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침묵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하윤과 폭식, 그리고 바닥에 등을 댄 채 쓰러져 있는 신정율이 있었다.
저벅저벅...
작은 숨소리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하윤이었다.
그녀의 온몸에는 베이고 찢어진 상처들로 가득했다.
마력을 둘러 회복했음에도 허리는 여전히 깊은 자상 때문에 지금 당장에라도 상처 부위를 뜯고 싶을 정도로 쓰라렸다.
인간이 본능에 따라 정해놓은 한계를 넘어 마력과 악마의 힘을 다룬 탓에 머릿속에 정리된 을 누군가 미친 듯이 헤집어놓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하윤은 걸었다.
다리를 쩔뚝이고 중간중간 멀어진 시야 때문에 넘어질 뻔도 했으나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정율.”
“...왔구나, 하윤아.”
쓰러져 있던 신정율은 자신을 부르는 하윤의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하윤의 상태도 엉망이었지만, 신정율의 상태는 그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최악이었다.
검은 망토는 여전히 불씨가 가득해 뜨거웠고, 입고 있는 옷들은 넝마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옷 안쪽에 있는 몸통에는 날카로운 날개로 베인 자국이 셀 수가 없이 많았다.
게다가 그 주위에는 폭식의 상징체가 물어뜯어 상처 대부분이 일그러진 데다가, 뜨거운 화염에 살이 짓물러져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턱부터 코까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는 산산이 부서져 신정율은 얼굴에 화상을 입은 데다가 한쪽 눈은 [클리포트의 나무]에 삼켜졌는지 사라져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곧바로 시체로 변해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할 것 같은 상태.
그 역시 직감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자신의 숨을 끊어질 것을 말이다.
하지만 신정율은 온몸을 관통하는 죽음의 향기와 공포에 저항했다.
아직 그의 속죄는 끝나지 않았다.
신정율이 메마른 입을 열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걸 안단다.”
나직한 목소리.
그러나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던 부드러움이 스며든 음성이었다.
“...왜 아빠를 죽였어?”
꾸욱...
하윤은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애써 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후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신정율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욱씬.
뜨거운 불꽃에 데인 피부처럼 신정율의 표정은 더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이질적이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뿜어낸 분노는 아니었다.
슬픔, 후회 등등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정의할 수 없는 감정,
하윤은 어째서인지 지금 그가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왜 말이 없어.”
하윤은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신정율은 침묵을 유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미안하다는 흔해 빠진 말로 사과를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때의 일은 사고였다며 변명을 하려는 것일까.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이 남자를 죽일 것이니까.
다만 이렇게 말을 걸어본 이유는 자신의 안에 남아있던 아빠의 말을 따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말이다.
“참... 잘 컸구나.”
쓰러진 신정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잘 컸다는 아련한 말투.
그 속에는 후회와 원망이 담겨있었다.
후회는 이제는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린 그때의 시간을.
원망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말로도 용서받지 못할 자신을.
죽음과 가까운 고통 속에 갇혀있으면서도 너무나 담담한 말은 그들을 위한 고해성사와도 같았다.
“형이 보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신정율의 눈동자에 비치는 하윤.
그녀는 더 이상 어릴 때 보살폈던 작았던 조카딸이 아니었다.
이제는 완전히 닮아있었다.
세상을 떠난 형과 그가 사랑했던 사람.
지금 조카딸의 모습은 신기하게도 두 사람을 똑바로 담고 있었다.
“아쉬워하겠어...”
하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씁쓸한 미소를 작게 지은 신정율이 중얼거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하윤에겐 천사에게 받은 밝은 백색의 날개도, 악마에게 빌린 짙은 흑색의 나무도 사라졌다.
살 떨리는 기운도, 뜨겁고 살벌했던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죽음이 거의 다다랐는지 시야는 흐려지고 오감이 마비된다.
그럼에도.
하윤의 모습은 더없이 찬란하게 보였다.
스으윽...
신정율은 힘겹게 팔을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살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편안한 표정을 연기한 신정율.
그는 결까지 다가온 하윤의 뺨을 쓸어내리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마침내 더러워진 손이 조카에게 닿았을 때.
토옥.
물방울 하나가 신정율의 손에 떨어졌다.
뜨겁고, 작은 물방울.
이제 감각은 거의 다 사라졌기에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신정율은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대체...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비가 아니었다.
눈물이다.
누구보다 나를 죽이고 싶어 했던 조카의 눈에서 서글프게 흐르고 있다.
‘형한테 혼나겠네...’
아니, 애초에 형을 만나러 갈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의 죄는 너무나 거대하고 악하니 그를 보기에 면목이 없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형을 만나게 된다면.
마지막만이라도 그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겠다.
