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내자불선(來者不善)
정아는 이제껏 자신이 한 번도 '충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가에 팔려 온 이후, 지금까지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에게 보은(報恩)한다거나, 보답하는 일에는 충실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 행동들은 기본적으로 받은 만큼 갚는다는 생각에서 기인했다.
자신은 대공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접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대공자한테 이 정도로 하면, 대공자는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一 라고.
하지만 대공자의 입장에서는 어 떨까?
* * *
돌아온 정아는 연소현이 느긋하게 기대앉아 서책을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엔 의학 서적이었다.
정아는 먼저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고, 이공자의 서신을 꺼내어 들었다.
“여기 이공자의 서신이옵니다.”
“그래?”
그는 그것을 건네어 받자마자 옆에 있던 화로에 던져 넣었다.
화르륵, 하고 화염이 잠시 치솟더니 검은 연기를 뿜으며, 이내 서신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대, 대공자님……?!”
이번만큼은 정아도 놀란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연소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책장을 넘겼다.
“그 서신은 이공자가 대공자님께 올리는 서신이옵니다만.”
“들었어.”
무심한 대답.
“아, 그것이, 그 서신은 아마도 저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옵니다.”
“너랑?”
책장이 한 장 넘어갔다.
“예……. 아마도 저의 거취와 관련하여 이공자가 대공자님께 올리는 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그래.”
책장이 또 한 장 넘어갔다.
정아는 말라 오는 입술을 핥고, 다시 말을 꺼냈다.
“그것을 읽지 않아도 괜찮으신지요?”
“어."
책장이 다시 한 장 넘어갔다.
“아, 예……. 알겠사옵니다.”
그때야 연소현이 짧게 덧붙였다.
“정말 중요한 일이면, 지가 직접 오겠지.”
그 말에 정아의 입이 작게 벌어져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
연소현은 서책 너머로 손을 내저었다.
“차나 내어 오너라. 다과도.”
“예, 예. 알겠사옵니다, 대공자님.”
정아가 급히 정신을 수습하고 물 러나려는데, 연소현이 물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읽어 보지 그랬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정아가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렇게 신경 쓰일 정도면 미리 읽어 보지 그랬냐고.”
정아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감히 천녀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의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래?”
“물론이옵니다!”
정아는 조심스럽게 불안한 눈을 들어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보이질 않았다.
“차나 가져오너라.”
* * *
이해할 수가 없었다.
궁금하면 미리 보지 그랬냐니, 물이 끓길 기다리던 정아는 복잡해져 오는 머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뜻이지, 도대체……'
만약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였다면, 그저 농으로 듣거나, 홀려들어도 무방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그 대공자가 한 말이다.
그를 직접 본 것은 하루밖에 되질 않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그 대공자가 별생각 없이 말을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
허공에서 떠돌던 그녀의 시야에 구석에 놓아둔 식사용 상이 들어왔다.
대공자와 자신이 식사했던 그 상이었다.
“……음?”
정아는 벌떡 일어나 그 상에 놓인 음식들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부터 식사 시간에 보았던 연소현의 행동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다음 떠오른 것은, 정문의 책임자- 연소현에 의해서 연락책이 되어 버린 고수가 해 준 이야기였다.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그녀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후, 자리를 떴다.
* * *
“대공자님, 차와 다과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정아는 조심스럽게 연소현에게 다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천녀도 함께 마시면 되겠사옵니까?”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정아는 자신의 몫까지 준비를 마쳤다.
“차가 준비되었사옵니다.”
“그래.”
연소현은 대답은 했지만, 서책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였다.
정아는 최대한 연소현을 의식하려 하지 않으면서, 우아한 자세로 자신의 차를 마셨다.
훌륭한 향이었다.
그러자 연소현의 손이 더듬더듬 찻잔을 찾더니, 서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아는 이어서 차와 곁들여 다과를 하나씩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확신을 얻었다.
'역시 그랬어.'
대공자, 연소현은 정아가 뭐든 먼저 먹고 나서야, 먹었다.
방금 자신이 식사 상에서 보았던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정아가 식사 중간에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열심히 만들어 놓고 맛도 못 본 요리가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요리는 연소현이 아니라 정아가 만든 음식이었다.
그가 할 일이 없어서 그녀가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슬그머니 나타나 거들었겠는가?
'음독(飮毒)……'
그는 전혀 자신을 믿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그는 자신과 정아의 관계를 그저, 주고받는 것이 확실한 관계로 여기고 있었다.
연소현은 아마 그녀가 먼저 이공자의 서신을 읽었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서신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대신 대공자 자신에게 중요한 서신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보여 줄 일이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연소현은 삼공자와 이공자의 수하가 왜 방문을 한 것인지조차 묻지 않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치닫자,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처럼 말이 새어나왔다.
“……천녀 또한 그저 또 한 명의 불청객이었사옵니다. ”
책장을 넘기던 연소현의 손이 멎었다.
