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176화
콰아아아아-!
귀가 멀 것만 같은 폭발음과 함께 허공에서 두 개의 기운이 맞부딪혔다.
신정율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난도질하는 듯한 핏빛의 광기를.
신하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전부 빨아들일 것만 같은 흑색의 권능을.
“으윽...!”
초월자와 비견되는 두 존재의 힘이 대치하는 여파는 엄청나게 컸다.
전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선일과 선월이 까딱해서 정신 못 차리면 그대로 휩싸일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의 뒤에는 기절에서 깨어나지 못한 유리와 황신영까지 존재했기 때문에 신경 쓰일 곳이 더욱 많았다.
선일은 일출의 벽으로 일으킨 불꽃으로 최대한 일행을 보호했고, 선월은 간간이 날아오는 공격의 잔재들을 검으로 쳐냈다.
전투에 직접적인 참여가 없었음에도 두 형제의 등과 목에서는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치이익...!
‘역시 버거워.’
피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한 검은 벌레들과 날아오는 핏자국을 닮은 공격들이 일출의 벽으로 날아왔다.
자신이 만들어낸 불꽃에 금세 타 사라져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일으키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자 반사적으로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저 힘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론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충분히 막을 만한 힘이었지만 그의 상처는 태양의 힘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평소보다 회복이 더뎠다.
분명 신정율의 힘이 회복을 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확히 말하면 외부자라는 녀석들의 힘일 가능성이 더 크겠네.’
“...격이 다르군.”
한동안 공격들을 방어하던 선월이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더욱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선일은 그가 지친 것이 아님을 곧바로 눈치챘다.
위에서 일어나는 압도적인 전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무력감.
지금 선월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은 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그런 감정을 느낄 만도 하지.’
선일은 충분히 그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악사영 속에서의 선월은 항상 무너지거나 동요하는 모습이 없는 냉철한 주인공이었다.
허나 그는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당연히 자신이 영향력을 펼칠 수 없는 전투에서의 무력감도 충분히 존재할 것이었다.
그러나.
“형, 연회장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선일은 알고 있었다.
악사영과는 전투의 양상이 조금 달라졌으나.
여전히 이선월이라는 천재가 해줄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상한 소리 할 시간 있으면 공격을 방어하는 데 집중해라.”
아무리 천재라고 칭송받았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선월은 차갑게 대꾸했다.
물론 이런 태도 자체가 평소에도 익숙한 선일은 차가운 선월의 대답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직 형의 역할이 다 끝난 거 아니니까 너무 침울해하지 말라고.”
“...뭐?”
선월은 동생이 뱉은 두루뭉술한 말에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미가 물씬 느껴지는 선월의 반응을 보며 선일은 평소와 똑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직후 선일은 주먹을 바닥에 내지르며 말했다.
콰아아앙-!!!!!
“내가 날아오는 공격을 전담할 테니 형은 지금부터 최대한 마력을 모아놔.”
선일의 주먹이 닿은 땅에서 작은 지진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일출의 벽]이 내뿜는 불꽃의 화력이 배 이상으로 강해졌다.
옆에 있는 선월 쪽으로 날아가던 공격들까지 전부 [일출의 벽]이 집어삼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계획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틈이 생길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잘못 들어가면 몸이 찢길 것만 같은 저런 미친 전투에서 틈이라니.
순간 동생이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한 선월이 그의 말을 곧장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을 때.
스르륵...
선월은 무언가를 보았다.
자신의 감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말이다.
‘...위에서 느껴지던 기운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어째서라는 말은 필요가 없었다.
헌터끼리의 싸움에서 기운이 사라진다는 의미는 단 하나.
그건 바로 어느 한쪽의 패배가 가까워진다는 말이었으니까.
‘어느 쪽이지?!’
곧 있으면 상황이 달라질 것을 깨달은 선월이 시선에 마력을 집중했다.
상식적으로는 천외천인 신정율이 패배할 것이라고는 1도 머릿속에 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저 위의 상황을 봐야만 한다는 직감이 들었고 그대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뭣...!”
그렇게 강화된 시각이 앞을 가리는 불길을 뚫고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선월은 불길한 힘들의 전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에서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힘 싸움을 하던 두 명 중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크르르롸!!!!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짐승의 거친 울음소리.
아까 전 싸움으로서 학생들이 알게 된 사실은 신정율이 다루는 기운이 저런 소리를 내뿜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아까 전 모두를 압도하던 그때의 기세와는 다르다.
표현하자면 뭐랄까...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분에 차 우는 것 같은 느낌이군.’
키키키킥...
반면에 하윤이 다루는 기운은 신정율의 핏빛 기운과는 전혀 다른 상태였다.
