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화 (1/350)

제암진천경 - 1권

Chapter 00.

최초에 만남이 있었다

“Exit light, Enter night.”

Metallica, Enter Sandman.

제1편 프롤로그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공간은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서생은 어렴풋이 그 공간이 그리 넓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안녕하신가.]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서생은 대답하려 했다. 그는 현재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이지(理智)는 상실됐다.

어렴풋한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쿨럭, 쿨럭.”

누구시오, 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네. 난 자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어떻게?'

서생은 말소리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뿌리만 남아 버린 혀는 유감스럽게도 만족스러운 전달력을 가진 언어를 만들어 내진 못했다.

그저 아무도 알아들을 리 없는 괴음만이 고통스럽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저런, 억지로 소리를 내려고 할 필요는 없네. 나는 자네가 그들에게 혀를 뽑힐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그런 사고를 하기에는 그는 너무 망가졌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으음, 차마 유쾌하게 보기엔 힘든 광경이었지. 시뻘겋게 달궈진 집게가 자네의 혀를 쑤욱 하고 뽑아냈지. 자네는 무어라 괴성을 지르다가 혼절했었어.]

그 말과는 다르게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가볍고 경쾌했다.

서생의 고통을 즐기는 투는 아니었다.

그저 원래 말투가 그러한 것 같았다.

'앞이, 앞이 보이지 않소.'

서생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서 두리번거리다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전에도 서생은 몇 번이나 깨달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는 다시 그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은 깊은 동굴이긴 했지만, 충분히 빛은 들어오고 있었다. 단지…….

[잊었는가? 자네의 현기(玄機)가 가득하던 두 눈알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꿰어 갔다네.]

'그랬었……나?'

서생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더듬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없었다.

심지어 왼손은 손목까지도 없었다.

그는 의아하여 목소리에게 물었다.

'혹시 내 손은 어디 갔는지 보았소?'

목소리는 여전히 중후하지만, 유쾌한 울림으로 대답해 주었다.

[자네의 궂은일이라고는 모르던 고운 손가락은, 가위가 썽둥썽둥 잘라 갔다네. 걱정하지는 말게. 그들은 자네를 위해, 시뻘겋게 달군 가위를 사용했으니.]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답해 주어서 고맙소.'

서생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해 보았다.

하지만 다리가 없었다.

고개를 힘겹게 갸웃거려 본 서생이 목소리에게 물었다.

'혹시 내 다리는 무엇이 가져갔소?'

[자네의 가느다란 두 다리는 작두가 업어 갔다네. 기억하지 못하는 자네를 위해 말해 주자면, 발가락부터 하나, 하나 차근차근히 베어 갔다네. 발목까지 잘리는 것에 사흘. 무릎이 잘리는 것에는 열흘. 허벅다리까지 보름이 걸렸지.]

'그랬소?'

서생은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려 했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기억이 날 듯도 하구려. 그럼 혹여나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오?'

[저런. 자네는 고문을 당하느라 너무 바빠 가족들의 소식도 듣지 못했군. 그러고 보니 자네가 뇌옥(牢獄)에서 생활한 지 꽤 오래되었어]

그러고 보면 희미하게나마 자신이 대단히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다는 것이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서생이 가만히 생각을 더듬고 있을 때,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자네 큰누이는 남편의 주먹에 그 고운 얼굴이 곤죽이 될 때까지 맞아 죽었다네.]

'그런……?!'

서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형의 성정은 사납기로 유명하지만, 광명정대(光明正大)하기로 이름 높은 가문의 수장이오. 그런 그가 어찌 자신의 부인을 그리 참혹히 때려죽인단 말이오?'

목소리는 혀를 찼다.

[아둔한지고. 가문의 장자인 자네가 모른다 하면, 누가 어찌 자네 가문의 일을 안단 말인가?]

서생은 허겁지겁 물었다.

'그렇다면, 작은누님은. 작은누님은 어찌 되었소?'

[그녀는 음적(淫賊)들에게 강간당하고 혀를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네.]

'그게 무슨 소리요?'

서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둘째 누님은 후기지수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검객(劍客)이었소. 그런 누님이 어떻게 한낱 음적들 따위에게 당할 수가 있소?'

[아둔한지고. 그녀의 단전이 못쓰게 된 지가 언제인데, 갑자의 내공과 갈고닦은 검기(劍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서생은 다시 한번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나의 가문은? 아무리 둘째 누님이 내공을 잃었다 한들, 가문이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을 리가 없소.'

그는 힘겹게 떠오르는 기억을 붙잡아 갔다.

'나의 가문은 이 중원 땅에서 감히 따를 자가 없던 대가문이오. 그런 가문의 차녀가 어찌 음적 따위에게 당할 수 있다는 말이오?'

목소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둔한지고.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자네의 가문이 풍비박산이 난 지가 언제인데, 그녀를 지켜 줄 가문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멸문(滅門)?'

그게 무슨 말인가. 서생은 현기증이 덮쳐 오는 머리를 짚으려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손이 없었다.

