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화 (2/350)

제2편 프롤로그

'……여동생들은 어찌 되었소?'

그들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서생은 자조적인 어투로 물었다.

[자네의 첫째 여동생은 가문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다시 빛내기 위해 마두(魔頭)들을 처단하러 다니다가 전대(前代)의 마인(魔人)을 만나 사지가 찢겨 죽었다네. 자네의 둘째 여동생은 자신의 쌍둥이 언니를 그렇게 잃은 뒤, 실성하여 거리를 헤매다가 거칠게 비 내리던 어느 날 얼어 죽고 말았군.]

'그런가……'

그랬다.

마땅히 그러했을 터였다.

가문이 몇 갈래로 찢겨 나가고, 사실상 멸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는데, 그 아이들이 무사할리는 없었다.

[하지만 자네 막내 여동생은 다행히도 살아 있다네.]

서생이 반색했다.

'그렇소?! 난이가 살아 있다는 말이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소?'

[자네의 막내는 마약(麻藥)에 중독되었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였겠지. 거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낙양의 기루에서 창기(娼妓) 노릇을 하며 살고 있네.]

목소리는 부드럽게 그를 다독였다.

[그래도 살아 있다니 잘되었네. 잘되었어. 나도 드디어 좋은 소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어 기쁘군.]

"크흐흐........."

서생이 각혈하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웃는 것처럼 오열했다.

그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그의 견갑골에 단단히 엮인 사슬이 음울한 비명을 질렀다.

장정의 팔뚝 두께와 같을 정도로 굵은 사슬은, 짙은 묵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묵철(墨鐵)이라 불리는 단단하기로는 비할 데가 없는 금속이었다.

한동안 피 섞인 눈물을 흘리던 서생은 목소리에게 변명했다.

'나는, ……나는 어쩔 수 없었소.'

그것은 그들이 택한 길이고 결과였다.

'나는 일찍이 세상과 모든 연(緣)을 끊어 내기로 결심하였소.'

[나도 이미 알고 있네. 자네의 결심을. 그리고 그 결심에 이르게 되었던 과정들을.]

서생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깊은 어둠 속에 침전되어 있던 기억들을 되새겼다.

이제는 오래전 기억이었지만, 그에게는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인세(人世)는 틀림없이 더럽고 추악하네. 그런 세상을 만든 것은 틀림없이 인간 그 자신이야. 신화(神話)의 시대(時代)를 끝내고 문명(文明)을 이룩하여 역사(歷史)의 시대를 연 것은, 인간들의 거대한 타락이었지.]

'……나는 노자(老子)가 되고 싶었소.'

[그와 같이 그저 스쳐 가는 인물로서 남고 싶었겠지. 도가(道家)라는 위대한 사상을 창시했었지만, 본인의 자취라고는 제대로 남기지도 않고, 결국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사라진 그처럼.]

'나는 그저 무위무욕(無爲無欲)하며 살아가길 원했소. 속세(俗世)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소.'

[그래서 무검자(無劍者)로 살지 않았는가. 검가(劍家)의 장자이면서도 검을 쥐지 않았고, 방에 틀어박혀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아 살지 않았나. 자네의 부인도 그것을 이해해 주었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내 아내는? 운정은 어찌 되었소?'

부인 모용운정과 자신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는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쓸모라고는 없는 데릴사위로 인해서 피해를 보았음에도, 그녀는 그런 그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 주었었다.

잠자리도 하지 않는, 명목상의 부부에 불과했지만, 그가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결국 정쟁(政爭)에서 패하였다네. 그녀의 세력은 모두 축출되었네.]

'……그녀는 목숨을 잃었소?'

[얼마 전의 일이었네. 공왕(恐王)의 잠자리 수발을 들다가 그의 양물을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발겼지. 형장에서도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네. 실로 대단한 처자야. 난세에 태어났다면 그녀는 필시 대단한 군주(君主)가 되었겠지.]

목소리가 껄껄 웃었다.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산 그녀였지만, 하늘은 결국 그녀를 돕지 않았구려.'

목소리가 조소(嘲笑)했다.

[헛소리.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이 아니라, 자네였네. 그녀를 저버린 것은 자네라네.]

'……나는 한때, 내 운명을 스스로 점쳐 보았소.'

서생은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살성(天殺星)의 지배를 받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소. 그런 내가 세상사에 관여한다면, 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을 것이오.'

그러자 목소리가 답했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자네의 그 운명은 이미 실현되었다네.]

'……그런?!'

서생은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아끼던 모든 이들이 상처입고, 고통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자신은 그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모두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필멸의 존재에 불과한 나는 지엄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아주 작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차이가 있다면,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이제 알겠는가?]

서생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이제 이후는 모두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겠소.'

[아둔한지고!]

그것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우르릉, 하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만큼의 큰 소리였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이제까지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명백히 격양되어 있었고, 분노하고 있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미력한 인간들을 돌보지 않는다네!]

목소리는 거침없이 서생을 질타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도 사람을 도와야 하거늘. 성인불인(聖人不仁)이라! 성인조차 인자하지 않다고 하는데, 자네를 보면 딱 맞는 꼴이 아닌가!]

서생은 목소리에 맞섰다.

'하지만 또한,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失) 하였소. 내가 나서지 않아도 마땅히 악행(惡行)을 저지른 자들은 인과(因果)의 법칙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오.'

[인과라, 인과라 하였는가?!]

인과라는 말을 되뇌던 목소리는 광소를 터트렸다.

