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식탐(食貪)
정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소현은 기어코 식사 준비를 거들더니, 결국에는 함께 마무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기행에도 별 다른 감홍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정아는 떨쳐 낼 수 없는 끈적한 위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 눈에서 벗어 나는 거지?’
분명 이 대공자는 자신의 눈앞에 있지만, 자신의 '눈'이 읽어 들이는 정보도 딱 그 정도가 전부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상태인 건지, 다음 행동은 무엇일지.
'눈'은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다.
“자 자.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너도 여기 앉도록 해라.”
“어찌 천것이 대공자님과 겸상을 하겠습니까?”
상을 차릴 때부터 말렸지만, 이 대공자는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정말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어허. 당장 앉으라지 않느냐?”
어차피 결국 주인의 명을 거절하는 선택지는 그녀에게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다음, 눈을 질끈 감고 대공자의 맞은편에 앉는 정아였다.
밖에서 낙양검가의 대공자와 단 둘이서 겸상을 했다고 하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음음. 이 무침이 참 좋구나. 손맛이 있어. 소박하면서도 맛이 잘 배어들었어.”
“……아무것도 아닌 재주에 불과 합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밥이 유난히 잘 넘어갔다.
그러고 보면, 새벽에 미음 한 그릇을 비운 것이 전부였다.
아니면, 이 상 위에 있는 음식들이 원각정에서 직접 재배한 식자재를 이용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진법의 효과로, 원각정 내에서는 이 한겨울에도 초봄 정도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흠. 그러고 보니, 이제는 진법 때문에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냐?”
정아는 입을 가리고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보살펴 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인 듯합니다.”
그러자 흐음, 하고 뭔가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연소현이었다.
“그래. 다행이구나. 가끔 그렇게 기운에 민감한 체질들이 있지. 내공이 없어도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그리고 금안에 가까운 눈동자라……. 흐음.”
"......."
정아의 평상심이 다시 흔들렸다.
'눈'에 대해서는 정아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전부였다.
혹시 자신의 눈에 대해서 대공자가 뭔가 눈치를 챌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혹시나 자신의 천형(天刑)이나 다름없는 눈의 정체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함께 어우러졌다.
그때 눈을 감고 뭔가 생각하던 연소현이 눈을 번쩍 떴다.
“음……!”
".......!"
정아는 초조함을 억눌렀다.
“역시 한 그릇 더 먹는 것이 좋겠구나. 이번에도 고봉밥으로 담아다오.”
“……예, 대공자님.”
결국, 대공자는 그 이후로 밥을 다섯 공기나 더 먹었고, 그동안 그녀의 체질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소한 이야기만 늘어놓았을 뿐.
“……으음. 좀 부족한 느낌인데.”
입맛을 쩝 하고 다시는 대공자.
“……송구합니다. 그럼 밥을 다시 지을까요?”
넉넉하게 지은 밥은 다 떨어졌고, 대공자는 솥에 누룽지까지 말아서 마신 뒤였다.
“아니다. 적당히 부족한 정도가 좋겠지.”
어딜 봐서 적당히 부족한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식후 차에 곁들일 다과를 충분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흠. 차도 좋지만, 지금은 술이 좋겠구나.”
“……예. 안주도 풍부하게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하하. 눈치가 좋구나.”
정아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고 다시금 주방으로 향했다.
대식(大食)하는 주인의 식사 준비는 좀 더 고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찬거리를 심하게 가리거나, 입맛이 까다로운 것보다야 훨씬 나은 것 아니겠는가.
그녀가 물러난 이후, 연소현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분명 자신은 소식(小食)하는 사람이 었다.
쌀밥 반 공기.
절이거나 무친 찬거리 몇 가지.
그리고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이면, 충분히 만족하고도 남았던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 지금도 그는 허기(虛飢)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대식이니 소식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밥 다섯 공기에 한 솥 분량의 누룽지 그리고 온갖 요리에, 국물에…….
이 정도 양이라면 어느 정도 만족감이라도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은 야식을 먹기 직전에 느끼는 출출함 정도였다.
굳이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 면…….
'제암진천경.’
천고의 마물.
세 명의 신선이 자신들의 모든것을 희생하여 엮어 낸 기물 중의 기물.
이 허기는 그 마물로 인해 비롯된 것이 아닐까.
잠시 후, 연소현은 헛웃음을 터 트렸다.
'시간을 거스르고 운명을 뒤트는 마물을 얻은 대가가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이라고?’
게다가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자신은 이 빌어먹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의 적통이다.
밖에서 기근으로 셀 수 없는 백성들이 말라 뒤틀어져 죽어 갈 때도 그는 배가 부를 때까지 먹을 수 있을 터였다.
