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5화 (15/350)

제15편 가족傢族)

집사부장은 정아에게 있어서,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던 정아는 낙양검가에 오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혈육들과도 연이 끊겼다.

집사부장은 열과 성을 다해서 정아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었다.

아무리 뛰어난 그녀도 사람인지라 실수도 많이 했었고, 사고도 몇번 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집사부장은 그녀를 감싸 주었고, 항상 좋은 길을 걸을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장담컨대 정아는 낙양검가라는 격류에 휩싸여 사라졌으리라.

그는 정아가 이 낙양검가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믿을 수 있는 단 한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대공자에게 보냈다는 보고서는, 그리고 그 마지막에 담긴 이야기는, 그녀로서는 큰 중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만일 타고난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대공자님과 거래를 하려고 든다면…….”

자신의 아비는, 대공자에게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죽여 없애길 권하고 있었다.

다리가 휘청이고,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왔고,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우읍-!”

그녀는 난간을 부여잡고 흙바닥에다 구토를 쏟아 냈다.

속에 든 것을 모두 쏟아 내고도, 한참을 더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헛구역질이 잦아들자, 그녀는 가늘게 떨려 오는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았다.

닦는 와중에도 새로 눈물이 흘러 나오고, 악다문 입에서는 흐느낌이 새어 나오려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신을 다잡았다.

꽉 쥔 주먹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그 보고서를 보여 준 이유를 알겠느냐?”

연소현의 목소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느긋했다.

하지만 정아는 그 목소리 깊은 곳에서 흐르는 차디찬 어둠을 느꼈다.

“……예, 대공자님.”

그녀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연소현을 향해 돌아앉아 고개를 숙였다.

“이 보고서에 담긴 것은 집사부장의 충심(忠心)입니다. 대공자께서는 제게 그 진정한 충심이 무엇인지 보여 주신 것으로 감히 짐작해 보았사옵니다.”

혈육이나 마찬가지 인 아이 조차도, 주군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충심이라…….”

연소현은 편한 자세로 기대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것을 광기(狂氣)라고 여긴다.”

자신의 아이조차도 버리게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정아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할지도 모르옵니다.”

그녀는 떨림이 멎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곳이라면,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낙양검가에서도 중심, 그 모든 음모와 권력을 향한 욕망이 최종적으로 모여드는 곳이라면……"

그녀는 다시금 자신이 있는 곳을 자각했다.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처지를 확인했다.

“이는 충심이옵니다.”

연소현은 시선을 내려 천천히 정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가 받아 준다면, 충성을 다하고 싶으냐?”

정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비가 그치고 활짝 갠 햇살 아래 피어오르는 꽃처럼, 아름다웠고 화사했다.

“아니옵니다.”

그녀는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받아 줄지 말지는 오롯이 주인의 몫. 저는 그저 충심으로써 주인을 섬길 뿐이옵니다.”

연소현은 정아라는 꽃이 활짝 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 꽃은 짙고 농밀한 향을 품고 있었다.

광기라는 이름의 향기를.

“대공자께서는 제 유일한 주인이시옵니다.”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썩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 * *

원각정의 밤은 여느 때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바람이 스치자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흩날리며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원각정을 둘러싼 절진에 의해서 비교적 따스하게 유지되는 기온 덕이었다.

정아가 비치된 유등(油燈)에 불을 붙이고 화로 가까이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화목하던 저희 집안의 상단은 한순간에 주저앉게 되었사옵니다.”

“염왕채와 악재라……"

연소현은 여전히 손에 서책을 쥔 채였지만, 때때로 질문을 던지거나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있었다.

14예, 그렇사옵니다. 상재(商材)가 넘치던 언니는 아버지와 몇 번이고 승부수를 띄웠지만, 결국 악재들이 겹치니 별수가 없게 되었사옵니다.”

“언니라고 해도 너와 나이 차가 크지 않았을 텐데, 상단 운영에 참여할 정도였나?”

정아는 술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대답했다.

“언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옵니다. 어려서부터 가문의 자랑이나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제 자랑이옵니다.”

그녀의 언니는 정아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의 가문으로 팔려 갔지만, 수완을 발휘하여 금방 자신을 되샀다고 했다.

“지금은 낙양에서 정보상(情報商)을 하고 있사옵니다. 이제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이름을 알리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언니의 이야기를 하는 정아의 모습에서 그녀가 자신의 언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언니가 보낸 서신에 의하면, 저희 가문에 겹쳤던 악재의 원흉을 찾았다고 했사옵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원흉은 다름 아니라 저희에게 염왕채를 쓰게 했던, 바로 그자였사옵니다.”

술잔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잊을 수 없사옵니다. 그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과 비대한 몸집을 하고서, 저희 집안을 무너뜨린 '금질'이라는 놈을……"

연소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금질이라고?”

정아가 의아한 눈으로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여], 분명 그 이름이었사옵니다. 본명 같지는 않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 주인님께서 아시는 이름이옵니까?”

연소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 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금질이라…….”

그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대인(大人)!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그만하고, 방향이나 제대로 안내하거라.”

“저, 저쪽입니다요!”