'나는 비록 골방에 틀어박혀 하루하루 책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살아가던 서생에 불과하나, 가문에는 뛰어난 지성(知性)과 훌륭한 무용(武勇)을 대륙 전체에 떨치던 아우들이 있었소. 그리고 그 아우들을 따르는 굴지의 무사들이 병풍처럼 있었건만, 도대체 어찌 된 연유란 말이오?'

[답답한지고, 실로 답답한지고. 어찌 자네는 가문의 장자인 자네가 데릴사위가 되어 떠난 이후의 일을 모르는 척하는가?]

목소리는 사납게 서생을 다그쳤다.

[자네가 칭찬했던 그 아우들이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인 사실을 정녕 알지 못하는가?]

'몰랐소. 나는 조금도 몰랐소.'

서생은 머리를 사납게 흔들었다.

[정말인가? 정말 알지 못했나?]

목소리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서생에게 되물었다.

서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평범한 서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작은 방에서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을 소일거리 삼아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때때로 정원을 가꾸거나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 정도가 그의 낙일 뿐이었다.

[정말인가?]

목소리는 서생의 생각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물론이오.'

그렇게 선량하게 살아온 자신이 어째서 이런 곳에 갇히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고문이라니?

자신은 그저 평화롭게 사는 것을 덕(德)으로 삼아 살아왔다.

[자네 정도 되는 기재(奇才)가, 자신이 가문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자신이 떠나고 나서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는 것인가? 그리고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를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목소리는 이제야말로 대놓고 서생을 조롱하는 투였다.

서생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로 몰랐소. 정말이오. 어찌 그 사실을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는 내가 알 수 있단 말이오?'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지만, 떠오르지는 않았다.

자신은 누구였는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가.

희미하게 스쳐 가는 기억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서생이 잡으려하면 사라져 버리는 환영과도 같았다.

이미 죽음이 골수까지 뻗어 버린 서생의 머리는 예전처럼 영민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한가?]

목소리가 낮고 스산해졌다.

마치 서생이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전부 들여다보듯이, 그의 인생을 낱낱이 들여다보듯이, 목소리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서생을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실로 그러한가? 천리안(千里眼)도 없이 일천 리를 내다보던 자네가, 신통력(神通力)도 없이 일천 일 앞을 바라보던 자네가. 정말로 몰랐단 말인가?]

'몰랐소. 몰랐소. 몰랐단 말이오!'

서생은 혼란스러웠다.

감히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앉은 자리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손바닥 보듯이 안다니.

터무니없는 능력이 아닌가?

그야말로 신산(神算)의 기지(奇智)를 지닌 천고(千古)의 기재나 가진 재주였다.

목소리는 다시 한번 나직하게 일렀다.

[그것이 자네 아닌가.]

'그럴 리 없소. 당신이 나를 자장(子張)이나, 장경(長卿)과 같은 이들과 착각한 것 아니오?'

자장과 장경은 다름 아닌 사마천과 손무의 자를 일컬었다.

[자장과 장경?]

목소리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자네에 비하면 사마천이나 손무는 한낱 역사가나 한낱 병법가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모르는가?]

서생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라 일컬어지는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를 남긴 인물로, 이 중원국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인이었다.

손무는 춘추시대를 풍미하여 강대하던 초나라를 쳐부수고, 병법을 쓰는 이들로 하여금 병략의 시야를 한 단계 끌어올리게 만든 위인이었다.

오랜만에 대화해서일까.

'그런 위대한 인물들보다 필부에 지나지 않는 나를 더 높게 친다고?'

서생의 머릿속이 천천히 맑아져 가고 있었다.

[자네에게 묻지.]

대화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자네가 어미를 도와 수백의 의서들을 정리하고 축약하여, 스물다섯으로 펴낸 것이 언제였나?]

서생이 담담히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것은 내 나이 네살 때의 일이오.'

[황제에게 지필(紙筆)로 간언(諫言)하여, 새로운 농법을 반포(頒布)하게 된 것은 언제였나?]

'내 나이 오 세 때의 일이오.'

[천문을 읽고 기상을 관측하여, 큰 가뭄이 올 것을 예측하고 구휼(救恤)을 위한 식량을 미리 비축하게 하여, 수백만 백성들의 아사를 막았던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육 세 때의 일이었소.'

대화가 거듭될수록 서생의 어렴풋하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 은 선명해져 갔다.

한동안의 대화 끝에 목소리가 다 시금 물었다.

[이제 기억이 나는가?]

서생은 인정했다.

'그렇소.'

자신은 사실,

전부 알고 있었다.

데릴사위가 되어 본가를 나온 이후, 그는 본가의 소식에 한 번도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었다.

필부들은 골육상쟁이 벌어질 것은 알았지만, 그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 결과를 전부 알고 있었다.

전부. 낱낱이.

어느 하나 빠짐도 없이.

모두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도.

그 거대하고 강력하던 가문이 무너져 버릴 것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전부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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