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지붕
정아는 항상 일어나던 그 시각에 정확히 눈을 떴다.
'눈'의 영향으로 짐작할 뿐이지만, 그녀는 시각을 감지하는 능력 또한 비상하게 뛰어났다.
잠자리는 편했다.
접객당의 시녀 숙소처럼 야간조들이 들락거리지도 않았고, 수시로 순찰하는 경비조장도 없었다.
게다가 방은 또 얼마나 넓고, 시설은 훌륭한지.
평소에 연소현이 얼마나 밑의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 주었었는지, 숙소만 보아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었다.
딱 한 번 악몽 때문에 깨긴 했지만, 별일은 아니었다.
어제 숲에서 기절하기 전에 느꼈던, 그 끔찍한 감각을 다시 느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아직 결계라 불리는 진법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못한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몸을 쉬질 않고 움직였다.
어제 대공자의 식사량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서둘러서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 * *
그녀가 이 대공자란 인물과 이곳 원각정이란 장소에 대해, 만 하루도 되지 않아 파악한 사항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첫 번째.
대공자는 격식을 부수는 기행을 즐겼다.
“자 자,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해 보자고.”
“대, 대공자님……?!”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대공자는 직접 수확한 채소들을 옆구리에 끼고 부엌에 들이닥쳤다.
그러고는 아침 준비를 거든다고 설쳐 댔다.
물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부엌일에 익숙해서,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는 까마득한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 이가 옆에서 왔다 갔다 하면, 신경 줄이 닳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도 겸상하란 말씀입니까?”
대공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오늘도'가 아니라, 계속이다. 앞으로도 계속.”
"......."
“자 자. 멍하게 서 있지 말고 이 조림이나 맛봐라. 내 솜씨긴 하지만 기가 막히게 잘됐다.”
두 번째.
대공자의 침소가 있는 2층짜리 본채는 위험하다.
“대공자님, 정아이옵니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녀는 본채에 들어가기에 앞서, 큰 소리로 고했다.
곧 연소현이 안쪽에서 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거기 입구에 두고 가. 내가 좀 이따 가져가도록 하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정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본채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
그리고 본채에 들어가자마자, 그냥 돌아 나왔다.
“……여기 입구에 두고 가겠습니다.”
“그래.”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발견한 것은 바닥에 방치되어 있는 죽간들이 었다.
제목을 흘긋 보았었는데, 무공서가 분명했다.
죽간(竹簡)에 기록된 무공서라니.
분명 엄청나게 오래된 무공서가 분명했고, 그렇다면 상상하기 힘든 가치를 가졌으리라.
그뿐만 아니었다.
그 외에도 그녀가 무가(武家)에서 일하며 최소 한 번쯤은 들어 보았던 유명한 무공비급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마 내용을 조금이라도 엿본다면, 그날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 뻔했다.
운이 좋으면,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리는 선에서 끝날지 모른다.
'분명 어제는 이렇게까지 위험한 서적들이 굴러다니진 않았는데......."
아마 오늘의 대공자의 관심사가 무공인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세 번째.
그 세 번째가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공자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말 조금도, 약간도,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개인사에 대한 것도, 그녀의 생각이나 의견도, 심지어는 기본적인 성적 호기심조차 보이질 않았다.
앞의 두 가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호기심을 보이질 않는 것은 대단히 의외였다.
은밀한 접대는 모두 철저히 엄선 되고 검증된 외주에 맡기는 낙양검가다.
그래서 오히려 아름답기 짝이 없는 이들로 이루어진 접객당의 여인들은 과할 정도로 관심을 받는다.
그리고 그중에서 '꽃(빙화)'이라고 불릴 정도의 미모를 가진 정아였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 평생을 남자들의 시선과 함께해 왔고, 그만큼 시선을 무시하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이 대공자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는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가 자신의 '눈'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기이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사각에서의 시선을 못 느끼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보아도 명백히 그녀 에게 관심이 없었다.
원각정을 돌아다니다가 춘화(春畫)나 도색 서적 따위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그 광경도 충격적이긴 했다)을 보지 못했다면, 그의 성적 취향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 책 재밌네.”
점심을 먹는 지금도 그는 도색서적 하나를 읽으며 낄낄거리는 중 이었다.
“……예, 대공자님.”
정아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며, 밥상에 집중했다.
’……정말 혼란스럽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대공자가 자신의 몸에 관심이 없는 것에 한편으로 안심했지만, 꼭 그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밀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지를 내어 주고야 마는 처녀의 방심(芳心)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생존(生存)에 대한 문제였다.
그녀가 애초에 이공자나 삼공자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종년의 하찮은 청백지신(淸白之身) 따위를 보호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흥미로 여인을 손에 쥐었다가, 부서지면 내버리는것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그것이 고약한 성적 취향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에 너무나 심취하여 손에 닿는 여인들을 전부 물건 이하로 보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손에 쥔 여인들은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녀들이 단지 더 좋은 배속으로 옮겨 간 것으로 알고들 있다.
