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4화 (4/350)

제4편 연소현얘3昭賢)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 했던가.

자신의 심상 세계가 안정되지 않는 이상, 당장에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교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그는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일일이 통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어디까지나 제암진천경이 준 신체 조절 능력이 있기에 떠올린 방법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비정상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기억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방법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표정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그 짧은 순간에 벌어지는 변화를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좋아.”

마지막으로 확인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햇볕이 었다.

그것은 그 끔찍했던 어둠 속의 추위를 잊게 하는 따사로운 햇볕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맨발 그대로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대공자님, 기침하셨습니까.”

밖에서 뜰을 청소하던 하인들이 대강이나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차피 자신들이 범하는 약간의 무례 정도는 괘념치 않는 대공자였다.

서생은 조금도 하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예 그들이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두 손을 천천히 펼쳐 햇빛을 느꼈다.

햇살 한 줄기를 천 년 동안 기다려 왔던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처럼.

그는 아예 두 눈을 감았다.

“대공자님……?"

그 행동을 기이하게 여긴 하인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하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묘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대공자가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고 넘어갔을 터였다.

꿀꺽.

하인들의 손에는 어느 사인가 식은땀이 조금씩 배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엄격한 주인을 섬기는 아랫것들이나 겪을 법한 일이었다.

그 불편함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대공자의 입이 열렸다.

“……내 밑의 모든 아랫것을 호출해라.”

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는 대공자의 목소리였다.

어제와 분명 같으면서도, 어딘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감히 하인들 따위가 거스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예?! 옛! 알겠습니다요!”

화들짝 정신을 차린 하인들은 각자가 있는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구석구석에 있는 다른 하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내달렸다.

“무슨 일이야……?”

“뭐야? 무슨 일 있어?”

부름을 받은 하인들이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어슬렁거리며 한둘씩 모여들었다.

아마 명(命)을 전한 하인의 다급한 어조가 아니었다면, 개중에 몇몇은 끝내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모여든 이들이 보게 된 모습은 대공자가 홁바닥에 맨발로 서서 두 팔을 펼치고 햇빛을 받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모여든 하인들 사이에서 숙덕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오갔다.

“저 양반이 거처에만 계속 박혀있다 보니, 드디어 실성한 모양인데?”

“아……, 낮잠 잘 자고 있었는데, 왜 부르고 난리인지 모르겠네.”

개중에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쯧쯧, 대공자란 사람이 저 모양이어서야, 대(大)낙양검가의 꼴이 어찌 돌아갈는지……."

그들에게 있어서 대공자라는 사람은 '편하고', '만만한' 존재였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대공자와 함께했다.

대공자가 그들을 다그치는 일도 혼쭐을 내는 일도 일절 없었다.

그들이 내는 건의 사항은 웬만해서는 모두 들어주었다.

게다가 그의 거처인 원각정은 가진 규모에 비해, 해야 할 일이 지극히 적었다.

손님이 통 오질 않으니, 하루에 몇 번씩 구석구석 광을 낼 일도 없었고, 손이 많이 가는 넓은 정원은 대공자가 대부분 손수 가꾸었으며, 대공자가 입는 옷이라고 해 봐야 몇 벌 되지도 않으니, 가장 고되다고 할 만한 세탁조차 별것이 없었다.

그렇게 대공자의 처소인 원각정(原各庭)의 하인들은 방만하고, 태만해져 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검자(無劍者)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그를 업신여기는 것은, 가문전체에 떠도는 공공연한 분위기였다.

설령 그가 어떻든 감히 아랫것들이 무시할 위치가 아니었건만.

성격이 너무나 원만한 그를,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봐 왔던 것이 문제였다.

“……흠흠.”

“크흠.”

처음에는 사람을 불러 놓고 기행을 하는 대공자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장내는 어째서인지 쥐라도 죽은 것처럼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조용히 시킨 것도 아니었다.

맨 처음의 하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점차 허튼 잡담을 삼가게 되었다.

점차 삿된 움직임을 자제하게 되었다.

점차 초조해져 갔다.

"......."

"......."

결국 장내에는 묘한 적막감과 불길한 침묵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을 깨트리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대공자로부터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모두 모였느냐?”

그 기묘한 상황은 대공자가 입을 열 때까지 이어졌다.

“예?! 예, 맞습니다. 모두 모였습니다요.”

그는 허둥거리는 하인들을 바라 보지도 않았다.

“너희는 이 시각부터 원각정에 필요 없다. 당장 집사부에 보고하고, 새롭게 자리를 배치받도록.”

그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모두의 귓가에 선명히 들렸다.

“그, 그런……?!”

“……대공자님!”

그저 긴장하여 고개를 조아리고만 있던 이들이, 그 말에 반발했다.

“이리 갑자기 저희를 내치시면 저희는 어쩌란 말씀입니까?!”

그리고 한둘이 용기를 내어 외치자, 누구랄 것 없이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집사부에는 뭐라 설명하면 좋단 말입니까?!”

“다들 저희를 안 좋은 눈으로 볼겁니다!”

“대공자님!”

다들 한목소리로 소리를 높여 대공자의 결정을 지탄했다.

"......큭큭큭."

