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0화 (10/350)

제10편 전대(前代)

휘파람 소리가 멈추고 찾아온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적막이었다.

형님이라 불리던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휘파람 소리가 들릴 때는 그 소리가 조금이라도 빨리 그쳤으면 했는데, 막상 그 소리가 그치고 나자 적막과 함께 엄청난 초조함이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라면 누군가 발작적으로 사고를 칠지도 몰랐다.

이미 옆의 동생들은 눈알을 뒤룩 뒤룩 굴려가며,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기를 쥐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목청을 돋우었다.

“저희에게 용무가…….”

떨그렁-, 하고 동생 중 하나가 놓친 날붙이가 바닥에 굴렀다.

급히 돌아본 그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기를 놓친 녀석은 단지 그의 목소리에 놀랐던 것뿐이었다.

'제기랄.' 그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급히 닦았다.

그들 무리는 납치면 납치, 인신매매면 인신매매, 청부 살인이면 청부 살인, 끼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경험이 풍부했고, 그만큼 인지도도 쌓아 왔다.

그리고 그렇게 나름 이 바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이제까지 절대로 무림인과 연을 맺지 않으려 노력해 왔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무림인이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는 일에는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그의 생존 비결이었다.

동생 놈이 비척거리며 무기를 다시 주워드는 것을 확인한 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에게 용무가 있으시다면, 부디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최대한 공손하게 보이려 맞잡은 두 손이 부들거리며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상대한 적은 없지만, 이제까지고 몇 번이나 무림인을 봤었다.

그들이 속한 조직에서도 살기를 풀풀 풍기며 위압감을 떨치고 다니는 흑도 무림인들을 볼 때면 얼마나 간담이 서늘하던가.

하지만 지금만큼 끔찍한 긴장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무림인을 직접 상대하는 느낌은 이런 것인가?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지금 자신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

그의 상념이 끊겼다.

뒷골목 저편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휘적휘적한 걸음걸이는 묘하게 여유가 넘쳐흘러 보였다.

서생의 복색인 것 같았지만, 어둠이 짙은 탓에 자세한 용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용모에 대해서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귀, 귀신(鬼神)?!”

귀화(鬼火)라는 말이 있다.

원래 도깨비놀음에서 주로 언급되는 허공의 불덩이 따위를 일컫는데, 원한이 가득한 눈초리를 뜻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눈초리를 자주 접해 왔다.

어미에게서 아이를 빼앗을 때, 정인을 눈앞에서 살해했을 때, 대가 강한 여인을 '처리'할 때.

하지만 그때의 귀화는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말이다.

절대로.

'실제로 안와(眼窩)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동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 앉아 버렸다.

그는 어떻게든 버터 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휘적휘적 다가와 그들을 보며 활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을 때,

선 채로 오줌을 싸 버리고 말았다.

“하하하. 그래, 여기였구나.”

그 입에는 톱날과 같이 날카로운 짐승의 이가 가득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 * *

“음?”

연소현은 눈을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객잔을 나선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 이후로는 맛있는 향기를 맡았고…….

그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하 무덤인가?”

높이를 알 수 없는 천장에서 희미하게 내려오는 몇 줄기의 빛만이 비추는 공간은, 석관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뚜껑이 없는 그 석관 하나마다 한 구씩 시신들이 들어 있었는데, 시체마다 썩은 정도가 다 달랐다.

그리고…….

“우어어어……."

“으어어어……!"

그 시신들은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연소현은 휘적휘적 석관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신들을 만져 보거나 하면서 흥미를 보였다.

“흐음……"

그 태연함이라니.

“역시, 네놈은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틀림없구나. 클클.”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연소현은 별달리 놀라지도 않 았다.

그것은 이미 담력(膽力)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광기(狂氣)가 아닐까.

“목에 곰팡이라도 핀 목소리십니다, 어르신.”

돌아서자 보이는 건 한 노인이었다.

다 낡아 빠져서 원래 무슨 복식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넝마를 걸친 노인이었다.

그는 연소현의 말에 허리를 젖혀가며, 광소를 터트렸다.

“정확하구나!”

미친놈처럼 웃어 대는 노인의 입안은 썩어 비틀어져 있었는데, 과연 목구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곰팡이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기괴한 광경에도 연소현은 혀를 작게 찰 뿐이었다.

“구강 청결에 그렇게 신경을 안쓰니, 이빨이 하나도 남아나질 않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의 반응에 노인은 무릎을 꿇고 바닥을 치며 또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놈이로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제암진천경이 제대로된 물건을 찾았구나!”

그러자 연소현 왈(曰).

“진정한 주인이 마물을 찾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노인은 다시 배를 쥐고, 한바탕 광소를 쏟아 냈다.

눈이고 코고, 입이고 할 것 없이, 고름이 섞인 썩은 체액이 흘러나왔지만,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딴 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노인은 손뼉까지 쳐 가며, 한참을 웃어 대다가 결국 숨이 차 오는지, 헉헉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아이고, 내 이리도 긴 시간동안 온갖 종자란 종자는 모두 봐왔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로다.”

