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177화
하윤과 신정율의 전투가 한창일 때.
그들의 전투를 온전한 상태로 지켜보고 있던 사람은 선일과 이선월 단둘만이 아니었다.
“흐음~ 아주 장관이네요.”
둘의 격정적인 전투를 보며 뺨에 홍조를 띤 인물은 바로 쥬세피나 바르사였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신정율이 이동한 곳과 정반대였지만 [크투가]와 비슷한 격을 가진 존재, ‘오래된 자’를 섬기고 있는 그녀 역시 초인적인 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쥬세피나가 긴장감 넘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전투의 현황을 눈에 담고 있었을 때.
크르르륵!!!!
뒤에서 짐승의 분노 섞인 외침이 귀를 채웠다.
그와 동시에 무기라고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쥬세피나의 숨통을 끊기 위해 새하얀 목덜미를 향한다.
아주 조금만 반응이 늦더라도 목이 뜯길 터였지만, 쥬세피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탄식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소리들을 뱉으며 전황을 지켜볼 뿐.
그렇게 상처 입은 짐승의 이빨이 쥬세피나의 목에 박히려는 순간.
콰드드득...!
촤아악-!
갑자기 땅바닥에서 튀어나온 아주 얇은 무언가들은 한순간에 짐승의 몸을 관통했고 그대로 도륙냈다.
쥬세피나를 덮치려던 짐승은 한순간에 수십 개의 고깃덩이로 전락해버렸고.
결국 그녀의 주변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수많은 몬스터들의 사체와 운명을 같이 했다.
쥬세피나는 머리에 몸에 튄 검붉은 피를 대충 닦으며 입을 열었다.
“현세대에서 유일하게 [크투가]님에게 선택받은 존재라 그런지 역시 광기의 격이 다르네요.”
키득.
신정율의 힘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쥬세피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피가 튄 머리와 옷가지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전투로 인해 어질러졌던 모습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자 그녀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물론 자기 딴에 기분 좋다는 의미였지,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표정을 봤다면 순간 공포에 질릴 정도였다.
“어라라?”
이어서 그녀가 완전히 깨끗해졌을 때, 전투는 어느새 격정까지 치솟아 있었다.
천천히 허공으로 부유한 하윤.
그녀를 따라가듯 강한 다리로 하늘을 향해 뛴 신정율.
두 인물의 전투는 이제 지상을 넘어 허공에서까지 이어졌다.
팝콘이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아쉬워하던 쥬세피나는 이어지는 광경에 눈을 크게 뜨며 감탄을 뱉었다.
“호오...”
쥬세피나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은 공격을 날린 이는 다름 아닌 학생인 하윤의 힘이었다.
하지만 놀라워하는 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언뜻 괴짜스러운 미소를 지었던 쥬세피나의 입가가 갑자기 쭈욱 찢어져 귀까지 닿을 정도로 길어졌다.
그럴 수밖에.
“깨어났군요!”
쥬세피나의 안경 속에는 비친 소녀의 검은 빛은.
“어머니가 기다리시던 음식이!”
몇 년 전부터 기다려온.
이곳에 잠들어 있는 어머니를 위한 식사였으니까.
***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사랑하는 조카가 사용하는 힘의 정체를.
악마와 천사.
지금 자신의 몸을 뺏은 불명(不明)의 존재 [크투가]와 비슷한 격을 가진 두 강대한 존재의 힘이다.
촤르르륵-!!
온 시야에 비치는 하늘을 가리는 살벌한 벌레떼의 뒤로 수많은 회색 깃털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나’이라는 한 인간을 죽이기 위해 날아든다.
아니, 이제는 온전히 나라고 칭하는 것도 맞는 표현인지 헷갈려진다.
육체는 분명 내 것이지만, 그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닌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바깥의 존재이니.
‘미치겠네.’
신정율은 무섭게 쏘아지는 공격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조카가 이렇게 강해졌다는 게 참으로 대견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깝다.’
조카의 분노를 받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형을 향한 속죄고 자신을 향한 벌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던 건데.
2년 전부터 나를 구속하고 멋대로 조종해온 이 빌어먹을 존재가 그 일을 막아선다.
온전히 조카에 몸에 있는 듯한 악마의 피를 덮어쓰고 싶다는 욕망 하나 때문에 말이다.
‘젠장.’
의식 속에 갇힌 신정율은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워낙 영혼의 격의 차이가 큰 터라 아무 소용 없었다.
그때 핏빛 광기로 점철되어 날카로워진 신정율의, 아니 [크투가]의 손톱이 움직였다.
‘오래된 자’가 필멸자의 몸으로 일으킨 기적, 혹은 저주.
신정율의 무기보다 훨씬 단단한 주먹에 막혀 부서져 버려 한쪽밖에 남지 않았지만, 예기는 절대 부서지거나 무뎌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에 집중하던 광기를 한 손에만 집중했기에 더욱 강해진 모습이었다.
치이이이익...
지지직...!
까가가가각-!!!!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검은 파리들이 가루로 변한다.
신정율이 손톱을 두 번 휘두르자 깃털들은 피같이 찐득한 불길로 인해 바스러지고, 세 번 휘두르면 공격이 날아오는 공간이 찢어진다.
초월자와 비견되는 힘을 가진 존재의 격이라 그런지 신정율이 제어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욱신욱신욱신!
‘...이 개자식이!’
육체 속에 잠겨 있음에도 신정율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을 그대로 느꼈다.
애초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개념인 공간까지 마구잡이로 찢어대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힘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크투가]는 신경 쓰지 않고 강탈한 신정율의 몸을 혹사시켰다.
‘...제길.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육체를 넘어 영혼까지 전달되는 고통을 힘겹게 참아낸 신정율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저항을 그만뒀다.