하루에 소를 한 마리씩 먹어 치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때 그는 듣지 못했다.
그의 아랫배, 단전(丹田)에서 키득거리며 웃는 작고 불길한 소리를.
그리고 그는 장정 대여섯 명이 먹을 양의 안주를 전부 먹어 치웠다.
* * *
“이런……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연소현은 잠이 들 수 없었다.
허기가 다시 찾아온 까닭이었다.
"......."
그는 정아를 다시 부르려다 그만 두었다.
아무리 그가 여러 가지로 정아를 골려 주고 있는 참이라지만, 대식가를 넘어서 아귀(餓鬼)처럼 보이 는 것은 사절이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 허기에는 틀림없이 무슨 연유가 있어 보였다.
몇 가지 가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허기를 달래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이전의 그는 가슴이 답답하여 잠자리에 들지 못할 때면, 낙양 밤거리를 헤매곤 했었다.
중원국(中原國) 최대 도시 중 하나인 낙양의 주점가들은 밤새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니, 허기를 달래는 정도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이대로 조용히 본가를 빠져나가면, 몇몇 호위들이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따라붙으리라.
내공 한 줌 없던 이전의 자신이 감히 가문의 눈을 속일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렇게 나갈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누군가가, 아니 무엇인가가 부른 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반사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한 걸음을 내디뎠다.
“......?!"
그리고 그는 거대한 침엽수 꼭대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각정의 진법을 이루고 있는 침엽수 중에 가장 높고, 오래된 나무였다.
“이게 무슨……?"
그때 그가 서 있던 나뭇가지가 작게 휘청였다.
작은 아이가 매달려도 부러질 연약하고 얇은 가지였지만, 어째서인지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작게 휘청일 뿐 아닌가.
게다가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아찔함을 느낄 법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마음은 평안함 그 자체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이 높은 나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인지, 자신이 지금 무슨 재주로 이렇게 여린 가지 위에 서 있는 것인지 하는 일 따위는 사라졌다.
그저 '할 수 있다'라는 묘한 자신감이 들었을 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이 아니라,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속삭였던 것도 같았다.
[……연자여, 그대는 할 수 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다.”
그렇게 연소현은 나뭇가지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검가의 높디높은 전각의 기와를 밟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불현듯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 것이군.”
연소현은 느꼈다.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이것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동 하는 것.
전설 속의 축지(縮地)와 같이 공간을 접는 것일까.
아니면 어딘가 통로 같은 것을 통과한 것일까.
그의 몸에서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마기(魔氣)가 진득하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마기 속에서 살고 마기 속에서 숨 쉬는 존재들에게만 허락된,
뒤틀린 선경(仙境)의 기술.
제암진천경의 연자를 위한 단 하나의 신법(身法) 아닌 신법.
[암류화(暗流化)]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던 기왓장 위에는 더는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저 작게 소용돌이치다가 바람과 함께 흩어져 버린 미약한 마기만이 그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줄 뿐.
* * *
낙양의 한 객잔.
음식이 맛있기로는 소문이 알음알음으로 퍼져 있어, 단골도 많을뿐더러, 풍문(風聞)을 듣고 찾는 식도락가들도 많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며 잔뼈가 굵은 점소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기이한 체험을 하는 중이었다.
평소, 자신이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산전수전 모두 겪어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이미 일이 자신의 손을 떠났음을 직감하고, 후다닥 뛰어 선배를 찾았다.
"뭐라?!"
어린 점소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배는 자신이 직접 봐야 믿을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층계에서 어린 점소이의 떨리는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본 그는 기절초풍했다.
애초에 음식으로 유명한 객잔이라 이 야밤에도 술이 아니라 식사를 위한 손님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 객잔에서 대식(大食)을 인생의 낙으로 살아가는 식도락가들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대식으로 그가 놀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 왔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점소이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째서 이 층에만 손님이 이렇게 적은 거지?’
손님들은 '그 탁자'를 중심으로 최대한 먼 곳에만 몇몇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들마저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대식을 하는 식도락가는 주변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었다.
그릇이 추가될 때마다 환호하는 사람도 있고,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혀를 차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같은 경우를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조화지?’
그렇게 그쪽을 바라보길 잠시.
그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허억......!"
그리고 옆을 바라보자, 어린 점소이 또한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구르듯이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아니, 실제로 일 층에서는 굴렀다.
“어이! 무슨 일 있어?!”
풍채 좋기로는 남에게 꿀리지 않는 덩치의 주인장이 성큼성큼 점소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인 어르신……! 주인 어르신……!"
점소이는 허겁지겁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낮게 외쳤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하듯이.
“아귀(餓鬼)입니다요……! 지옥의 아귀가 나타났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