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대면(對面)
연소현은 자신의 침소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는 정아를 내려다보았다.
내공 한 줌 없으면서, 결계(結界)급 진법을 파악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어두운 영역'을 엿보기까지한 여인이었다.
'그 황금빛으로 빛나던 두 눈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잠시 두 눈을 감고, 이전의 삶을 돌이켜 보던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렇구나. 네가 바로 '그 여인'이었구나.”
그와 그녀는 직접 마주했던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기억하던 외모와 너무 달라 단박에 떠올리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네가 어찌 이 가문의 사람이었단 말이냐……"
그의 손에는 정아가 가져왔던 집사부장의 지령서가 들려 있었다.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구나.”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흘러내려 온 정아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참으로 기이하기도 한 것이 운명이구나.”
그가 한 일이라고는 단지 오전에 아랫것들을 쫓아낸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결과 단 반나절 만에 이전의 삶에서는 직접 대면했던 적도 없었던 이가, 난데없이 자신의 시녀가 되어 나타났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의 발생.
그렇기에 그에게도 여전히 세상사가 흥미로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소를 나섰다.
그녀의 눈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마기를 완벽하게 감출 방법부터 찾아야 했다.
감출 뿐 아니라 제어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아마도 반나절.
늦어도 한나절이면 충분할 터였다.
마기를 완벽히 감추는 정도의 심법을 적당히 개량하고 만드는 것뿐 인데, 그 이상 시간이 걸릴 필요가 있겠는가?
연소현은 어떤 무학(武學)의 종사(宗師)도 동의하지 않을 생각을 태연하게 하면서, 자신의 서재로 들어섰다.
“……푹 자고 나중에 보자고, 금안마녀 (金眼魔女)."
* * *
기절하기 전의 상황이 마치 그저 악몽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정아는 너무나 가뿐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잠을 푹 자 본 것이 얼마만인지.
낙양검가도 잊고, 이공자와 삼공자에 대한 것도 잊고, 마치 어릴적,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초조함도 없이 눈을 떠 본 것이 얼마 만 인지.
자신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주던 이불을 밀어내고 일어나자, 마침 머리맡에는 찻주전자와 잔이 놓여 있었다.
식은 물에 우러난 차를 향과 함께 들이켜자,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검가의 접객원에서 일하며, 무수한 고급 차를 마셔 보았던 그녀지만, 지금 처음 마셔 본 이 찻잎만큼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차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누워 있던 이부자리도, 낡고 손때가 탔지만, 그녀가 한 번도 덮고 자 본 적이 없는 최고급품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던 찻잔도, 이가 조금 나가긴 했지만 귀하기 짝이 없는 청자가 아닌가.
'여기가 어디지……?’
자신이 누워 있는 방은 예스럽고 아담하면서, 높은 기품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족자의 끔찍할 정도로 우아한 글씨와 산과 들을 조각한 향나무 조각, 편안한 향을 뽐내는 말린 꽃잎이 담긴 도기 따위에 정신이 팔렸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문풍지 너머로 강렬한 석양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던 흑단목 차양을 걷어 올리고는 창문을 열었다.
“아……."
그곳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에서 탄성을 자아냈다.
숲으로 둘러싸인 광활한 영역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넓었다.
낙양검가의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은 원각정은 바깥 방향으로 뻗어 있는 자연 그 자체와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연을 품으로 끌어들여, 정원으로 꾸며 놓았다.
너른 초원, 야트막한 언덕, 개울과 늪지. 그리고 연못과 호수까지.
낙조와 함께 어우러진 숨이 막힐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2월.
낙양은 겨울이었는데, 이 원각정은 봄이었다.
넋을 놓고 그 놀라운 풍경에 빠져들었던 그녀의 귀에 묘하게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아름답지?”
그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돌려 놓았다.
“아……!"
마당에서 그녀를 향해 말을 건넨 이는 낡은 무명 백의를 입고 있었다.
“그래. 잠은 푹 잤나?”
그는 그녀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예. 덕분에……."
그는 가녀린 청년의 체형에 부드러운 소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새하얀 피부와 부드러운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기에, 미청년보다는 미소년 쪽이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잘되었구나.”
그러고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내가 올려다보고 이야기하려니 목이 아파서 그런데, 채비를 갖추고 1층으로 내려오도록 하여라.”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휘적휘적 모퉁이를 돌아 가 버렸다.
"아……!"
그리고 그때야 정아는 깨달았다.
방금 그 미소년이 바로, 낙양검가의 대공자이며 무검자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연소현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그의 침소이며, 첫 대면에서 주인을 감히 내려다보며 대화중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 * *
“……그래. 이름이 정아라 하였느냐?”
느긋하게 몸을 기대어 앉은 연소현의 물음에 원래의 침착함을 되찾은 정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그 모습에 연소현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는 꽤 무거웠다.”
물론 그로서는 농담이었다.
제암진천경의 힘을 얻은 그가 여인 한 명 무게가 무거웠을 리는 만무했으니.
“아, 아. 소, 송구스럽습니다.”
그녀는 깨달았다.
원각정에는 지금 하인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기절한 자신을 옮긴 것은 다름 아닌 낙양검가의 대공자였던 것이다.
정아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그 숲에서 난 기절했었지. 처음엔 경비대원 복장을한 고수들을 만나고, 그 끔찍한 진법, 그리고……."
분명히 끔찍한 악몽을 꾸었는데, 일어나고 나니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분명히 무언가를 봤는데, 그게 꿈이었던 걸까……?’