스륵.
신정율은 조용히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웃음이라고 보기에 힘든 너무나 서글픈 미소.
간신히 얼굴 근육에 힘을 주어 지은 표정은 담담하게 조카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울...지 마. 이쁜 얼굴...이 망가...지면 안 되잖아...”
“이상한 헛...소리 하지 마!”
어렸을 적의 기억을 되살리는 신정율의 말에 하윤은 도리어 화를 냈다.
그러나 폭포처럼 흐르는 울음은 참을 수 없었다.
분명 분노와 증오만이 치솟아야 할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슬픔이 고개를 내밀었다.
쿨럭...!
신정율의 눈동자 속에서 빛이 흐려졌다.
이제...
어둠이 나를 삼키려 다가온다.
동시에 다른
쿨럭...!
피를 토한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조카딸의 뺨을 살짝 쓸었다.
아무런 티도 없는 것 같은 부드러운 촉감.
하지만 그가 만지고 있는 건 하윤의 뺨에 낳은 흉터였다.
“삼촌이...”
미안해.
전부 다 미안해.
사랑했던 나의 형을.
그 누구보다 선했던 너의 아버지가 맞이할 찬란한 마지막을 내가 더럽힌 것을.
어렸던 너의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흉측한 상처를 남긴 것을.
그리고...
“이런 식으로... 네 손에 피를 묻힌 거... 전부 미안...”
“닥쳐! 미안하면 지금은 말하지 마. 그리고 당신이 나랑 아빠한테 저지른 죄를 세상에 고백하란 말이야!”
“하...하하...”
신정율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조심히 웃음소리를 내었다.
역시 닮았다.
너무나 선했던 형과도.
그렇지 않다면 죽음만을 바라고 있을 조카의 입에서 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삼촌 죽지 마. 제발...”
‘분명 너무나 바랐던 일인데.’
욕심이 나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정율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하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살고 싶어도 방도가 없다.
이제는 내 많은 부분이 죽음과 가까이 변했으니까.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 돼.’
이것으로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에게 짐을 덜어줘야만 한다.
“형의... 죽음은 오로지... 내 잘못이...야. 넌... 그냥 어렸던 아이...니까...”
‘아아...’
끝이 다가오면서 신정율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날의 일은 죽음으로서 용서받을 죄가 아니다.
만약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면.
이리 후회스럽고 슬프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큰 모습을 보고 싶었어.’
형과, 형이 사랑했던 사람과 다 함께 네가 당당히 세상으로 걸어갈 때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웃고 싶었다.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
그러나 이뤄지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는 것 정도는 용서해 줄 것이라 믿는다.
스르륵.
“아아...!”
거스를 수 없는 죽음에 몸을 맡기며 신정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속으로 들어오는 숨은 점점 적어지고, 삶을 채웠던 검은 빛은 사라진다.
그 대신 죽음으로 이루어진 하얀 어둠이 다가와 나와 마주한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하얀 어둠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는 다정한 실루엣.
세상 누구보다 따스했던 그의 모습에 신정율은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
선일은 미친 듯이 꼬여있던 하윤과 신정율의 악연이 끊어졌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신정율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하윤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끝났구나.”
슈우우우...
주변을 가리던 나무들이 완전히 사라진 공터에 바람 소리가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현실로 다시 돌아온 선일이 씁쓸한 목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죽음은 역시 무겁네.”
“당연하지.”
옆에서 대자로 쓰러져 있는 선월이 그의 말에 담담하게 동의했다.
아이러니하게 원래 ‘이선일’의 운명과 가까운 그가 이런 말을 하자 살짝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곧바로 표정 숨기기로 웃음을 없앤 선일은 어느새 많아진 생각을 애써 정리하기 시작했다.
‘죽음이라...’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 ‘이선일’의 운명.
분명 많은 내용을 바꿨음에도 변하지 않는 결말이었다.
‘아직 많이 남았다는 건가...’
“슬슬 시험이 끝나가는군.”
“아 그래?”
옆에서 쓰러진 선월의 말에 곧장 워치를 쳐다본 선일.
그의 말대로 어느새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약 30분도 남지 않은 중간고사에 선일은 무언가를 잊은 듯한 괴리감을 느꼈고, 그는 곧바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분명 중간고사에는 거대한 거미 같은 모습의 이질적인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하지만 천류체를 활성화해봐도 지금까지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은 악사영과는 엄연히 다른 세상이니 미래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어딘가 나사 하나 빠져있는 듯한 기분에 선일이 사고를 가속해 원작 내용을 확인하려 했을 때, 옆에 있는 선월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선월의 행동에 의문을 느낀 선일이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 집중했을 때.
푸욱...!
무언가가 선일의 몸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