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5화 (5/350)

제5편 과거의 편린(片鱗)

대공자 연소현이 하인들을 쫓아낸 후.

'아랫것'이라 칭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있는 내원 집사부는 발칵 뒤집혔다.

책임 소재에 대한 다툼, 어떤 이를 새로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대공자에게 쫓겨난 하인들의 처벌에 관한 결정까지.

격한 갑론을박(甲論N駁)이 이어졌다.

결국엔 대공자가 직접 지목했었던, 집사부장이 나섰다.

지지부진하던 회의를 해산시키자, 겨우 회의실에는 고요함이 돌아올 수 있었다.

“후우…….”

긴 회의용 책상.

모든 이들이 자리를 비웠지만, 가장 상석에 앉은 중년의 집사부장이 흰머리가 가득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결국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대공자의 거처인 원각정에는, 아랫것들을 관리할 인물이 없었다.

게다가 성정이 유한 대공자 아래다.

아랫것들이 언젠가 선을 넘게 될 것을, 대낙양검가의 집사부장인 그가 어찌 몰랐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공자님께서 하인들을 항명이나 밀고로 고발하시지 않으신 건가......"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그저 집 사부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 검가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꼴이 눈에 선했다.

“......으으.”

그는 습관처럼 서랍에 손을 뻗어, 쓰린 위장에 좋다는 말린 약재를 씹었다.

이 넓은 중원 바닥에서 방귀 좀 뀐다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드나드는 곳이 바로 낙양검가의 본가였다.

그런 곳에서 아랫것들을 통솔하는 일이란 언제나 속이 쓰릴 수밖에 없지만, 근래에는 정도를 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낙양검가의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약재를 허용량 이상으로 씹어 삼켰음에도, 고통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지켜보고만 있어도 무탈할 시기는 지난 것이지.”

집사부장의 안색은 훨씬 침착해졌고, 눈빛은 형형(炯炯)하게 빛났다.

마음을 다스린 집사부장은 시녀 하나를 불러 세워 귓속말을 건넸다.

시녀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고 물러나는 모습에서 눈을 돌린 그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잠시 후, 집사부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 명의 시녀를 따뜻한 미소로 맞이했다.

“집사부장님, 천녀 정아가 인사를 올립니다.”

“왔느냐.”

정아라 불린 여인은 한낱 시녀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미모는 대단했다.

그녀가 방에 발을 들여놓자, 그 미모에 일순 실내가 환해진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흑단(黑檀) 같은 긴 머리칼은 곱게 한데 묶어 내렸고, 흠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는 광택이 흐르는 듯했다.

풍부한 속눈썹은 커다랗고 맑은 눈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코는 앙증맞으면서도 오뚝했고, 연지를 살짝 바른 입술은 도톰하니 부풀었다.

그러면서도 그 도톰한 입술이 유혹적으로 느껴지는 대신 침착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역시 그녀의 눈동자였다.

홍채의 색이 옅어, 갈색을 넘어 금색(金色)으로까지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그녀의 미모와 어우러져 일견 이국적이면서 신비로운 매력을 자아냈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깊어, 감히 누구도 그녀를 가벼운 여인으로 여기지 못하게 했다.

“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찌 무탈함을 바랄 수가 있겠느냐. 그래도 건강은 어찌 유지하고 있다.”

“누구에게 물어도 건강이 최선이라 할 것입니다. 소녀, 어르신이 건강하신 것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정아라 불린 여인이 집사부장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올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랫것으로서의 예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법으로도 그녀가 가진 우아한 기품을 가릴 수 없었다.

시녀복으로도 그녀의 미색은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집사부장의 입가에 그런 그녀를 대견해하는 미소가 지어졌다.

정아는 과거 그가 길거리에서 직접 거두어들인 아이였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자식이 없는 자신에게, 그녀는 혈육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정아야.”

“예, 어르신.”

정아는 자신을 불러 놓고 쉽사리 본론을 꺼내지 못하는 집사부장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냑양검가의 고위직인 그가 쉬이 꺼내지 못할 이야기라면, 가벼운 일은 절대 아닐 것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그가 용건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기다릴 뿐이었다.

