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편 불청객(不請客)
“이제부터 네가 정문 연락책이다. 이제부터 무기한 정문에서 대기하도록.”
“예?!”
정체불명의 고수가 고개를 쳐들고 연소현을 바라봤다.
“정문에는 이전 연락 하인들이 사용하던 시설이 있으니, 숙소로 써라.”
연소현은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접근 권한은 거주지를 제외한 곳까지다. 잊지 말도록.”
그의 말은 그를 공식적으로 심부름꾼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 였다.
“대, 대공자님?”
그것도 정문 앞에서 무한정 대기 해야 하는.
“왜?”
연소현은 정체불명의 고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싫으면 이번에도 네 마음대로 해 보든가.”
"......."
그것은 '한낱 고수'에 불과한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말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은 없었다.
“……대공자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공자는 대답도 해 주지 않고, 정아 쪽을 바라보았다.
“넌 아직도 거기 서서 뭐 하느냐?”
“다녀오겠습니다, 대공자님.”
그녀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몸을 깊이 숙여 인사를 올리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 * *
“여기는 손님이 찾아왔는데, 뭐 대접이 이따위야?!”
힘 좀 쓴다는 장정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큰 장사(壯士)가, 정아를 보자마자 외친 말이었다.
정아는 자신의 '눈'으로 상대를 읽어 들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아라고 합니다.”
삼절무사는 그런 정아의 인사 따윈 받아 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안으로 안내해라. 네 주인을 만나 봐야겠다.”
'……정신 나간 놈.’
정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주변의 경비대원들은 그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뿐, 조금도 도와줄 의사가 없음이 명백했다.
“대공자께서는 출입을 허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뭔......?!”
정아는 의도적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저에게 용건이 있으시다면, 이곳에서 말씀하시지요.”
나긋하게 눈을 깔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도 없었다.
그것은 접객원의 손님들에게 빙화라고 불렸던, 그 당당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당연히 '도발'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에, 삼절무사는 폭발했다.
“이 정신 나간 계집이……?!”
그가 정문으로 한 걸음,
정문의 경계석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
“정지.”
칼을 뽑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정문을 지키던 경비대원-의 복장을 한 고수들이 치켜든 칼날이 일제히 삼절무사를 겨누고 있었다.
“어, 어?”
삼절무사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에서 머리를 감싸 쥐 고 있던 경비조장(이자 연소현의 연락책이 되어 버린)이 한숨을 쉬며 경고했다.
“이곳은 특급 통제 구역이다. 이곳을 임의로 통과하려면, 종 1급 이상의 보안 허가가 있든가……"
그는 신경질을 감추지 않고 이를 드러냈다.
“……X발, 어쨌든 너는 해당 사항 없으니까, 깝치지 마라.”
그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경고는 이걸로 끝이다.”
“아, 알겠소.”
삼절무사는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그러자 경비대원들은 다시 칼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서 구경꾼으로 돌아갔다.
경비조장은 아예 문짝에 기대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흠, 흠."
안으로 들어오지만 않으면, 상관치 않겠다는 그 태도에 삼절무사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정아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너는 나와 함께 삼공자님께 가야 한다.”
난폭한 요청 사항이었지만, 그 기세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정아는 고개도 까딱하지 않고, 그의 말을 거절했다.
“제 거취는 삼공자께서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삼절무사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그건 네 알 바 아니지. 종년 주제에 이것저것 따지고 드느냐?”
모멸적인 말이었지만, 정아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답했다.
“저는 본가의 법도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됐고, 삼공자님께서 오라 하면 오는 것이 법도다. 당장 가자.”
그는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고, 정아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섰다.
“이 계집년이……?!”
정아가 물러서자, 그는 발을 안으로 딛지 않고는 그녀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제 이름은 정아입니다만.”
그는 울컥하여, 발가락을 움찔거렸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이면, 저 잘난 척하는 계집의 모가지를 틀어쥘 수 있었다.
하지만 재밌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정체불명의 고수들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공자님 앞에서도 그리 잘난 척을 할 수 있을지, 내 반드시 그 꼴을 볼 것이다.”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까지 몸뚱이 처신을 잘하는 것이 좋을 게다. 삼공자님께서는 남이 썼던 물건을 사용하시는 걸 싫어하시니까.”
정아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 다.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바닥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정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삼절무사가 뿜어 대는 기세는 사납기 짝이 없어서, 내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일반인이 버텨 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끝까지 꼿꼿이 서서 버텼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또 다른 손님이 정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터였다.
“흥.”
“헹.”
삼절무사와 마주친 중년인은 나지막하게 코웃음을 쳤고, 삼절무사는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만 보아도, 그 중년인이 어디서부터 온 인물인지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본인은 이공자님의 호원(湖圓)을 책임지고 있는 집사다.”
"대공자님을 모시는 시녀, 정아가 호원의 집사님을 뵙습니다.”
그는 부채를 펼쳐 들고(한겨울 에!), 그 부채 너머로 정아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맹랑한 것. 너와는 할 말이 없으니, 어서 네 주인께 안내해라.”
