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편 외출(外岀)
“주인님, 저는 채비를 모두 갖추었사옵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정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원각정에 올 때 입었던 단벌 외출복을 입고, 평소보다 화장에 조금 더 신경을 쓴 것뿐이었지만.
그러함에도 원판 자체가 너무나 훌륭한 그녀인지라, 그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것이 최선이더냐?”
하지만 연소현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마음에 차지 않으시옵니까?”
솔직히 이 정도로 꾸미는 것도, 손님들을 맞이하는 접객당에서는 금기나 마찬가지인 행위였다.
“낙양검가의 대공자를 수행하는 시녀로는 한참 부족하지.”
……라고 하는 본인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백색 무명옷을 입고 있을 뿐이었지만.
“문지기!”
연소현의 부름에 '원각정 정문의 경비조장'이자, '원각정의 연락책', 그리고 '정체불명의 고수'인 중년인이 투덜거리면서 다가왔다.
“아무리 대공자님이라지만, 문지기가 뭡니까, 문지기가. 제 이름은.......”
“시끄럽다, 문지기. 헛소리는 그만하고 내원의 아무 집사에게 가서 여성 외출복이나 받아 오거라. 최고급으로.”
내원은 가주를 중심으로 하여, 직계혈족의 시중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직금 머라고 하셔씀니까?”
문지기의 입에서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당장 튀어 갔다 오지 않으면, 네놈은 문지기가 아니라, 원각정의 똥지게꾼이 될 것이야.”
문지기는 대번에 눈앞이 시뻘게 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평생을 낙양검가를 위해서 헌신했다.
지금은 반쯤 은퇴하였지만, 여전히 낙양검가의 본가에서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는 낙양검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외부에서 무수한 실전을 치렀고, 그가 넘었던 사선(死線) 또한 그에 버금갔다.
이때까지 자신이 베어 넘겼던, 검가의 적만 몇이던가?
그런데 이 대공자라는 놈이, 검가의 수치이자, 경멸의 대상이 지금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의 명을 핑계로 아직도 칩거나 하며, 허송세월하는 주제에……!’
“아직 안 갔냐?”
슬쩍 돌아보는 연소현의 모습에 그는 이를 악물고 경신법을 펼쳐, 원각정 밖으로 향했다.
"아……!"
일순간에 신형이 사라져 버릴 정도의 신법에 정아가 무의식중에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위치를 놓칠 정도로 초절(超絶)한 신법이었다.
이 넓은 중원국(中原國에서도 저 정도의 신법을 보여 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제기랄……
그 신법은 문지기 나름의 위력시위였다.
하지만 그러고도 그는 조금도 속이 후련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에 대단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눈빛은 도대체 뭐지……?’
사실 그가 신법을 펼친 것은 임기응변이나 다름없었다.
돌아서는 대공자의 시선을 본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수많은 사선을 거쳐 왔던 그가, 직감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반응했던 것이었다.
어떻게든 직후에 경신법을 펼쳐 자리를 벗어나긴 했지만, 그 눈빛이 아직도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건 미친놈의 눈빛이었어. 그것도 제대로 미친 새끼의. 어떻게 허구한 날 서책만 보는 놈이……."
숲길이 끝나 갔다.
원각정의 정문이 보였다.
'그래, 조금만 참자. 정식으로 배치 변경 요청을 올렸으니, 조금만 참자.'
하지만 그가 참아야 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 *
잠시 뒤, 원각정.
“……안 준답니다.”
“뭐라고?”
“안 주겠답니다. 협조 안 한다고 합니다.”
직계혈족의 시중을 담당하는 내원에서 대공자의 명을 거절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대공자의 모습은 조금 유쾌하긴 했지만, 면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온 것은 그였다.
“이유는?”
문지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는 대공자님, 본인이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이유를 둘러대긴 했지만, 다 헛소리고, 결국 무검자가 있는 원각정에 협조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어처구니없는.”
연소현은 이마를 감싸 쥐고 허공을 바라봤고, 정아는 그저 황망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묘하게 도발적인 문지기의 질문이었지만, 연소현은 황당해할 뿐 의외로 태연했다.
“어쩔 수 없지.”
분위기를 살피던 정아가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시간도 지체되었으니, 지금 출발하시는 것이…….”
하지만 연소현이 소매에서 꺼내드는 것을 본 그녀의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다 멈췄다.
“오랜만이라 까먹고 있었어.”
처음에는 뭔가 싶어 멍청하게 연소현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던, 문지기의 턱이 쩍 하고 벌어졌다.
“그, 그건……?!”
연소현은 가까이 있는 누각으로 다가가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서신을 썼다.
'옷 가져와.'
형식도, 예의도, 아무것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서신이었다.
하지만 그 필체가 얼마나 대단한지, 멍하게 지켜보던 정아와 문지기가 무의식 속에 작게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쾅!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연소현은 손에 든 것을 서신에 찍었다.
그러자 '천하일검(天下一劍)'이라는 웅장한 인장(印章)이 서신에 나타났다.
“자. 받아라.”
연소현은 대강 서신을 접어 문지기에게 건넸다.
".......!"
그러자 문지기는 대경하여, 연소현의 앞으로 튀어 갔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양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그 서신을 받아 들었다.
“조, 존명(尊命)!”
서신을 받아 드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 해? 튀어 가.”
“존명!”
연소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주, 주인님. 역시 그것은......?"
연소현은 난간에 걸터앉아 손에 든 것을 들어 보였다.
“이거?”
“예. 그것 말이옵니다.”
연소현은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어. 그거 맞아. 가주직인(家主職印)
웬만해서는 겉으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정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검가금인 (劍家金印)! ”
낙양검가에서 절대명령권을 가진 단 한 명의 절대권력자를 상징하는 도장이자, 기물(奇物)이었다.
