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조우(遭遇)
정아는 '뒷길'을 통해 대공자의 거처인 원각정을 향해 발길을 재촉 하고 있었다.
뒷길이란, 신분이나 지위가 낮은 이들을 위한 길을 의미했다.
곡식 포대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 행렬에서부터, 삼삼오오 모여 이동하며 수다를 떠는 시비들, 궤짝을 매고 급히 움직이는 힘 좋아 보이는 사내들까지.
소리 높여 홍정하는 상인들이나 무수한 걸인들이 없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밖의 저잣거리와 다를바가 하나도 없었다.
목적을 가지고 바쁘게 움직이는 이 무수한 이들의 행렬은, 낙양검가라는 거인의 핏줄이라고 할 만했다.
정아는 장포를 뒤집어쓰고, 담벼락 아래의 그늘을 통해 걷는 중이었다.
“어이, 저기 좀 보게. 엄청 예쁜데?”
“예끼, 이 사람아. 눈 돌려. 딱 봐도 지체 높은 분 같은데, 괜히 경치지 말고!”
“그, 그건 그렇구먼. 근데 무슨 일로 지체 높은 아가씨가 뒷길로 다니시는 거지?”
“그걸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알아서 뭐 하게?”
“아니, 난 그냥……."
멀리서 하인 두 명이 장포 아래로 엿보이는 그녀의 미모에 대해 떠드는 중이었다.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뒷길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들을 수 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정아의 '눈에 보였다'.
그들의 입술 모양이, 눈알의 굴림이, 작은 몸짓들이, 그들의 대화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정아가 지나쳐 온 모두가 정아의 '눈'을 거쳐 간 뒤였다.
’좋아. 옷을 갈아입는 판단은 나쁘지 않았어. 미행은 없구나.'
이공자나 삼공자가 일개 시녀에 불과한 자신을 감시할 인원을 붙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정아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대공자의 지붕 아래 들어가기 전까지.
봄날의 진달래 씨앗처럼, 바람부는 대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그녀의 미모와 자태를 흘긋거리는 익숙한 시선들을 무시하며, 그녀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그녀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원각정……?’
원각정의 담벼락 아래까지 도착한 정아는 충격을 느꼈다.
낙양검가의 가장 구석에 자리 잡은 대공자만을 위한 공간, 원각정의 거대한 규모에 대해서는 그녀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또 달랐다.
끝이 보이지 않게 양쪽으로 늘어선 담벼락과 그 너머로는 아득히 높게 자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겠어……
그녀의 '눈으로도 감히 규모가 가늠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름 높은 낙양검가에서도 주거용 공간 중에는 한 손에 꼽을 규모가 틀림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조금 전까지 저잣거리를 연상시 켰던 뒷길은, 원각정에 가까워질수록 한산해지더니, 지금에 와서는 놀라울 정도로 적막만이 가득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적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 흔한. 식재료를 짊어진 하인들조차도 보이질 않았다.
정아의 머릿속에 과거 접객당주가 내려 주었던 가르침이 스쳐 지나갔다.
'정아야. 어느 가문이나 마찬가지다. 그 가문의 금력(金力)을 엿보고 싶다면, 그 가문의 뒷길을 보면 된단다.'
그 말에 따르면 이 원각정은 금력이 말라 버린 곳이었다.
’……몰랐던 건 아니잖아.'
마른침을 삼킨 정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담을 따라 걸은 그녀는 정문(正門)으로 향하는 큰길(大路)로 들어섰다.
큰길은 뒷길과 반대로 손님과 무사들을 비롯하여 검가에서 중요한 이들만이 다니는 길이었다.
'정아야. 그 가문의 권력(權力)을 느끼고 싶다면, 그 가문의 정문 앞을 보면 된단다.’
정아는 과거 속 그날,
자신이 검가에 도착했던 날로부터 처음으로, 낙양검가의 큰길에 오가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대공자가 칩거를 했다고해도, 이 정도였을 줄은……'
이제까지 뒤에서 대공자를 험담하는 이들을, 뒤에서 비웃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신이 직접 상황을 보자니, 그들을 마냥 비웃지도 못할 지경이 아닌가.
보이는 것이라고는, 정문 앞에 배치된 경비대원 한 줌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벽에 기대 낮잠이라도 즐기는 중이던 모양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보고, 엉거주춤 자세를 잡는 꼴이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어, 어.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어딜 봐도 잠이 덜 깬 것이 확실한 경비대원의 응대에 정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집사부장님의 명으로 왔습니다.”
그녀는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는 대신 집사부장의 지령서를 내밀었다.
“집사부장님?”
집사부장이라는 말에 뒤에서 몰래 하품을 삼키고 있던 조장이 얼른 앞으로 나서서 지령서를 받아 들었다.
조장이 지령서를 꼼꼼히 확인하는 동안, 정아는 속으로 다시 한번 한숨을 삼켰다.
마차들이 원활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거대한 정문은 관리라고는 전혀 안 되고 있었다.
칠은 벗겨졌고, 군데군데 삭아서 도저히 정아 자신이 아는 검가의 시설물이라고는 믿기가 힘들 정도였다.