그때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말이다……."

기온이 뚝 하고 떨어졌다.

온갖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질러 대던 시체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천장에서 가늘게 새어 들어오던 빛줄기조차 가늘어지는 것 같았다.

“네놈은 제암진천경에 대해서, 뭘 알고 그리 지껄이는지 궁금하구나.”

연소현은 입을 다물었다.

천고의 마물.

시간을 비틀고,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물건.

인과율(因果律)의 부재(不在).

불합리.

세 신선이 제 피부와 피와 힘줄 로 엮어 낸, 역천(逆天)의 경전(經傳).

자신은 그 마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연소현은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유리알과 같은 눈.

기괴하고, 추악한 외모와 달리, 그 눈은 지극히 차분하고, 청명했다.

광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현인(賢人)의 눈

그 눈을 바라보던 연소현은 정중히 포권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호오.”

그런 연소현의 행동에, 노인은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보통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되는 이들은 이곳에서 두 가지 모습을 보이지.”

첫째 부류는, 오로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힘'뿐이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이들.

그리고 두 번째 부류는, 광기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대화도 하기 힘든 이들.

“그대는 그들과는 다르구나.”

호칭이 '놈'에서 그대'로 변했다.

“제대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어디 특별한 일이겠습니까?”

연소현의 겸양에 노인은 코웃음 을 치고는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말은 이 노부도 해야겠구나. 제암진천경이라……."

그는 눈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노부도 결코 제암진천경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제암진천경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큰소리를 치느냐고, 하던 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연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핵심이군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정확하다.”

노인은 허공에 천천히 손짓해 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마물은 언젠가부터 존재해 왔을 뿐, 사실 그 유래조차 불분명하다.”

그 말에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놈 스스로는 이렇게 떠들지. 고대에 신선들이 있었고, 분노했고, 미쳐서 제 몸을 발라서 만들었느니 뭐라느니.”

노인은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다.”

어째서 입니까?”

노인의 두 눈에서 기광(奇光)이 줄기줄기 치솟았다.

그 순간적으로 가해지는 엄청난 위압감은 연소현조차 뒷걸음을 칠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이 노부도 신선이기 때문이다.”

"......!"

노인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정확히는 신선이었던 것이지.”

그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수그러 들었다.

“……지금은 이리 영락(零落)하여, 먼지보다도 못한 것이 되었지만.”

그 기세는 수그러들었지만, 여파(餘波)가 공기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이 제암진천경이란 마물에 갇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그 억겁의 시간 동안 나는, 이 마물에 대해서 궁리(窮理)하고 궁구(窮究)해 왔네.”

그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하나를 알아내면, 둘이 되어 있고, 내가 둘을 깨달으면, 셋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유리알 같은 눈이 짙은 공허의 빛을 띠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구먼.”

연소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애초에 제암진천경이 그의 시간을 되돌렸던 사건부터,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거 신선이었던 존재를 제 뱃속에 가두고, 억겁의 시간을 연구해도 모르겠다는 답이 아닌 답밖에 나오지 않게 한다는 것은.......

"......."

마치 심연을 엿본 것처럼,

그 아득함에 아찔함을 느낄 정도였다.

“마물이 제 주인을 찾았다라......."

노인은 연소현이 했던 말을 다시 읊조려 보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과거부터, 셀 수도 없이 많은 연자들이 이 마물의 고삐를 쥐고 그 주인이 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그 한 명, 한 명의 연자들 모두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이들이었다.”

연소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입김이 바스러지듯 허공에 흩어졌다.

“그리고 개중에는 나보다도 위대한 이들도 많았지.”

신선 위(位)를 획득한 자보다 위대한 존재.

“그리고 나보다도 그 품은 재능이 뛰어난 이들도 많았다.”

신선이 된 자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존재.

노인의 입가에서 지극히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들 모두가 실패했다. 먹혔지.”

그는 고개를 들고 연소현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서 일말(一抹)의 희망을 보았네.”

연소현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어째서입니까?”

노인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이제야 '입문의례(入門儀禮)'를 마친 몸. 이 기나긴 여정의 시작 지점에서 출발한 것에 불과해.”

그 말에 연소현은 더 묻지 않았다.

애초에 타인에게서 자신의 희망을 찾아야 할 만큼, 그의 자아는 나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입문의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노인은 의외라는 듯이 긴 눈썹을 치켜들었다.

“모르겠는가?”

그의 말에 연소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오기 전에, 자신은 낙양 의 한 객잔을 방문했었고, 뒷골목 을 거닐었으며……,

맛있는 냄새.

그리고…….

연소현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에 노인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연소현에게 달라붙어 조금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소현은 그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광기가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연소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확신을 담아 물었다.

“그대.

먹어 치우지 않았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