그런 도장의 실물(實物)을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것이 고작 시녀의 옷을 가져오라는 명령에 사용되다니.
“그, 그것을 어째서 주인님이……?"
연소현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정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그 상태'인데, 그럼 본가의 대공자인 본인 이외에 누가 가지고 있을 수 있나?”
맞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하, 하지만 그리 귀한 것으로 제 옷 따위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은……?!”
“걱정하지 마라.”
연소현이 피식 웃더니, 검가금인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 소매에 챙겼다.
“옛날부터 쓸데없는 데에, 자주 썼었다.”
사실 쓸모없는 데에만 쓸 수 있기도 하지만, 이라고 연소현이 덧붙였다.
“이걸 안 쓰면, 제대로 협조해 주는 곳이 없거든.”
그는 하하, 하고 웃었다.
“뭐, 책 살 때도 쓰고, 종이랑 붓 같은 거 살 때도 쓰고, 뭐 그렇게 쓰는 물건일 뿐이다.”
정아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싶었다.
* * *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낙양검가의 가주 신물인 '검가금인'은 과거에 당시 황제가 직접 검가의 가주에게 하사했었던 기물이다.
그런 가주직인이 찍힌 문서에 적힌, ‘옷 가져와'를 말 그대로 해석하는 아둔한 이는 낙양검가에 없었다.
가장 선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원의 여(女)집사였다.
그리고 위풍당당한 그녀의 뒤를 십수 명의 내원 시녀들이 절도 넘치는 모습으로 따랐다.
그 뒤로는 커다란 함을 뒤에 멘, 힘센 시종들이 줄을 이었다.
함들이 마당에 주르륵 늘어섰고, 그 뚜껑이 열리자 안에서는 수십벌의 여성 외출복과 신발들 그리고 장신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최상품들이었다.
그리고 내원 시녀들에게 끌려간 정아의 모습이 월궁의 항아와 같이 변하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으음. 이 정도면 충분하군.”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원의 여집사는 “철수!” 하고 짧게 외쳤다.
“애초에 순순히 협조했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매번 뭐 하는 짓인지, 하고 연소현이 그녀를 향해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소현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예를 올린 후 발걸음을 옮겼다.
썰물처럼 인원들이 빠져나가 버린 곳에는 그들이 가져왔던 함들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짐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뭐 해?”
연소현의 말에, 그의 시선을 피하던 문지기의 얼굴이 구겨졌다.
“……뭘 말입니까?”
연소현은 그 대답에 아무 말 없이 소매를 뒤적거렸다.
“아, 알았으니까 그만하십시오!”
그는 진저리를 치며, 함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귀한 물건을 저리도 아무렇게나 다루다니 말도 안 돼.” 따위의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연소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음에 드느냐?”
정아는 마당에 놓인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살짝 상기된 뺨을 숨기지는 못했다.
“……제 주제에 맞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연소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원각정에 왔고,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런 옷을 입을 일이 더 많아질 거다.”
정아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미풍에 흔들렸다.
그때 그녀는 직감했다.
이 미풍은 지금은 서쪽으로 느긋하게 흐를 뿐이지만, 결국 포악한 태풍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예, 주인님.”
정아의 눈에 각오가 깃들었다.
* * *
“……정말로 호위가 필요 없으십니까?”
연소현은 자신 앞을 막고 선 낙양검가의 호위제대원들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여기 이 친구가 있어서 괜찮다니까.”
연소현이 가리킨 방향에는 똥 씹은 표정의 '문지기'가 서 있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의 그가 오만상을 쓰고 있으니, 악귀나찰이 따로 없었다.
연락책에 심부름꾼에, 이번엔 호위까지.
그의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당장 저희로서는 대공자님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만, 호위제장(護衛祭壯)님의 허가가 없으면……"
연소현이 호위요원의 말을 끊었다.
“그래, 그래. 알아서 보고해라.”
“그런데 저희는……"
결국에 연소현이 검가금인을 꺼내 또다시 간이 명령서를 만들어 주고 나서야, 그들은 물러섰다.
“경비대 옷을 입은 저 양반은 누구래?”
“모르지. 고수처럼 보이는데, 오늘 우리 대신 고생 좀 하겠네.”
'무검자의 저잣거리 호위'에서 벗어난 그들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정아가 나서려고 했지만, 연소현이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됐다,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그들은 낙양검가의 후문중 하나에서 또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가 낮에 외줄한다는 것을 '위'에서부터 허가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비대원들이 막아선 것이었다.
그리고 분노가 폭발해 버린 정아가 불을 뿜는 기세로 그들을 질책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자와 경비단주 양쪽에 끼인 경비대원들만 불쌍한 노릇이었다.
“하하,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재미있는 일이 넘치는구나.”
재밌어하는 이는 당연히 연소현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지기는 그런 연소현을 질려 버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공자라는 작자는 도대체 그 속이 어떻게 생겨 먹은 자란 말인가.'
어제 그를 사정없이 몰아치던 대공자의 모습은 무엇이며, 가끔 드러나는 광기 어린 눈빛을 한 대공자의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오늘 보여 주고 있는, 이 자존심도 없어 보이는- 무검자 그 자체의 모습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가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전출되어야 한다!’
결국에 그렇게,
월궁의 항아처럼 보이지만 일행중 신분이 가장 낮은 시녀 한 명.
그저 낙양검가의 경비대원처럼 보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 한 명.
그리고 아가씨를 보좌하는 잘생긴 서생처럼 보이지만, 천고의 마물을 품고 있는 낙양검가의 대공자 한 명.
그 기이한 일행이 낙양 시내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