중년인은 절뚝거리면서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으로도 용케 연소현을 안내했다.

다름 아니라, 연소현이 잡아먹었던 사내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던 바로 그 중년인이었다.

“제 가족을 구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대를 이어서라도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요!”

그는 연소현에게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올리더니, 이내 자신의 가족들을 도와 달라며 매달렸다.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부디 부탁드립니다!”

“……알겠으니 안내나 하래도.”

그는 몇 번이나 자빠졌지만, 연소현이 도우려고 할 때마다 거절하고 일어나서 안내를 계속했다.

“저기, 저쪽입니다요!”

이윽고 그의 상점 겸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고 있는 그의 가게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이고, 임자! 임자!”

중년인은 그 모습에 대경하여 안마당으로 뛰쳐 들어갔다.

“서방님?! 이게 무슨 꼴이에요?!”

“아버지!”

뜨거운 가족 상봉의 생생한 현장음이 안마당으로부터 들려왔다.

작게 한숨을 쉬고,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연소현의 발에 무엇인가가 밟혀 부서졌다.

“……가면?”

난장판이 된 가게에 굴러다니는 것들은 전부 가면이었다.

혼례에서 사용하곤 하는 가면도 있었고, 집안의 복을 바라며 걸어 놓는 가면도 있었다.

'가면 장인이었던 거군.’

연소현이 안마당에 발걸음을 들여놓자,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일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인......!"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가면 장인이 그의 발치에 엎드려 길게 절했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뭔갈 오해한 모양인지, 그의 부인이 연소현의 앞에 무릎 꿇고 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대인! 곧 이자를 갚을 것이니, 이 양반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사지라도 멀쩡해야 돈을 갚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더니 아예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

“아니……."

소현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그의 아이들까지 튀어나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우리 아버지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러더니 바닥에서 대굴대굴 구르기까지 했다.

“아니, 이 사람들아! 이 대인은 '그런 대인'이 아니야! 내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이라고!”

아무래도 평소에 가면 장인이 빚을 수금하러 오는 이들을 대인이라고 불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가면 장인이 황급히 가족들을 단속하자, 부인과 아이들이 겸연쩍은 모습으로 일어나더니 이제는 연소현이 뭐라 할 틈도 없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대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정신없으면서도 일사불란한 모습에 연소현은 끝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 * *

“누추하지만 여기라도 잠시 앉으십시오.”

안채로 연소현을 안내한 가면 장인은 그를 가장 따뜻한 곳에 모셔 놓고는, 화로를 휘저어 불길을 살렸다.

그러고는 부인이 뜨거운 물을 내어 오는 동안 장롱 깊을 곳을 뒤져, 숨겨 두었던 자그마한 항아리를 꺼내어 왔다.

“찻잎입니다. 싸구려에 지나지 않아 대인의 입맛만 버리실까 걱정이옵니다만…….”

“괜찮다. 넣어 두거라.”

일반적으로 흔하게 마시는 곡물차 종류도 아니고, 찻잎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었던 탓이다.

가면 장인은 싸구려라고 했지만, 어떤 찻잎이라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비싸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연소현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그는 항아리에 곱게 모셔 놓은 차를 모두 연소현의 잔에 탈탈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이어서 아이들이 주전부리가 담긴 나무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아이들은 연소현의 탁자에 그릇들을 최대한 정중히 올려 두고는 물러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가면 장인과 그 부인도 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소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 우아한 태도로 찻잔을 들었다.

“……좋은 차다.”

그의 칭찬에 예닐곱 살로 보이는 아이들이 기뻐하며,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대인 이 바다처럼 깊은 은혜를 어찌……"

연소현은 손을 저어 가면 장인의 말을 막았다.

“되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인……!"

“그보다도.”

연소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너를 핍박하고, 여기에서 난장을 벌인 것은 누구냐?”

가면 장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 답했다.

“……그자들은 흑골파(黑骨派)와 계약을 맺은 이들로 알고 있습니다요.”

“흑골파?”

가면 장인은 찬찬히 자신이 아는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 그렇습니다요. 흑골파는 '금질이라는 자의 딸이라고 알려진 '금주'라는 이가 우두머리로 있는 끔찍한 흑도 무리입니다요.”

금질, 그리고 그의 딸이라는 금주.

“흑골파는 금질이라는 자를 대신해서 움직이는 무리인데, 사채업부터 도박장까지, 돈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안 끼어드는 데가 없는 거대한 집단입니다요.”

“네가 도박장에 갔던 연유는 무엇이냐?”

가면 장인은 이마를 바닥에 박고 대답했다.

“그것이 놈들의 수법입니다요!”

“수법이라?”

가면 장인은 이제까지 모였던 울분을 토하듯이 고했다.

“그렇습니다요! 사채의 이자율이 법도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니, 그 사채를 쓴 이들에게 강제로 도박에 참여하게 하여 빚을 늘리는 수법입니다요!”

“하……"

그 말에 연소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낙양의 이자 제한은 그의 아버지가 관청과 협의하여 이루어 냈던 과거의 치적(治績)이었다.

그리고 법을 처음에 조사하고 연구하여 구체화한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연소현, 그 자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