“……후.”

집사부장은 그 모습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하려고 하는 결정이 과연 옳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당장엔 그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올해, 네 나이가 몇이냐?”

“올해로 스물하나이옵니다.”

과연 꽃다운 나이의 여인이었다.

“내가 너를 귀하게 여기면서도 접객당(接客堂)에 두기만 하고, 네 주인을 찾아 주지 않은 까닭을 아느냐?”

“소녀가 아둔하여 어르신의 깊은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녀가 집사부장의 깊은 속을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낙양검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눈 닫고, 귀 닫고, 입 닫기를 교육받았던 그녀였기에 대답을 피했던 것이었다.

집사부장은 그런 정아의 생각을 읽고 흡족해했다.

“내, 너를 딸처럼 여겼기에 너의 주인을 택하는 것에 신중하고 또 신중하려 했다.”

“어르신의 깊은 마음 씀씀이에 이 소녀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아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집사부장은 그 감사를 받는 대신 그녀를 가까이 불러 앉혔다.

그리고 그는 말을 하는 대신, 붓을 들어 제 뜻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리 누구도 자신의 집무실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엄명을 내려놓 았지만, 오랜 집사 생활로 잔뼈가 굵은 그였다.

고수(高手)가 넘쳐 나는 낙양검가의 한가운데서, 작은 목소리로 떠드는 것은 결코 밀담(密談)이 아니었다.

'둘째 공자는 한 문파의 지배자로서는 어울리나, 지나치게 사리가 분명하고 계산에 능해 냉혹한 성정을 지녔다.’

집사는 잠시 붓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셋째 공자는 무공이 뛰어나 그를 따르는 무인들이 많지만, 성정이 포악하고 욕심이 많아 위험한 인물이다. 넷째 공자는 그래도 가장 사람이 됐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아직 따르는 이들이 적다. 소가주(小家主)라는 자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게지.'

정아는 집사부장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갈겨 가는 내용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랜 세월 낙양검가에 오직 충심으로 봉사해 온 그였다.

하지만 이런 민감한 시기에 공자들을 평가하는 말이 새어 나간다면, 경을 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정아의 놀란 기색에도 집사부장은 붓을 멈추지 않았다.

'본가의 아가씨들은 다들 성격이 좋은 분들이지. 하지만 아가씨들의 시녀는 내원 총관의 담당. 손수 키우신 아이들 가운데서도 고르고 골라 직접 뽑으신다. 내가 감히 추천하고 싶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명가의 여식들의 근처는 철저하게 표백(漂白)하듯, 관리하는 것이 당연했다.

집사부장은 말라 가는 입술을 식어 버린 차로 적셨다.

'당연히 대공자님은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분은 지금 칩거중이시니.'

거기까지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 가던 붓의 움직임이 멈췄다.

한동안 뜸을 들이던 집사부장이 입술을 깨물었고, 그의 붓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는 어째서 대공자께서 무검자(無劍者)라 불리시는지 알고 있느냐?’

정아는 조심스럽게 다른 붓 하나를 쥐었다.

'첫째로는 대공자께서 검을 쥐시지 않고, 무공에 재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그가 차기 가주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주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지금 거의 십 년 가까이 칩거 중이 아니던가.

그 외에도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그녀가 볼 때 신빙할 만한 것 은 없었다.

그녀가 붓을 내려놓자, 집사부장이 붓을 들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이제부터 네게 감춰진 이야기를 해 주도록 하마.'

그의 손끝이 떨려 왔고, 글을 쓰는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의 일 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새어 나가서는 안 될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정아는 더욱더 집중하여 그의 붓 끝을 좇았다.

'본가의 대부분은 대공자께서 무공에 아무런 재능도 없으며, 검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

자신도 모르게 정아의 입이 작게 열렸다.

'나는 대공자가 처음으로 검을 드셨던 그날, 그곳에 있었다.'

그는 그날의 숨겨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분이 처음 검을 잡고,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던 그 모습을.'

그는 식은 차로 바짝 말라 들어가는 입술을 적셨다.