그러나 집사부장을 통해 내막을 들었던 그녀는 절대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애초에 원각정에 올 때부터 각오를 다지고 왔다.
대공자가 기대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안겨 안전을 보장 받는 것도 훌륭한 선택지였다.
그러나 애초에 그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그녀 개인에도 관심이 없다면…….
과연 자신은 지금 대공자의 지붕 아래 들어와 있는 것이 맞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저기, 대공자님.”
원각정의 운치 좋은 누각에서의 점심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비대원의 복장을 한 이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어제 정아가 보았던 원각정 출입구의 '고수들' 중에 조장급으로 보였던 이였다.
“대공자께서는 지금 식사 중이십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아, 그게 손님이 찾아와서 말입니다.”
그는 명백히 귀찮은 티를 내고 있었다.
그가 지금 자신의 진짜 신분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무례했다.
심지어 지금 정아가 대공자께서 식사 중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개의치도 않는 모양이었다.
지적하고 싶은 것들이 목구멍 끝까지 솟아올랐지만, 아직은 이곳에서는 신입에 불과한 정아였다.
그녀는 꾹 하고 눌러 참고, 물었다.
“……누가 찾아왔다는 말입니까?”
눈에 보이게 한숨을 내쉰 경비조장이 대답했다.
“뭐라더라? 본가의 삼절무사(三絶武士)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삼절무사라니……!'
정아는 그 대답에 아연함을 느꼈다.
낙양검가에 크고 작은 무력 집단이 대단히 많았지만, 그중에서 절(絶)이라는 단위로 등급을 구별하는 집단은 하나밖에 없었다.
'삼공자 직속의 무력 집단!,
정아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삼절무사가 대공자께 무슨 용건입니까?”
“아니, 대공자님이 아니라…….”
경비조장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뭐, 어제 온 시녀를 불러오라나 뭐라나……"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정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연소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도색 서적을 보며, 밥술을 뜨는 중이었다.
정아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 했다.
일단은 무슨 용건이든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다행히 이곳은 아무나 출입을 할 수 없는 원각정이기에, 그것을 이용할 여지가 충분했다.
“……제가 그 시녀입니다만. 삼절무사가 어찌 대공자님의 시녀를 함부로 오라 가라 한답니까?”
맞는 말이었다.
정확히 따진다면야 당연히 삼절무사가 시녀 따위보다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 시녀가 대공자의 시녀라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진다.
그녀의 말에 경비조장이 한숨을 푸욱, 하고 쉬었다.
“아니, 저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삼공자님의 명을 받고 왔다고 그러는데, 그저 제 판단으로 안 된다고 끊을 수도 없고……"
정아는 '삼공자의 명'이라는 말에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저는 대공자님의 시녀입니다. 삼공자의 명을 받고 왔다 하여, 제게 직접 명을 받으라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래도……"
그때 연소현이 탁, 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녀와라.”
그것은 대공자의 지붕 아래에 그녀가 들어가지 못했음을 결정짓는 말이었다.
“……대공자님?”
연소현은 여전히 시선을 도색 서적에 둔 채 말을 이었다.
“시끄러우니까, 뭔 용건인지 듣기나 하고 와라.”
정아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버텨 냈다.
'그래. 아무리 삼공자가 안하무인이라 하더라도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나를 당장 데려갈 수는 없어.'
그리고 그 절차를 밟는다고 해도, 자신의 편인 부장집사가 충분히 질질 끌어 줄 터였다.
“……대공자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녀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숨기고 누각에서 내려섰을 때, 뒤에서 연소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정아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 대공자님.”
하지만 대공자의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지 않았다.
“너 말이다, 너.”
그는 젓가락으로 경비조장을 가리 켰다.
“예? 저 말입니까?”
연소현이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누가 이곳에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지?”
그는 순간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그것이……. 원래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연소현이 누각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지독하게도 무심했다.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 되는 걸 알면서 들어왔다?”
“아, 아. 그런 것이 아니오라, 원래 연락 하인이 항상 정문 근처에 있었습니다만, 어제 일 이후로......."
연소현의 눈동자는 미동도 없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냥 네 맘대로 들어와도 된다?”
“아, 아니옵니다!”
그것은 어제 정아도 느낀 적이 있었던, 연소현의 위압감이었다.
그가 이어서 몇 마디를 더 몰아쳤다.
사람을 차근차근 궁지로 몰아넣는 화법과 이론(異論) 따위는 허락하지도 않는 기세였다.
어느새 그 경비조장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삼절무사는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이 소속 불명의 고수보다 는 훨씬 못한 존재였다.
그런 고수를 연소현은 너무도 쉽게 쩔쩔매며, 사과하게 만들었다.
그런 연소현의 모습에 정아는 말아 쥔 손에 작게 힘을 주었다.
“그래? 그럼 이번만은 용서해 주지. 대신 이제부터 네가 정문 연락책이다. 이제부터 무기한 정문에서 대기하도록.”
머리를 땅에 박고 있던 경비조장이 화들짝 놀랐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