그때 그런 그들의 높은 목소리를 선명하게 가로지르는 웃음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공자의 입가에서 시작된 조소(嘲笑)였다.

그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는 묘한 금속성(金屬聲)이 섞여 듣는 이들의 귓가를 할퀴는 것 같았다.

기괴하고도 음산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하인들의 뒷덜미가 곤두섰다.

그들의 혀가 굳었다.

그들의 행동이 멈췄다.

"......."

그들의 입은 닫혔지만, 대공자의 불길한 웃음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비웃음은 하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조롱이었다.

'과거의 나는 얼마나 답답하고 몽매(蒙昧)한 인간이었던 것이냐.’

스스로가 먼저 선의를 베풀면, 상대가 그것을 선의로 보답하리라 믿었었다.

상대가 만약 당장 선의로 보답하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진심(眞心)이 통하리라 믿었었다.

아니, 믿고 싶었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천지(天地)도 모르고 날뛰는 하인들은, 그런 과거의 자신이 키워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이었다.

이윽고 웃음기를 거두어들인 대공자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감정이라고는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유리알과 같은 시선에 하인들이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내 성이 무엇이더냐?”

그가 손을 들어 한 사람을 지목하자, 그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여, 연(淵) 씨이십니다!”

연 씨 성을 가진 대공자는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리고 이 가문은, 낙양검가는, 바로 그 연씨 가문의 것이지.”

그러고는 다른 이를 지목하여 다시 질문했다.

“내 이름은 무엇이냐?”

지목받은 이가 이유도 모르고 덜덜 떨면서 답했다.

“……소(昭)' 자, 그리고 '현(賢)' 자를 쓰십니다!”

소현, 연 씨 성에 소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다시 다른 하인에게 물었다.

“그래, 이 연소현이라는 작자는 이 가문의 무엇이냐?”

지목받은 하인이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대, 대공자님이십니다.”

대공자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저 모양일뿐, 알맹이라고는 텅 비어 있어, 오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내가 바로 이 가문의 대 공자, 연소현이다.”

그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튀는 것 같았다.

"그럼 그 대공자에게 항명(抗命)하는 너희는 무엇이냐?”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너희는 이 가문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이냐?”

그 말에 모든 하인이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그들은 배운 것 없이 어리석었지만, 그렇다고 제 죽을 곳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절대 항명이 아닙니다요!”

“소인(小人)들은 그저……!”

그들의 단정하던 하인복이 더러워졌다.

그들이 비웃었던 대공자 연소현의 맨발보다도 더욱.

“쉿……!”

연소현이 손가락을 들어 입에 대자, 홁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하인들의 입에서는 숨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너희를 방만하게 만든 것은 나의 탓이니, 너희에게까지 죄를 묻지는 않겠다.”

연소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 전부 당장 짐을 챙겨 꺼져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인들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그는 비틀린 미소와 함께,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한없이 잘해 줄 때는 뒷말과 원망만을 들었다.

그런데 사정없이 쥐어짜니 그때야 감사의 인사를 듣는다.

얄궂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사(人間事)였으니.

지금에 와서 그런 것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것보다도 그가 하인들을 전부 내친 것에는 더 중한 이유가 있었다.

'이로써, 당장에 불필요한 '눈'들은 치웠다.’

원각정의 하인 중 많은 이들이, 대공자인 연소현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문 내 다른 세력들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권력(權力)에 무심했기에 무시했었다.

감히 주인의 행동을 밀고(密告)하는 하인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 당장 풀을 쳐 뱀을 놀라게 할(打草驚蛇) 필요는 없지.'

저들이 자신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할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거기, 너.”

짐을 채 제대로 싸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원각정에서 벗어나려던 하인이었다.

그는 연소현이 자신을 지목하자 혼비백산하여 바닥에 엎드렸다.

예, 예! 대공자님! 하명하십시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대답하는 와중에, 그의 짐과 옷가지 등이 바닥에 굴렀다.

그러나 그도 연소현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집사부에, 아니…….”

연소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집사부장(執事部長)에게 직접 내 수발을 들 아이 하나를 엄선해서 보내라고 전해라.”

'집사부장'은 감히 천한 자신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자.

이제는 이미 늦었지만, 하인은 자신이 섬겼었던 이가 누구였는지 명백히 깨달았다.

“예, 예! 알겠습니다, 대공자님 명심하겠습니 다요.”

“그리고……

이어진 그의 질문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해가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나?”

“태양…… 말씀이십니까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연소현의 질문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인은 그저 묻는 대로 답했다.

"지금 저쪽에 떠 있습니다요. 아주 하얗게, 아주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쳐다보기도 힘듭니다요.”

그 대답에 그는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그래?”

연소현이 손을 내저었다.

하인은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저쯤이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소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따스한 햇살뿐이었다.

태양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태양조차 내게서 고개를 돌려 버린 것인가.”

그의 귓가에는 제암진천경의 광소가 아직도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너는 이제부터 어둠 속에서 숨쉬고, 어둠 속에서 단죄(斷罪)의 검을 내리쳐, 세상의 모든 업(業)을 징벌(懲罰)하는 암흑의 존자(尊者)가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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