머리를 쪼개듯이 커다란 웃음소리에 서생은 고통도 잊고, 손가락과 손목을 잃은 팔로 귀를 틀어막 았다.

웃음소리에 진동하는 묵철 사슬이 그의 뼛속까지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자네가 인과라 하니 옛이야기를 하나 보여 주도록 하지.]

서생의 앞이 밝아졌다.

갑자기 낯선 풍경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그는 눈을 잃었지만, 목소리가 보여 주는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고대(古代)에, 신화의 시대에, 인간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이 있었다.

그 시대에도 인간은 잔악하고 이기적이 었다.

결국, 끔찍한 인간 세상에서 눈을 돌린 소수의 이들은 자신에게만 전념하여 수행을 거듭했다.

그들은 일찍이 시공(時空)을 초월한 인과가 있으리라 믿었고, 언젠가는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위대한 질서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어느 날,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선인(仙人)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과는,

그들이 믿고 있던 절대적인 질서는,

그저 허상(虛想)일 뿐이었다.

명이 다한 이들은 그저 한 줌의 홁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들의 혼과 백은 그저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사후 세계도, 지옥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악인들은 악행을 하고,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다가 죽었다.

그들이 가끔 그들의 악행 덕분에 제명에 못 살다 죽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선량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다가 천수(天壽)를 채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들의 피와 고름까지 짜낸 이들은 그들의 몫까지 복락(福樂)을 누리며 살다 죽었다.

지독히도 불합리했다.

기울어 버린 저울을 바로잡아 줄 하늘은 존재하지 않았다.

위대한 인과는 없다.

* * *

[이제 알겠는가.]

목소리가 재차 물었다.

[진실을 보았는가.]

서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마주한 진실은 너무도 차갑고 냉정했다.

천벌(天罰)이라는 것은, 심판(審判)이라는 것은 단지 희망 한 점 없이 사는 이들이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악인 모두가, 그들 하나하나가, 자신들이 저질렀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사람뿐이라면,

사람을 벌할 수 있는 것도 사람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힘을 가지고 싶은가? 그들을 심판할 힘을 가지고 싶은가? 그들에게 진정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가?]

'그렇소.'

[기회를 얻고 싶은가? 모든 것을 다시 바꾸어 놓을 기회를 얻고 싶은가? 모두를 구원하고 싶은가?]

'그렇소.'

[그 대가로 자네의 영혼이 오갈 곳 없이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소!'

서생의 목구멍에서 피와 함께 괴성이 홀러나왔다.

'힘을 가지겠소! 내가 그 기회를 얻겠소!'

그가 거칠게 몸부림치자 묵철 사슬이 절그럭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구멍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한낱 욕망에 휘둘리는 이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오! 남의 고통을 쾌락으로 삼는 이들에게 철퇴를 안길 것이오!'

서생이 질러 대는 괴성은 그칠 줄 모르고 더욱 커져만 갔다.

'내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내가 그들의 운명을 지배할 것이오!'

그리고 그에 비례하여 들려오는 목소리의 존재감도 더더욱 커져만 갔다.

[이제야 깨달았군! 이제야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군! 그렇다면 나를 보아라!]

그 목소리는 서생의 영혼조차 뒤흔들 만큼 커졌다.

서생은 자신의 영혼이 태풍 속의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공혈(孔穴)만 남은 눈으로 칠흑 속을 직시했다.

[나는- 우리는, 자네에게 힘을 줄 수 있다. 기회를 줄 수 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무저갱(無底坑)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가장 깊은 어둠의 아득한 밑바닥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한 권의 서책(書冊)이었다.

그것은 한 권의 경전(經典)이었다.

인간에 원한을 지닌 이가 스스로의 피부로 표지를 만들고,

하늘에 원한을 지닌 이가 스스로의 피로 내용을 쓰고,

땅에 원한을 지닌 이가 스스로의 힘줄로 엮어 만든 경전이었다.

[자네와 우리는 그 추구하는 바는 다르나 그 길이 같으니, 우리와 계약하면 새로운 기회를 주겠다!]

'계약하겠소!'

[자네는 다시는 빛 속에서 떳떳하게 걸을 수 없고, 다시는 그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와 계약하겠는가!]

서생은 애초에 다른 대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소. 당신에게 내 영혼을 맡기겠소.'

목소리- 경전은 그의 대답에 만족한 듯이 광천대소를 터트렸다.

[연자(緣者)여. 이 경전의 이름은 제암진천경(制暗震天經)이며, 무심하고 게으른 하늘을 대신하여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모든 어둠을 살라 먹을 역천(逆天)의 경전이다!]

경전에서 어둠이 치솟았다.

서생의 영혼은 순식간에 그 어둠에 잠식되어 갔다.

그의 의식이 멀어져 가는 가운데, 제암진천경의 광소가 그의 귓가를 뒤흔들었다.

[너는 이제부터 어둠 속에서 숨쉬고, 어둠 속에서 단죄(斷罪)의 검을 내리쳐, 세상의 모든 업(業)을 징벌(懲罰)하는 암흑의 존자(尊者)가 되리니!]

* * *

다음 날, 간수(看守)들은 서생이 온몸에서 피를 쏟은 채로 절명한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시체는,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고 한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가 모두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Chapter 01.

암천존자(暗天尊者), 개막(開幕)

It is better to be violent if there's violence in our hearts than to put on the cloak of non-violence to cover impotence.

“우리의 마음속에 폭력성이 존재할 때, 무력함을 감추기 위해 비폭력의 가면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적인 편이 낫다.”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0.2-194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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