미친 듯이 광분하는 핏빛 기운과는 달리 하윤이 내뿜어낸 검은 기운은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는 표현은 그닥 맞지 않는다.
은밀했고, 살벌했으며 또한.
섬짓-!
공포스러웠다.
천외천인 신정율을 마주했을 때도 괜찮다고 판단했던 선월이 감각을 끌어올려 경계할 정도의 공포였다.
치킥.
치킥치킥치킥치킥.
검은 기운들이 불쾌한 소리를 내뿜으며 핏빛 기운을 집어삼키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군집을 이룬 파리떼가 맹수를 사냥하는 듯한 광경과도 같아 소름이 끼쳤다.
반사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강렬하고 불길한 기운.
단순히 소리만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일으켰으면 직접 상대하면 얼마나 두려울까.
‘건방진 생각이군.’
분명 하윤과 싸우고 있는 자는 전 세계의 헌터 중에서도 최강에 속하는 천외천, 하늘 위의 하늘이다.
고작 전투에 낄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학생이 할 만한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정율의 힘이 설마 과거에 보았던 힘과 비슷한 거 같은데... 착각이겠지.’
한참을 전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선월은 손안에 달미르를 강하게 쥐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생각을 지웠다.
그때, 옆에서 선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이거 받아.”
투욱.
동시에 선일은 조용히 품 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이전에 중간고사 안에서 연합을 맺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빌려 갔던 손거울이었다.
“잘 썼어, 형.”
“이건 갑자기 왜 주는 거냐?”
“나는 다 썼거든. 한번 확인해봐.”
“도대체 뭘 확인... 뭐지?”
평소와 똑같은, 무언가를 꾸미는 듯한 선일의 말투에 선월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손거울을 바라봤다.
직후 선월은 손거울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이 작은 거울에서 달의 마력이 느껴진다. 그뿐만이 아니군. 아버지의 검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압도적인 신성 또한 느껴진다.’
“그거 알고 보니까 달의 초월자가 만들어낸 성유물이더라고.”
선월이 무슨 질문을 할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던 선일은 [밤하늘의 관측자]에 대한 설명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렇다고 만족하고 넘어갈 선월이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책에서 봤어.”
아주 우연히 말이야.
그는 자신의 형이 급하게 뱉으려는 말을 끊으며 씨익 웃었다.
선월은 이런 반응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뻔뻔하게 대답하는 동생을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검이 잘하면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거면 부족하지는 않겠군. 아니, 충분하다.’
“이 물건에 대해서는 따로 말을 듣도록 하지.”
“뭐 시간이 되면 말이야.”
선일은 으름장을 놓는 선월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후 [밤하늘의 관측자]를 달미르와 겹치도록 손을 모은 선월이 눈을 감았다.
우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쳥명한 기운이 흘러나오자 선일은 맘편히 미소지을 수 있었다.
악사영의 전개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어쨌든 신정율이 패배한다는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폭식과 계약한 하윤은 예상과 다르게 혼자서도 신정율을 압도하고 있다.
약화된 폭식이 사라지며 다시금 깨끗해진 성유물을 가진 선월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격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다만 마지막 하나가 부족하다.
‘저 대치 상태가 끝이 나 잠시 틈이 나더라도 외부자의 힘을 받고 있는 신정율로서는 충분히 반응할 수 있겠지. 유일하게 큰 상처를 입힌 건 넓은 범위를 공격하는 열천풍을 쏘았을 때 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선월의 공격도 충분히 피할 확률이 컸다.
강력한 기술은 그만큼 동작과 마력이 크기 때문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신정율의 빈틈을 하윤이 만든다 쳐도 그 틈을 넓히는 역할이 필요해.’
싸움에서 밀려났을 때, 인간은 주변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빈틈을 보인 자는 어떻게든 막으려들 것이고, 빈틈을 만든 자는 어떻게든 뚫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균형을 무너뜨리는 건 무엇일까.
의외의 일격이라거나 혹은 딱 한순간의 동요.
순간적으로 판단이 흐려진다면 바늘구멍만 했던 빈틈은 순식간에 성을 무너뜨릴 거대한 약점이 될 것이다.
‘신정율의 빈틈을 키울 사람은 생각할 필요도 없지.’
처음부터 이곳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신정율과 그에게 힘을 준 외부자에게 동요를 일으키고, 그들이 상상치도 못한 공격을 사용할 인물.
바로 선일 자신이었다.
촤르르륵.
철컥.
선일은 주먹에 있던 건틀릿을 권총의 형태로 바꿨다.
직후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소년의 다리가 백금색의 불꽃으로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