“죄송합니다만, 대공자님께서는 손님을 받지 않고 계십니다.”
“뭣......?!”
부채를 쥔 그의 손에 힘줄이 솟았다.
“지금 본 집사가 이공자님을 대신해서 온 것을 알고도 지껄이는 것이냐?”
정아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채 너머 호원집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문을 벗어나지 않고 서 있는 정아의 모습과 태도에서, 그는 몇 마디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파악했다.
“……맹랑한 줄만 알았는데, 염치도 없는 계집이로고.”
노기(怒氣)를 띤 나직한 읊조림에 정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경비조장에게 인사했다.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말투에서부터 그가 이들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공 한 줌 없었지만, 집사 자리를 딱지치기로 얻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고 할까.
“혹여 이 아이가 말한 것처럼, 대공자께서 방문객을 받지 않고 계신 것이 확실합니까?”
그의 물음에 맨 앞에 있던 경비대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어허, 그렇습니까? 혹시 아는 분이 계십니까?”
그 짧은 순간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경비조장의 시선이 정아에게 잠깐 머물렀다.
정아는 그 시선에 잠시 움찔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허, 다들 아시는 분이 없다면 어쩔 수 없군요.”
호원집사는 품에서 서신을 하나 꺼내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서신의 겉봉투에는 이공자의 인장 봉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저는 이공자님의 서신을 책임지고 전달해야만 하는 책임을 지고있는 자로서 부득이하게…….”
그때 짧은 한숨과 함께 경비조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자께서는 손님을 받지 않고 계시오.”
호원집사의 기다란 눈썹이 꿈틀 거렸다.
“……그렇습니까?”
경비조장은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이 본인부터가 방금 그 문제로 문책(問責)을 당하고 나오는 길이오.”
“어허……"
호원집사는 가느다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곤란하게 되었군.”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혀를 찼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정아는 그가 내민 이공자의 서신을 받아 들려 했다.
하지만 호원집사는 서신을 쥔 손을 놓지 않고, 경비조장을 바라봤다.
“혹여 이 아이가 서신을 잘 전달 하는지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까?”
경비조장은 조금도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소.”
그때야 손에서 힘을 풀고 정아가 서신을 갈무리하는 것을 허락한 호원집사였다.
“……잘 기억해 두도록 하여라.”
그는 독사 같은 눈초리로 정아를 내려다보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네가 작은 머리통을 굴려 무슨 생각을 하든지, 결국 이공자님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경비대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려 멀어졌다.
“호원집사님,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습니다.”
정아의 인사에 돌아오는 것은 코 웃음뿐이었다.
곧 그가 충분히 멀어지자, 경비대원 중 하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재수 없는 놈들이네.”
“그러게.”
그러고는 정아에게 다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린 아가씨가 대단한 기백이군.”
“음음. 사정은 모르지만, 그 당당한 모습을 보니 대견하구먼.”
경비대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아는 오히려 그것을 좋은 결과라 여겼다.
그들은 거짓된 경비대원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본래 신분으로 진솔하게 그녀를 인정해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잠시 인사를 주고받은 정아는 몸이 떨려 오는 것을 숨기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잠깐."
그것은 다름 아닌, 경비조장이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숲길까지 그녀를 따라온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대공자께서는 방문을 금지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지. 그렇지 않소?”
정아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직접 명하신 것은 아니시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는 손을 내저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그대의 대공자에게 좋은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없소.”
"......."
“그래도 이렇게 말을 해 주려는 것은, 그저 내 딸뻘인 아이가 난처한 상황에 있는 것이 영 눈에 밟혀서 하는 말일 뿐이오.”
정아는 고개를 조아렸다.
“새겨듣겠습니다.”
그는 잠깐 한숨을 쉬며, 자신의 넓은 오지랖을 탓하더니, 결국 말을 이었다.
“대공자는 그대를 보호해 줄 수 있지만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 말에 정아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는 일개 시녀일 뿐이옵니다.”
그는 손을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내 말의 의미는 그대가 짐작하는 것과 다르오.”
그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긁으 며 말했다.
“내 인생 전체를 칼과 함께하다 보니, 말재주가 터무니없이 부족하오. 하지만 무사로 살다 보니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지.”
그의 시선이 정아에게 향했다.
“그대는 대공자에게 충성을 바치 려고 하는 것이오? 아니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오? 아까 그대가 대공자의 생각을 넘겨짚는 것을 볼 때, 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정아의 몸이 그 자리에 굳었다.
“대공자는 말 한마디로 그들을 물릴 수 있었소.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겠소?”
그녀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경비조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나는 돌아가 보겠소.”
그때야 정신을 차린 정아가 그에게 급히 물었다.
“제가 서신을 전달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그는 이미 돌아서서 정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니, 아니. 그건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 대공자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해야 해서.”
그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정아는, 쉬이 그 발걸음을 옮기질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경비조장이 남긴 말이 떠나질 않았다.
'그대는 대공자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 것이오? 아니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