에 단아한 미모를 갖추고, 침착함과 타고난 직관을 뽐낸다고 하면,
그녀의 언니, 세아는 절제된 의상 속에 거칠고 야성적인 미모를 갖추고, 냉정함과 철저함을 자랑했다.
“……어제 네가 대공자의 원각정으로 소속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어제'라는 말에 정아는 속으로 침음(沈吟)을 삼켰다.
자신의 언니는 이공자와 삼공자 수하들과 비슷한 속도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는 뜻이었다.
“네가 무슨 계산을 하고 대공자에게 의탁했는지는 내가 알 수가 없지. 너도 그 근거들을 외부자인 내게 말해 주지 않을 거고.”
자신의 언니, 세아는 기를 다룰수 있는 재능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홀몸으로 이 거대한 낙양이란 도시에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보 단체를 구축한 인물이 었다.
그녀는 곰방대를 꺼내 들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그 '무검자'라니. 너는 도대체……"
그녀의 말이 끊겼다.
“그 호칭을 입에 담지 마세요.”
".......!"
세아는 약간 놀라움을 느끼며, 정아를 바라보았다.
정아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강한 감정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자매가 앞에 둔 두 잔의 찻잔에 서 올라온 김이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나 빛을 산란했다.
“……미안하구나.”
정아는 아무 말 없이 세아의 사과를 살짝 고개 숙여 받았다.
“흐음.”
세아의 얼굴에도 약간의 지친 기색이 떠올랐다.
감정적인 소모가 컸던 탓이었다.
아무도 자신들을 10년 만에 얼굴을 본 자매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나도 정보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대공자가 마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단다.”
그녀는 작게 조소하며, 담뱃불을 붙이고는, 천장을 향해 길게 연기를 뿜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었어. 그가 칩거한 지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녀의 시선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향했다.
“그의 경쟁자들은 그동안 엄청난 세력을 확보했어. 지금에 와서 대공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그건 지켜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정아는 차분한 기색으로 돌아와 그저 찬찬히 차를 즐길 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고 있었다.
검가의 접객원에서 볼 수 있었던, 고급 찻잎.
다채롭고 아름다운 다기(茶器)들.
낙양 상업가의 중심지에서 거리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
묵직하고, 차분하게 꾸며진 실내.
낙양검가 안에서도 들을 수 있는 명성(名聲).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언니가 맨몸으로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들이었다.
'역시 언니는 대단해.’
그때 정아의 '눈'이 묘한 광채를 흘렸다.
“……언니. 일 층에서부터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음?”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세아의 수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각주님! 흑골파입니다! 놈들이 갑자기 쳐들어왔습니다!”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손님과 있는데 문을 벌컥 벌컥 여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세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수하에게 곰방대를 휘저어 보였다.
“그래, 보고해 봐.”
“비무장, 수는 약 사십, 무림인은 미발견.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밀고 들어와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피우기 시작. 양측 사망자는 없고,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방어 중입니다!”
태연한 기색의 세아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정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 가서 상황이 변하면 보고 해.”
“옙!”
수하는 신속하게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순간, 정아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안 좋군요.”
세아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비무장인 건 다행이지만, 우리 쪽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림인들이 잠깐 빠진 상태야. 심지어는 내 개인 호위도.”
그 말에 정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무슨 상황이길래 개인 호위까지......."
어차피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정아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물었다.
“얼마나 버티면 되나요?”
세아는 거칠게 담뱃대를 물었다.
“최대 일각(一刻). 그 안에 마련해 둔 안전장치들이 움직일 거야.”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저로도 충분하겠네요.”
그 말에 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야? 너……?"
그때 정아가 그녀를 창가 쪽에서 잡아당겼다.
와장창!
동시에 창문들이 박살 나며, 그곳으로 검은 옷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아의 눈이 빠르게 그들을 파악했다.
몸 곳곳에 검은 해골 문신을 수십 개 달고 있는 것을 보아, 흑골파의 정예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림인은 아니었다.
“이거 이름 높으신 현월각(弦月閣)의 미인 각주님이 아니신가!”
네 명의 사내 중 가장 앞에 있는 이가 두 팔을 과장되게 벌리며 외쳤다.