수용 한계를 넘어 버린 충격은 그녀의 기억을 뒤죽박죽으로 섞은 다음에 감당 불가능한 부분을 지워 버렸다.
혼란스러워하는 정아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연소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히 내가 산책 중에 쓰러진 너를 발견할 수 있었구나. 아무리 따뜻한 원각정이라도, 늦게 발견되었으면 큰일을 치를 뻔했어.”
그 말에 정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천것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연소현은 손을 저었다.
“알았으니 일어나거라.”
그러고는 탁자 위의 지령서를 펼쳐 들었다.
하지만 정아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 모시면서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제 목숨을 다하여…….”
“어허, 됐다고 하지 않느냐.”
정아의 말을 끊은 연소현이 지령서 너머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서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고 한 적이 없거늘, 네 마음대로 모시기로 한 것이냐?”
그러고는 지령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면 이 집사부장의 지령서가 대공자인 내게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냐?”
그의 말에 정아의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이제까지 당연히 대공자를 모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천것을 죽여 주시옵소서!”
아니. 분명히 대공자의 면접을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숲에서 기절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꼬여 버린 것이었다.
“어허, 살려 놓았더니, 제멋대로 모신다고 하고, 이제는 죽여 달라는구나.”
정아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연소현은 혀를 끌끌 차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나는 시녀를 달라고 한적도 없었다. 그저 허드렛일을 잘하는 하인이나 하녀가 필요한 것인데……
그의 말에 정아가 급히 대답했다.
“저도 갖은 허드렛일로 대낙양검가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눈에 차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여…….”
“그래?”
흠.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연소현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구나.”
정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검자라는 멸칭에 가렸지만, 대공자는 시서화는 물론 잡기에도 따를 자가 없다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거는 조건은 무엇일까?
“밥은 할 줄 아느냐?”
“예……?"
정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연소현의 얼굴을 바라봤다가, 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밥 말이다, 요리. 요리할 줄 아 느냐?"
세상 진지한 목소리였다.
“분명 할 줄 알긴 하오나, 감히 전문 숙수에 비하자면…….”
당혹스러운 질문에 정아가 떠듬거리면서 대답하자, 연소현이 무릎을 내리쳤다.
“그래서 자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정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자신 있사옵니다!”
“좋아! 합격!”
* * *
정아는 멍하니 작은 아궁이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녀 숙소에서 찾은 허름한 작업복에, 검댕이 묻은 얼굴, 반찬 국물이 흐른 앞치마는 지체 높은 아가씨 같던 정아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오랜만의 부엌일은 얼마나 정신이 없던지.
하지만 뛰어난 기억력과 어디서든 인정받는 일솜씨, 그리고 그녀의 '눈'이 합쳐져, 이젠 아궁이에 올려놓은 쌀밥이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없었어……
그녀는 아궁이의 불꽃에 손을 녹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모든 시작은 숲에서 진법 때문에 혼절하면서부터 였다.
감히 대공자에게 직접 옮겨져 그의 침소에서 깨어나고
그 이후로 이어진 자리에서는 도대체 무슨 추태의 연속이었는지.
돌이켜 보자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낙양검가를 방문했던 기인이사들과 고관대작분들에게 얼음꽃(氷花)이라 불렸을 정도의 자신이 이렇게 쉽게 평상심을 잃어버리다니.
'목에 갑자기 칼이 들어와도, 밖으로는 냉정함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는데……'
기감을 사용할 정도의 고수들도, 정아가 그 기감을 눈치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지 않던가.
그런 자신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휘둘릴 줄이야.
'이게 다 뜬금없이 숲길에서 혼절하는 바람에……'
불 앞에서 손을 비비던 그녀의 행동이 멈췄다.
“……아니야.”
대공자의 침소에서 깨어났을 때, 분명 자신은 더할 나위 없는 개운함을 느꼈고, 정신은 또렷하기 그지 없었다.
비록 앞뒤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진 못했지만, 그것이 이후에 연결되는 상황에서 평상심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공자를 올려다보고 말하게 만든 것도,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지만, 분명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 실수는 다년간 접객원에서 일하면서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과 요령이 충분했다.
그 이후의 대화는 어떠했는가?
고작 대공자가 툭툭 몇 마디의 말을 던져 댔던 것만으로, 신고식을 당하는 신참 하녀처럼 굴지 않았던가.
자신이 당황했던 것들, 실수했던 것들, 그리고 이제야 이전의 상황을 돌아보고 이상함을 느끼는 것.
그 모든 것은 바로…….
’……대공자로부터 비롯됐어.’
첫 만남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한 번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화의 흐름을 만들었고, 빙화라 불릴 정도로 평상심이 뛰어난 자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사람이 무검자라고……?’
당장 오늘 오전에 하인들이 너무 방만하게 굴어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이라고?
정아의 머릿속에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연소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푹신하고 넓은 의자에 느긋하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자세로 기대어 앉아 있던 그의 모습.
그리고 입가의 미소와는 달리 그 끝도 없이 무심해 보였던 눈빛.
그 모습은 무검자 따위가 아니라 마치…….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내달렸다.
“밥은 아직 멀었나?”
“꺄악!”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정아는 놀라서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미안. 내가 놀라게 했나 보네.”
문가에 서서 미안하다는 듯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공자를 향해, 정아는 그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때야 깨달았다.
'눈'이 그에게서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