정아는 그의 붓이 다시 움직이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 모습은, 그것은, 이미 경지에 오른, 검호(劍豪)의 모습이었다. 그 분에게서 나오는 기세에 나는 숨도 쉴 수가 없었다.'

"......!"

검호, 검의 달인.

검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이를 칭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호사가들이 쉬이 떠들어대는 몇 갑자니 하는, 내공의 수준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검으로 의(意)와 형(形)을 초월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것을 일컫는 경지였다.

그런데, 처음 검을 쥐는 어린아이를 검호라고 표현하다니.

'나는 당시의 가주님, 그러니까 현재의 태상가주님께 그 일을 함구하라고 명받았다. 어째서인지 그 이후로는 대공자, 그분 스스로께서도 검을 쥐지 않으셨어.’

“......?!”

그것은 정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가 차기 가주로서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평가에 대한 반론이었다.

'대공자님께서 칩거하시기 전까지, 당시 가주님의 최측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대공자님이셨다.'

정아는 머릿속에 천둥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당시 대공자께서 본인의 이름으로 일을 진행했던 것이 그리 많지 않아, 지금은 극소수만이 기억하는 일이지만.'

그의 붓이 쉼 없이 움직였다.

'그분의 이름은 지금도 황궁(皇宮)에서까지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도대체 당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대공자가 무슨 일을 했기에, 황궁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진단 말인가.

정아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스리며, 붓을 들었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가문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될 이야기였다.

집사부장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공자와 삼공자가 이제 본격적으로 너를 내놓으라 하더구나. 둘 사이 경쟁이 붙은 모양이다.’

“……아.”

원래부터 접객원 시녀 중 일화(一花)로 꼽히며, 모든 방문객의 주목을 받던 정아였다.

오죽하면 명문가의 직계자손이 그녀에게 반해, 청혼까지 했던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그것도 당시로서는 큰일이었다.

하지만 현재 가문에서 차기 소가주로 가장 주목받는 두 사람이 그녀를 두고 경쟁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잠시 망연했던 정아는 입술을 깨물고, 붓을 들었다.

'어르신께서는 제가 대공자께 가길 바라시는 것입니까?’

과거의 대공자가 어떤 모습이었든, 지금의 대공자가 과연 자신의 지붕 밑으로 들어온 그녀를 지켜 줄 것인가?

성정이 유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그가, 권력의지로 가득한 두 동생에게서?

집사부장은 대답 대신, 오늘 대공자의 거처인 원각정에서 벌어졌던 일을 소상히 적어 주었다.

'대공자님의 성정이 바뀌신 것인 가요?’

집사부장은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다시금 내저었다.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감히 오히려 이번 일이 원래 그분의 성정에 어울리는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어쩌면. 어쩌면, 그분이 무언가 마음을 잡으신 게지.'

그것은 중원제일가라 불리는 낙양검가의 집사부장다운 판단력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내가 기억하는 대공자님이라면……'

그의 눈이 번뜩였다.

’……앞으로 검가의 후계 구도가 크게 변할 것이 틀림없다.’

집사부장은 잠시 정아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성숙한 미모가 꽃피어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마냥 귀엽기만 하던 소녀의 얼굴이 비칠 뿐이었다.

'판단은 너의 몫이다. 하지만.'

붓을 멈춘 집사부장은 정아를 바라보았다.

정아 또한 고개를 들어 집사부장을 마주 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흠을 잡기 어려운 그녀의 곱기만 한 눈매.

그 금안을 연상케 하는 눈동자의 깊은 곳에는, 집사부장과 정아 스스로만이 알고 있는 그녀 자신의 비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너의 [그 눈]이라면, 대공자님께서 진정으로 마음을 달리 잡으신것인지 누구보다도 빠르게 판단할수 있을 게다.'

붓이 벼루 위에 놓였다.

집무실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는 필담을 나누는 데 썼던 모든 종이를 모아, 천천히 한 장씩, 꼼꼼하게 화로(火爐)에 던져 넣었다.

* * *

잠시 후, 집사부장의 집무실을 나선 한 시녀는 바삐 어디론가 향했다.

자신의 새 거처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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