“……그래.”
그러곤 책장이 다시 넘어갔다.
정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고드리는 것이 늦었는데, 삼공자의 삼절무사라는 자 이후에 이공자의 호원집사라는 자가 왔었사옵니다.”
“그래."
“그리고 제가 전부 돌려보냈사옵니다. 대공자님이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고, 제 임의로 둘러 댔사옵니다.”
“그래.”
정아의 속에 있던 말들이, 그렇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멍청한 년입니다.”
“그래?”
“그렇게 똑똑한 척, 전부 아는 척을 해 왔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모르고 있었지요.”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하지만 정아는 그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저 이제까지 살아남는 것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섬기는 분이 없는 접객당에서 오랜 시간을 일해 왔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그 시작은 제가 이 낙양검가에 팔려 오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녀가 낙양검가에 처음 왔을 때 부터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책장 넘기는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정아는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어느새 이공자와 삼공자의 이야기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해서 이공자와 삼공자가 저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별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렇게 이야기는 이공자와 삼공자 사이에 정아를 두고 자존심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 그 싸움이 격화되기 시작한 것, 결국 집사부장의 도움을 받아 원각정에 오게 된 것까지 이어졌다.
집사부장과 나눈 대화에 대해서도 모두 털어놓았다.
자신이 어떤 생각과 판단으로 연소현을 찾았는지도 소상히 떠들었다.
오늘 이공자와 삼공자의 수하들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지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마쳤다.
“……대공자님.”
“그래.”
어느 사인가, 연소현은 서책을 놓고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연소현의 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천녀가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하겠다고 하면, 받아 주시겠사옵니까?”
지금까지처럼 '그래' 혹은 '응'이 라고, 그렇게 간단히 답을 해 주길 원했다.
“……흐음.”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달리, 연소현의 입에서는 쉬이 대답이 홀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연소현은 낙담한 기색의 정아에게 역으로 물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내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느냐?”
정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옵니다.”
하지만 연소현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음을 또 하나 더 추가했다.
“내 아버지에 대해서 아느냐?”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었다.
“태상가주님이시지 않습니까? 지금은 병환(病患)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며, 침상에서 모든 대소사(大小事)를 처리하신다고……."
대공자의 아버지가 가주가 아니라 태상가주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가주는 태상으로 물러섰고, 현재 낙양검가의 가주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때 정아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튀었다.
“설마……?!"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환이 아니야. 아버지는 음독으로 인해서, 의식불명 상태가 된지 오래다.”
“그런......?!"
정아의 눈에 연소현이 팽개쳐 놓은 의학 서적이 들어왔다.
“대소사는커녕, 의식도 없다. 지금 낙양검가는 사실상 최상위 결정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지.”
"......."
정아는 갑자기 알게 된 어마어마한 비사에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는 것만으로 죽어야 하는, 낙양검가에서도 극소수의 인원에게만 아는 것이 허가된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난 그렇게 어려서부터 원각정안에서, 마실 것들과 먹을 것들을 해결해 왔었다.”
"......."
엄청난 넓이를 자랑하며, 절진(絶陳)에 의해서 어느 절기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원각정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음독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을 것 같으냐?”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겠사옵니다.”
연소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내가 의술과 약학에서 성취를 이룬 다음부터는 음독 정도는 의미도 없었지만,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말이지.”
게다가 이제 그는 천고의 마물, 제암진천경의 연자이기까지 했다.
그는 천천히 식어 버린 차를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도 다른 이가 입을 댄것만 먹고 있다는 것도, 사실 네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몰랐구나.”
"......."
그는 손바닥 위에서 비어 버린 찻잔을 굴리며 물었다.
“방금 네게 말해 준 것은, 이 낙양검가가 품고 있는 어둠의 편린(片鱗)에 불과하다. 그래도 나를 섬기겠다고?”
정아는 떨려 오는 손을, 반대 손으로 억누르며 대답했다.
“……주인으로 섬길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여전히 연소현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소매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어 들었다.
“이것을 보아라.”
정아는 그 서신을 공손히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펴 보았다.
그 내용을 보는 순간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서류는 다름 아닌 집사부장이 연소현에게 보낸 일종의 보고서였다.
거기엔 정아에 대해서 집사부장이 파악하고 있는 모든 사항이 기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녀 스스로는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까지도 거론되어 있었는데, 단지 사실들만 기재되어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뒤로 넘어가면, 그가 정아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내용까지도 있었다.
“마지막 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아라.”
정아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장을 펼쳤다.
“……따라서 이 아이가 상기의 사실을 모두 솔직히 고백한다면, 거두어 마소(馬牛)처럼 부려 주시고.”
정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만일 타고난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대공자님과 거래를 하려고 든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조용히 죽여 없애어, 다른 공자들에게 대공자님의 평안함이 위협받을 일이 없도록 하시길 권합니다.”
그녀의 손에서 서류 뭉치가 툭하고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