자신이 지나왔던 담벼락은 또 어떠 하던가.
높이만 까마득히 높을 뿐, 여기저기 무너졌던 것을 대강 홁 반죽으로 보수한 티가 역력했다.
언제 깨졌는지 추측하기도 힘든 기와들이 태연하게 방치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답답해져 왔다.
’……대공자를 선택한 것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지금 시간에 이공자나 삼공자의 집무실 정문이라면?
휘황찬란한 마차들과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이들이 줄지어 늘어서 출입 허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대문에는 이공자와 삼공자를 따르는 직속 무사들이 은은하게 기세를 흘리며 절도 넘치는 동작으로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근무 시간에 낮잠이나 자는 이런 한심한 경비대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때 정아의 목덜미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마치 칼날 여러 개가 자신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녀가 비명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었다.
과거 그녀가 몇 번이고 느껴 보았던 감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기감(氣感)!’
그랬다.
그것은 내공이 일정 이상 경지에 이른 이들이 뻗어 낸 기파(氣波)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그 기파의 근원은 틀림없이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하던 경비 대원들이었다.
'이자들……! 단순한 경비대원이 아니야! 고수들이다!’
그들은 기파로 그녀의 몸수색을 대신한 것이다.
내공이 있는지.
무기를 숨기고 있는지.
살기를 감추고 있는지.
당연히 보통의 시녀라면 그 기파를 느낄 리가 없으므로, 정아는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 당연한 일이지.'
그녀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리 무시당하는 대공자라 할지라도, 검가의 적통(嫡統)이야.’
그런 이가 기거하는 곳의 정문을 무공도 모르는 일반 경비대원이 지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지령서의 검토를 마친 경비조장(으로 위장한 고수)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령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는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손히 지령서를 돌려주었다.
정아는 떨려 오려는 손끝을 간신히 제어하며, 그 지령서를 받아 품에 넣었다.
“얘들아, 문 열어 드려라.”
정문으로 들어서는 정아의 뒤로 경비조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을 까먹었습니다.”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로 숲길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정아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충분히 그녀가 적당히 멀어진 듯이 보이자, 한 경비대원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원각정의 새 시녀라. 그 무검자한테 새 시녀 같은 게 필요하다고?”
“나도 잘은 모르지만, 시녀는 '바깥일'을 하는 중요한 분들한테 필요한 거 아닌가?”
그러자 다른 경비대원이 손짓으로 정아의 몸매를 그려 보이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검'도 없는 무검자가 그 검은 펄떡거리나 보지, 뭐.”
그리고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시……'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정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느끼기에 검가 내에서 대공자를 향한 경멸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개중에는 역시나 무(武)를 숭상하는 무사들 사이에서 특히나 심했다.
검가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금력과 무력이라면, 대공자는 무검자라는 멸칭과 함께 이미 한쪽을 완전히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감을 사용할 정도의 경지를 이룩한 고수들도, 임무이기에 대공자의 정문을 지킬 뿐.
누구 하나 그에게 충성심을 가진이는 없어 보였다.
’……갈 길이 멀구나.’
만일 대공자가 마음을 새로 먹은것이라는 집사부장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대공자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그리고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이제까지 본 적도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밀도가 높은 진법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숲이야! 이 나무들이, 아니 숲 전체가 진법을 구축하고 있어!’
자신의 '눈'은 너무나 선명하게 진법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가 진법을 '보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볍게는 손님이 접근해서는 안 될 곳에 구축된 길을 잃게 만드는 진법부터, 유사시를 대비한 방어지점마다 갖춰진 살기로 번들거리는 대인(對人) 살상용 진법까지.
하지만 개중 그 무엇도,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진법보다 끔찍한 밀도를 가진 진법은 없었다.
마치 진법 자체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벌레처럼 뭉개어 버릴 것 같았다.
단 하나.
그녀가 따라 걷던 오직 하나의 길을 제외한 모든 영역이, 이 숲 전체가 시꺼멓게 보였다.
'눈'을 가진 그녀로서도 감히 해석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절대로 숲길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녀는 경비조장의 말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깨달았다.
그것은 정문을 지키던 경비대원 복색을 한 고수들처럼.
이 끔찍한 진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지금, 대륙 전체에 맹위(猛威)를 떨치는 이 거대한 가문의 핵심 인물 중 하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무시당하고, 경멸받을지라도.
그는 이 가문의 대공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가 명멸(明滅) 했다.
숲이 보였다가, 진법이 보였고,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대공자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특이한 아이로군.”
숲길의 한가운데 요요히 선 그가 정아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청년의 목소리 같기도 했으며,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마귀의 괴성 같기도 했다.
“어떻게 원각정의 결계(結界)를 보고 있는 거지?”
그는- 그것은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의 눈구멍은 누가 파낸 것처럼 휑하니 뚫려 있었는데, 그 안은 무간지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무저갱으로부터 누런 고름 섞인 피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나를 '보고' 있는 거지?”
그것은 휑한 눈구멍으로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눈'을 가진 그녀는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 봐서는 안 되는 '것' 이었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의식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