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Awakening
한 점 빛이 없는 공간,
유구한 시간을 망각하게 하는 어둠 속에서,
나는 안식을 얻었고, 내 영혼은 가장 깊은 곳까지 부패했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없는 공허 (空虛).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이들이 자아내는 이야기 속에 있었다.
분명히 그들은 이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는 이들이 아니었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화톳불이 자아내는 환영과 같았고, 여름날의 신기루와 같았다.
그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인종도, 성별도, 연령도 달랐다. 누군가는 너무나 신비롭고 낯선 문화에, 또 다른 누군가는 내가 감히 들어 보지도 못했던 기이한 문명 속에서 살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끔찍한 비극.
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그 끔찍한 비극과도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감히 추측해 보자면, 그들은 나 이전의 연자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의 이야기도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목소리 같은 것은 없던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무료함에 지쳐 지어낸 이야기들이었을까, 그 끔찍한 고문의 연속으로 미쳐 버린 정신이 만들어낸 환상들일 뿐이었을까.
그렇게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억겁(億劫)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것 같고, 나유타(那由他)라고 표현해도 좋을 시간이었다.
만약 이곳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것을 순간(瞬間)이나 찰나(刹那)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시점.
저 멀리서 작은 빛이 보인다.
빛에서는 산 자들에게서 비롯된 희미한 온기가 전해져 왔고, 속세의 활기가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이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충분히 그 빛이 가까워졌을 때, 깨달았다.
이 춥고 황량하며 외로운 지독한 어둠이 바로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이자 본질이라는 것을.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이제 나는 저기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암진천경이라는 유래조차 알 수 없는 태고(太古)의 마물에 의해서 나는 새로이 조립되고, 구성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준비되었다는 것을.
* * *
그는 마치 오후의 달콤한 낮잠에서 깨어나듯,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 모든 고통과 충격의 시간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수면 중의 짤막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고문을 당하고 사지를 잃었던 기억이 민망할 정도로 육신은 편안한 상태였다.
그렇게 충분한 숙면을 하고 일어난 것처럼, 그는 깨어났다.
“……꿈이었나?”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단전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태연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묵직하고 사악한 기운.
그것은 틀림없이 '제암진천경'의 기운이었으니.
그날, 지하 뇌옥에서 만났던 그것이 풍겨 대던 그 끔찍한 마기(魔氣)가, 이제 그의 단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전체 기운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그에게 허락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암진천경의 순수한 마기는, 마치 옷에 떨어진 불똥처럼 선연하게, 그에게 모든 것이 사실이었음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흐음……"
한때 죽음에 이를 정도로 망가졌었던 그의 육체는, 현재로서는 너무나 완벽한 상태였다.
그는 그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자신의 육체에 위화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눈앞에 주먹을 들어 쥐었다 펴 보았다.
상처나 흉터는커녕 잡티 하나조차 없이 하얗고 고운 손에 붙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 거기 있었다.
“여기는……"
그는 몸을 일으켰다.
먹 냄새가 진하게 밴 고아한 분위기의 침실.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벽면 가득히 들어찬 서책의 모습에서 주인의 성정을 짐작하게 했다.
“……내 방이군.”
그는 보지 않고서도 어떤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은 평생을 통틀어 그에게 가장 편안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자신이 본가에서 어릴 적부터 사용하던 그의 침실이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고 하더니.”
제암진천경은 분명히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오다니.
그는 그 끔찍했던 연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어도 만족했을 터였다.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을 하려 했었다.
그에게 소중하던 이들은 모두 죽어 없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새 기회를 얻었다고 여겼을 터였다.
그런데 과거로 되돌아오다니......!
"......크흐흐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는 웃음이 홀러나왔다.
제암진천경은, 그 자신을 역천의 경전이라 일컬었던 그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것은 그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권능(權能)을 보여 준 것이다.
제암진천경이라는 마물의 정체가 불현듯 궁금해졌지만, 지금은 그런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최고의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
“크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에 반응하듯이,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그르렁거리며 울부짖었다.
* * *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명백히 10대의 그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손과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본가 침실의 모습으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는 좀 더 정확히, 그가 돌아온 시간대를 알아야 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실마리는 이미 자신의 주변에 넘치도록 충분히 있었으니까.
“흐음……."
그는 침실에 빼곡한 책들을 빠르게 홅어보았다.
그저 빠르게 스치듯 훑어보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침실에있던 모든 책에 대한 정보가 정확히 남아 있었다.
