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편 흑도(黑道), 무림인(武林人)
낙양의 낮은 바쁘고, 또 바빴다.
낙양은 고대로부터 대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낙양은 대륙의 북부 내륙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물류 유통망의 중심지였다.
황하(黃河)의 대운하는 낙양이 인구 수백만의 초거대 도시가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는데, 이곳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물류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중원 내륙에 관심을 가진 색목인(色目人) 상인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온갖 특이한 물건들과 각양각색의 상인들이 바글바글한 곳에서도 주변인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이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연소현의 일행들이었다.
“오오, 실로 아름다운 소저가 아닌가?!”
색목인 상인 하나가 정아를 보며 서툰 중원어로 감탄사를 터트리자, 옆의 중원인 상인이 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이 사람아! 어디서 삿대질인가?”
“왜 그러나?”
색목인 상인이 얼떨떨해하자, 중원인 상인이 슬쩍 턱짓으로 정아의 뒤를 가리켰다.
"저기 경비대원이 안 보이나? 낙양검가의 사람이야.”
낙양검가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색목인 상인은 대번에 손가락을 감췄다.
“……그 낙양검가?”
“그래, 그 낙양검가일세.”
색목인 상인이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륙 북부 지역에 처음 발을 딛는 순간부터 무수히 듣는 주의 사항이 바로 낙양검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낱 경비대원의 복장을 한 이가 따르는 것이 다였지만, 그런 이유로 정아는 그 흔한 추파 한 번 듣지 않았다.
일행들이 지나는 방향으로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흠. 나는 따로 볼일이 있으니, 나중에 합류하겠다.”
연소현의 말에 문지기가 그를 막아섰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호위인 저를 두고 가시겠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연소현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연히 두고 갈 건데? 너는 정아나 잘 지키거라.”
문지기는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어? 어?!”
그가 잠깐 한숨을 쉰다고 눈을 감은 사이, 연소현은 사라진 지 오래 였다.
“공자님은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문지기는 정아가 손짓하는 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오오! 무림인이다!”
“경공(輕功) 이다!”
주변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한 4층 건물의 지붕에 올라섰다.
안력(眼力)을 급히 끌어 올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대공자는커녕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호위를 위해서 상시로 내력을 운용하고 있었건만, 이 대공자란 작자는 조금의 기척도 없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무검자라고 불리는 대공자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치솟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보고부터 해야 하나?’
하지만 어디에 보고를 한단 말인가.
만약에 보고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문제일 것이 뻔했다.
검가라는 가문이 대공자에게 취하는 태도를 볼 때, 일단 결국 모든 책임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지게 될 것이 뻔했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그는 단숨에 정아 곁으로 돌아왔다.
“수행시녀. 미안하지만 볼일은 혼자서 보셔야겠소. 나는 한시라도 빨리 대공자를 찾아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 한 몸 지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공자님을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태연한 태도에 문지기는 혀를 내둘렀다.
“그대는 걱정이 되지도 않소?”
정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인지 그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힘드네요.”
“……그건 그렇지만.”
사실 그건 문지기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하는 바였다.
대공자가 정말로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이렇게 그녀와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애초에 완전히 대공자를 놓쳤다고 판단된 그 순간, 책임이 어떻게 되든 품속에 든 전용(專用)의 신호탄부터 터트렸을 터였으니까.
“그래도 일단 나는 계속 공자를 찾아보겠소.”
“나중에 뵙겠습니다.”
정아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사라졌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곳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낙양의 한 구석진 거리.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그 뒷골목은, 일반 백성이라면 감히 접근도 하지않는 곳이었다.
그 뒷골목에 자리 잡은 늙은 문신사는 흑도(黑道) 출신의 은퇴자라 평소 꼬장꼬장하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유난히도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의자에 편히 기대앉은 것은 실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사내였다.
근골부터가 남다르고, 거기다가 살집까지 두툼하여 사람이 아니라 황소가 한 마리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거기다가 그 흉악한 인상의 화룡점정을 이루는 것은 그 거대한 몸집을 가득 메우고 있는 크고 작은 해골 문신들이었다.
지금 문신사가 새기고 있는 것도 새로운 해골 문신이었는데, 이미 들어찬 시커먼 해골 문신 숫자만 해도 백은 족히 넘어 보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그 사내가 문신을 시술받으며, 낮잠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생살을 바늘로 거듭 찔러 넣는 와중에 낮잠이라니.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한 늙은 문신사는 침을 내려놓고, 금속 거울을 들어 상대의 시선에 맞추어 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뜨거운 수건으로 얼굴을 덥히고있던 사내가 슬쩍 수건을 들고 금속 거울을 바라보았다.
수건 아래서 흉흉하게 빛나는 안광은 마치 석탄이 타고 있는 것과 같았고, 수건을 들추고 있는 손아귀는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했다.
“좋아. 다음.”
그는 다시 수건을 덮고 의자에 깊이 기댔다.
“예, 계속하겠습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문신사가 다음 해골을 새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사이 사내는 편안한 의자와 뜨뜻한 수건, 그리고 화로의 훈훈한 온기를 즐기며 다시 낮잠을 즐기기 시작했다.