“이야 듣던 것보다도 훨씬 예쁘잖아. 우리 한번 포옹이나 합시다!”
그 말에 세아가 곰방대를 물고 코웃음을 쳤다.
“이 대낮에 중립 정보 단체를 쳐 들어오다니, 어처구니가 다 없네.”
아무리 혹골파가 뒷골목에서 날고뛴다지만,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각 이해관계 사이에서 보호받는 중립 정보 단체를 건드리는 것은, 흑골파 정도의 규모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까라면 까는 거지, 뭐 우리는 그런 복잡한 거는 모르고…….”
뒤의 사내들이 발걸음을 옮겨, 그녀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묶여 줬으면 좋겠지만, 그리 순순히 협력하지는 않으시겠지?”
세아의 눈빛이 시퍼렇게 빛났다.
“손대기만 해 봐라. 너희 얼굴은 나 현월각주가 모두 기억했으니.”
그 말에 사내들이 약간 주춤거렸다.
그 시퍼런 기세도 기세였지만, 그녀의 말 안에 담긴 의미가 너무도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헹.”
하지만 사내들은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미리 무언가 보상에 대한 확답을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놈들도 비무장인 걸 봐서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 사로잡혔다가는 이후 교섭에서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상대가 목숨을 앗아 갈 의도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폭행을 당할 수도, 심지어 겁탈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후 교섭력을 걱정하는 것부터가, 세아라는 사람이었다.
“이봐.”
세아는 정아를 가리키며, 우두머리 사내에게 말했다.
“저분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생기면, 너희도 나도 다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게 좋을 거다.”
우두머리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 계신 분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 없이 보내 드릴 거요. 우리가 볼일 이 있는 건 어디까지나 현월각주이니.”
현월각주를 독대할 정도에, 옷차림만 보아도 보통의 여인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자 자, 물러서쇼.”
한 명의 사내가 나름 정중한 태도로 정아에게 다가와 손을 까딱거리며 벽면으로 물러설 것을 요구했다.
세아는 정아를 향해 협조할 것을 눈짓했지만, 정아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는 정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덤덤해 보였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그 정도면 나로도 충분하겠네.'라던 정아의 말이 세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협조 좀 하자니까?!”
사내가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
정아는 그 사내의 손가락 하나를 잡아채어 그대로 꺾어 버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아의 몸이 사내의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부러진 손가락과 팔을 잡고 그대로 바닥에다가 메쳤다.
“……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메다 꽂힌 사내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사내의 시야에 정아가 휘두른 부지깽 이가 가득 찼다.
퍼억!
호쾌한 휘두르기에 사내의 의식이 그대로 날아갔다.
거기까지의 모든 동작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정확하고, 자연스러웠으며, 완벽했다.
“엥......?”
좌중의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아이고, 공자님. 도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땀을 줄줄 흘리며 문지기가 연소현에게 외쳤다.
“뭐야,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르는거냐?”
태연하게 꼬치를 뜯어 먹던 연소현이 시선을 돌려 바라보자, 문지기가 대번에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수행시녀가 홀몸으로 다니고 있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해서……"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걔가? 위험해?”
그 반응에 문지기가 당황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연소현은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꼬치를 먹어 치울 뿐이었다.
* * *
우두머리 사내는 기절한 수하를 발로 걷어찼다.
“멍청한 새끼!”
주변의 수하들이 낄낄거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정아의 한 수는 놀라웠지만, 어디까지나 호신술의 영역이었고, 또한 불시의 기습이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보여 준 기술 덕분에 오히려 그녀에게 내공이 없음을, 그녀가 무림인이 아닌 것을 명백히 드러냈다.
무림인도 아닌 여성은, 아무리 단련을 했어도, 한계가 명확했다.
“어이, 아가씨. 대단한 신분이라길래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러기 힘들어져 가는데?”
남은 사내들이 우두머리를 지나쳐 정아에게로 다가갔다.
“무림인도 아니면서 설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협조하시지?”
정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살벌한 기세를 풀풀 풍기는 사내들, 그것도 흑골파의 정예들 앞에서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의 옅은 홍채가 오묘한 황금빛 광채를 머금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