다만 저항을 멈춘 이유가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도 기회가 된다면 단 한 순간 정도는 제어를 뺏을 수 있을 것이다.
신정율이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힘을 모아둬야 했다.
필멸을 초월한 존재 [크투가]의 힘에 비하면 아주 작고 연약한 힘이었으나 [크투가]의 노리개로 살면서 얻어낸 힘과 삶을 모두 포기한다면 충분히 할 만한 도박이었다.
물론 그 후에는 모두 하윤의 일이지만.
‘저 아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저 이질적인 육각형을 사용한 순간부터 하윤은 이미 검은 힘으로 광기를 조금씩 흡수하며 소멸시키고 있었다.
어떤 악마의 힘을 빌렸는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래된 자인 [크투가]와 비슷한 격을 지닌 악마라면 단 하나의 단어만 생각했다.
‘대악마. 그리고 형의 세라프는 분명 대천사의 힘을 인간이 다룰 수 있도록 바꾼 마법이었지.’
하하, 신정율은 속으로 웃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형을 죽인 신정율을 지옥으로 이끌 악마는 찾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아무런 죄가 없는 조카인 하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형의 마법을 쓸 수 없었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형과 똑같은 천사를 몸에 만들었다.
어쩌면 수만 년의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대악마와 대천사, 양립할 수 없는 두 존재의 힘을 다루는 것부터 형이나 자신과는 다른 천재였다.
그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신정율은 완전히 결정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을 거야.’
생각을 마친 신정율이 조용히 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때, 그의 몸을 뺏은 [크투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섬짓...!
섬짓...!
[크투가]에게 몸을 빼앗긴 신정율도, [크투가]와 대치하던 하윤도 저 웃음을 보자마자 느꼈다.
위험하다.
이번 공격은.
뚜두두둑...!
‘크커억..!’
[크투가]가 움직이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고통이 밀려들었다.
아까 전에 느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강력한 통증!
마치 육체를 넘어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은 격통.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통증에 신정율은 인간의 본능대로 숨을 쉬려고 노력했으나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육체의 안이었다.
“으아아...!”
하윤의 상황은 달랐다.
그녀 역시 웃음에서 살기를 느낀 만큼 신정율이 무언가를 할 생각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힘을 막고 나면.
‘틈이 생긴다!’
하윤이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순전히 감이었다.
정답일 수도 어쩌면 오답일 수도 있는 감.
그러나 하윤의 몸은 본능대로 움직였다.
슈루룩.
콰아아앙-!!!!
하윤은 회색의 날개를 조종하며 몸을 돌렸다.
그녀 혼자였다면 이런 세세한 조작은 불가능했을 테지만, 지금 하윤에게는 [벨제바브]라는 대악마가 존재했다.
이어서 그녀는 가냘픈 다리로 허공을 박찼다.
그 모습은 마치 육상 선수들이 달리는, 아니 하늘을 떠다니던 전투기가 순식간에 음속을 돌파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우우우웅-!
직후 하윤은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모조리 날개에 모았다.
난폭한 마력에 호응하듯 그녀가 사용했던 ‘클리포트’의 기운과 폭식의 상징체들이 날개에 모여들었다.
몸에 남아있는 모든 힘을 이번 일격에 쏟아부으려는 하윤의 날개가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상황을 지켜봐!
‘이번이 유일한 기회에요!’
폭식은 첫 번째 계약자에게 우려를 표했지만, 기회라고 생각한 하윤은 망설임 없이 날아갔다.
결국 지상의 짐승과 허공의 악마가 서로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내려는 순간.
씨익.
신정율이 새로운 감정의 웃음을 자아냈다.
직후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걸렸구나, 대악마.”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하윤은 똑똑히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사고 속에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는 그의 웃음에 자신이 보기 좋게 속았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신정율이... 아니야?’
방금 목소리를 낸 ‘그’가 자신의 혈육인 신정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멍청이가!
폭식은 그녀를 향해 분통을 터트렸고, 하윤은 얼어붙은 표정과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날개에 들어간 마력을 회수하려고 했다.
허나.
이미 늦었다.
“네년의 피를 뿌려주마!”
신정율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피칠갑을 한 것처럼 온몸에 두른 검붉은 기운을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하윤의 몸을 꿰뚫기 위해 세운 손톱은 그야말로 성서에 나오는 불길한 짐승의 뿔과도 같았다.
[붉은 짐승]
-신을 꿰뚫는 역천의 뿔.
콰드드드득-!!!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죽이기 위해 오르는 짐승의 뿔.
그저 스쳐 갔을 뿐인데 공간이 일그러지는 이 힘은 지금 이용하는 육체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격.
아마 이걸 사용하고 나면 분명히 이 연약한 육체는 부서지겠지만 상관은 없다.
장난감이야 새로 구하면 되니까.
지금 [크투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대악마의 피를 만끽하는 것뿐이다.
촤아아악-!
하윤은 최대한 속도를 죽이며 하강하려 노력했지만,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점점 신정율의 손톱이 가까워질수록 죽음 또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끝이구나.’
공간이 일그러지는 기운.
분명 저 공격을 맞으면 내 목숨은 사그라들겠지.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만약 죽는다면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엄마와 아빠를 따라가는 데다가 계약했다지만 그렇게 싫어했던 이 악마 또한 같이 소멸시킬 수 있다.
단 하나.
신정율에게 복수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빠가 했던 말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쉬울 뿐이었다.
스륵.
신정율의 공격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하윤은 눈을 감아버렸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은 무섭다.
소름이 끼치는 굉음과 생자의 피처럼 뜨겁고 찐득거리는 기운에 사신의 낫처럼 서늘한 분위기가 목을 점차 조여왔다.
바로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신하윤.”
눈 떠.
철컥...!!!
헌터에게는 어색한 소리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