문신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이 무림인이라는 작자들은 그냥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문신사가 다시 침을 집어 들었을 때,
".......!"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조용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문신사는 반사적으로 무언가 저항을 해 보려 했지만, 그의 목 앞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을 보고 두 손을 들어 저항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나타나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덩치가 크지 않고, 말랐지만, 드러난 부위의 근육은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했고,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사, 살수(殺手)들이다……!’
그들의 행동과 모습에, 분위기를 금방 파악한 흑도 출신 문신사는 살수들에게 얌전하게 협조하기로 결정 내렸다.
문신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자신의 입을 가로막은 살수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물러섰다.
그가 물러서자, 입구를 통해 두명의 살수들이 추가로 들어왔다.
칼을 입에 문 그들은 문신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좁은 문신가게를 발소리도 없이 나아갔다.
"......."
그렇게 순식간에 좁아터진 가게안에 인원이 배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그들은 숨소리도, 어떤 기척도 내지 않았다.
목표는 분명했다.
두 명의 살수는 황소와 같이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를 정확히 노리고 포진했고, 각자가 치켜든 칼날이 시퍼렇게 빛났다.
".......!"
기합조차 없었다.
두 개의 칼날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순간에 치명적인 급소를 향해 번쩍였다.
콰직!
그 광경을 바라보던 문신사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잠이 들어 있던 사내가 양쪽에서 떨어지는 칼날을 자신의 두 맨손으로 잡아채어 버린 것이었다.
“헉……!”
문신사가 그 광경에 헛바람을 채 들이켜기도 전에, 사내를 공격했던 두 명의 살수가 서로 반대 벽면에 처박혔다.
왼쪽 살수는 흉곽이 함몰되었고, 오른쪽 살수는 턱이 짓이겨졌다.
즉사였다.
그리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사내는 천장에 머리가 닿을 것 같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가 양쪽으로 뻗은 양손에는 여전히 칼날을 쥔 상태였다.
그 꽉 쥔 주먹에서 핏물이 홀러 나와 그의 팔뚝을 타고, 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흐흐흐흐.”
덩치에 걸맞은 걸쭉한 저음의 웃음소리가 실내를 채웠다.
"기척을 숨기고, 살기를 숨겨도, 칼날의 예기(銳氣)를 감출 수는 없지.”
사내는 살기가 넘실거리는 눈빛으로 남은 살수들을 내려다보았다.
“……죽여!”
남아 있던 두 살수가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흐.”
짧게 비웃음을 흘린 사내는 양손에 쥐고 있던 칼날을 빙글 돌려 바로 잡았다.
그저 멋을 부리는 것 같은 행동, 그 행동이 끝날 때쯤, 이미 살수들의 칼날은 사내의 코앞까지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두 손에 들린 칼날이 번쩍 였다.
한 살수의 배를 뚫은 칼날은 입으로 튀어나왔고, 옆 살수의 어깨를 파고든 칼날은 반대쪽 옆구리로 튀어나왔다.
분명 칼날이 그 코앞까지 다가왔었는데, 오히려 늦게 움직인 사내는 멀쩡했고, 살수는 토막이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늦게 움직였지만, 더 빨랐고.
팔만 움직였지만, 더 강했다.
“이게 무림인과 너희 같은 벌레들의 차이다. 알겠느냐?”
사내는 칼을 대강 내던지고는, 뒤로 쓰러진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그리고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채, 굳어 버린 늙은 문신사에게 말했다.
“어이, 추가로 해골 문신 네 개를 더 해야겠다.”
“예! 예!”
문신사는 벌떡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시술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어이쿠 또 제대로 한 건 했네, 우리 아우.”
가게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것은 의자에 누운 사내와 덩치도, 외모도 거의 같은 사내였다.
다른 것은 흉터와 문신의 위치 차이밖에 없달까.
“여어, 형님 오셨소. 형님 없는 동안 나 혼자 재미 좀 봤소.”
“잘했어. 그건 그렇고 말인데……."
그는 지저분한 턱수염을 긁었다.
“결국, 그 가면 장인 놈은 못찾았어. 가면 장인 놈 잡으러 갔었던 놈들도.”
의자에 누운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외주 새끼들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
밖의 사내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그 가면 장인 놈 가족들은 우리 애들이 다 족쳤다고 했잖아?”
의자에 앉은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 보니 족치기만 해야 하는데, 실수로 다 죽였다고 들었소.”
“하. 혈기왕성한 놈들.”
“우리 흑골파 애들이 좀 혈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지 않소. 우리만해도 좀 그렇고. 흐흐.”
밖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내젓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아까 그쪽 거리 담당하는 애들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
“뭡니까?”
사내는 자기도 뭔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 가면 장인 집이 지금 멀쩡하게 장사를 하고 있다는데?”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가 그 말에 벌떡 일어났다.
“어? 그 가면 장인 새끼 아니오?”
“아, 글쎄. 애들 말로는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러면?”
“그게 아마……"
사내는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창백한 안색의 서생 같은 놈이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