이 책이 언제 그의 침실에 들어왔는지.
어느 시점에 어떤 위치에 정리되어 있었는지.
그는 자신의 기억 속 장면들과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정확히 비교해 냈다.
간단한 작업이었다.
그는 몇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에 확인을 끝냈다.
“……17세, 2월인가.”
자신의 앳된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재조립했다.
그것은 마치 초반의 바둑판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앞으로 있을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를 한눈에 읽어 내는 신선(神仙)과 같은 눈길이었다.
"......."
긴 시간을 상념에 잠겨 있던 그를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이었다.
“……대공자님은 기침(起寢)하셨을까?”
“뭐, 아무렴 어떠한가. 어차피 또 일어나자마자 서책을 붙들고 있지 않겠나?”
“……것 참.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라고 일컬어지는 낙양검가(洛陽劍家)의 대공자가 저런 꼴이라니…….”
“오죽하면 사람들이 무검자(無劍者)라고 부르겠나.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지.”
“그래도 예전엔 영특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었는데 말이야……
“그것도 전부 한낱 소문에 불과 했던 게지.”
“천상가(天上家)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대(大)낙양검가의 대공자로 태어났으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흉을 보는 하인들의 대화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화가 날 만도 하련만, 그의 눈동자는 지극히 무심(無心)했다.
원래 그는 세간(世間)의 이야기 따위에 관심을 가지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제암진천경으로부터 비롯된 광기(狂氣)와 마기에 영혼의 끝자락까지 물든 상태였다.
말하자면 지금 그의 정신의 표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의 잔잔함과도 같았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서는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화산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그는 짐짓 큰 소리를 내어 하인들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부름에 응하는 이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머무는 처소(處所)는 낙양검가의 비처(秘處) 중의 하나였고,
이곳에 적용된 방음(防音) 기술은 중원제일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너무도 생생하게 밖에서 하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도 제암진천경에게서 비롯된 힘인가……
아마도 영향을 받은 것은 청력(聽力)뿐이 아닐 터였다.
그는 차분히 시간을 들였다.
실험과 관찰을 반복했다.
그가 결론에 다다르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반적인 신체 능력의 비약적인 상승.
체력, 근력, 오감(五感) 등을 포함하여, 모든 신체 능력이 향상됐다.
“……대단하군.”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이전의 나약해 빠진 육체가 아니었다.
극한까지 단련한 이들만이 가질수 있는 강철과 같은 육체가 그곳에 있었다.
근육의 결 하나하나까지도 뚜렷하게 드러난 몸은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자신의 육체를 감상하던 그는, 곧 새로운 사실을 눈치챘다.
“호오……?”
거울에는 보기에도 섬뜩하게 비틀린 표정을 지은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살기(殺氣)에 절여지고, 마기가 골수까지 치밀어 버린 마인(魔人)의 모습이 이러할까?
“이런, 이런.”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표정을 조금씩 바꿔 보았다.
“이렇게…….”
입꼬리를 좀 더 내려 봤다.
이마의 주름도 펴 본다.
부릅뜬 눈도 조금 내리깔아 봤다.
“……더 기괴한 얼굴이 되었군.”
클클클, 하고 가래 끓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음소리도 교정해야 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반죽하듯 문질러 보았다.
먼저 조금은 근육을 이완시킬 필요가 있다.
거칠게 문질러진 얼굴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며 얼굴의 근육이 유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동경을 들여다보고 표정 연습을 시작했다.
“으음. 좀 더 '사람다운' 표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지…….”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보다 보니, 본인의 꼴이 우스워 웃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큭큭큭, 하고 카랑카랑한 금속음이 뒤섞인 웃음소리였다.
그렇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본인의 얼굴과 씨름을 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거울 속에는 어린아이가 본다면 경기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을 지은 그가 있었다.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에게 답이라도 구하듯이.
“사람답다는 게, 뭐지?”
거울이 비추고 있는 것은 아무리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들, 누구나 절세의 미공자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달랐으니.
두 눈이 있던 자리는 휑하니 비어 고통으로 일그러져 피눈물을 쏟고 있었고,
코가 있던 자리는 두 개의 구멍만이 남아 피고름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며,
얼굴의 피부에 성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목구멍에는 뿌리만 겨우 남은 혀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거울이 비추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의 심상(心象)이었다.
상처 입고, 비틀리고, 왜곡되었으며, 오염되어 버린…….
그것은 그가 품고 있는 제암진천경의 광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