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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하는 거지.’
신정율은 저 위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하윤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분명 전투가 진행되는 공간에는 단둘밖에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헌터라는 종족은 오감이 엄청나게 예민하다 못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육감까지 존재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한 전투 상황에서 단 한 명의 목소리만 구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길하다.’
원래라면 신경 쓸 필요 없이 전투에만 집중하면 되겠으나 신정율은 소름처럼 몸을 타고 오르는 이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겠네.’
결국 하윤의 목소리를 자세히 듣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신정율이 다가가야만 했다.
그는 날개를 이용해 공중에 떠 있는 하윤을 향해 강하게 발을 구르며 점프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 번에 5미터 이상을 뛰어오르는 신정율.
한순간에 하윤이 날고 있는 하늘까지 도달한 그가 하윤을 향해 핏빛 손톱을 뻗는 순간.
콰득!
안타깝게도 갑자기 옆에서 날아오는 미지의 공격에 순간 가로막혀버렸다.
순간 감지하지 못한 신정율은 결국 하윤에게 닿지 못한 채 추락했으나 그의 신경은 온통 자신을 방해한 미지의 공격에 집중했다.
직후.
‘뭐지?’
신정율은 자신을 막은 공격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회색빛 불꽃을 휘감듯 회전하는 검은 기운과 윙윙거리는 소리를 귀를 가렵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무언가와.
하윤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괴상한 검은 육각형을 말이다.
‘저건... 형의 마법에 있는 힘이 아니야.’
아니, 오히려 정반대에 속하는 힘이다.
천사를 상징으로 만들었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성스러운 힘이 느껴지는 세라프와 전혀 다른.
불길하고 위협적이며 그야말로 세상을 검게 덧칠할 것 같은 암울한 기운이다.
흡사 악마들과 그들의 추종자가 다루는 마기처럼 말이다.
‘하윤이에게 저런 힘이 있다는 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15년이라는 시간을 같이 지냈었지만, 저런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치도 못했다.
하윤을 낳은 신정일은 물론, 그가 사랑했던 여성 또한 인간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스러운 기운을 갖고 있었다.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저런 불쾌한 힘이 존재한다는 건 후천적인 것이 분명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악마숭배자나 악마에게 손을 빌리려고 했을 리가...!
휘이이잉...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부정하던 신정율은 자신이 뭐에 막힌 것인지 관찰하며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자신의 몸이 거의 땅에 가까워졌다는 걸 눈치챈 그는 광기를 일으켰다.
일렁.
타악.
곧이어 신정율의 몸에서 일렁이던 핏빛 기운은 하체로 옮겨갔다.
온몸의 광기를 곧장 다리에 집중한 덕분에 그는 안정적으로 착지하면서 동시에 호흡을 고를 시간 없이 곧바로 다시 점프할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위에 있는 소녀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콰득.
욱씬.
떨어질 때 들었던 소리가 다시금 귀를 거슬리게 했다.
그와 동시에 신정율은 팔에서 은근한 통증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팔을 돌아본 그의 시선에는 한 무더기의 검은 물체들이 팔에 달라붙어 있었다.
“...벌레?”
신정율의 말처럼 팔을 들러붙은 검은 형체의 정체는 벌레떼였다.
초월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아마도 파리인 것 같았다.
으득으득으득.
화르르르르륵!
팔에 일으킨 광기로 파리들을 태워버린 신정율의 미간이 아주 약간 찌푸려졌다.
파리가 물었던 곳은 장비뿐만 아니라 살점까지 일부 뜯겨나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평범한 파리는 아니군.’
벌레가 아니라 그 어떤 맹수라 하더라도 헌터나 악마숭배자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은 적을 만큼 신체의 내구성은 절대 약하지 않다.
헌터는 전투 시 마력이나 신성력, 마기를 폭발적으로 뽑아내 사용한 후에는 잔재처럼 신체에 일부나마 남게 된다.
어떤 기운을 다루든 상관없이 헌터의 신체는 그런 잔재들을 본능에 따라 흡수하고, 그렇게 흡수한 잔재들은 헌터의 능력을 영구적으로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경험이 많거나 오래 산 존재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건 외부자나 오래된 자의 힘을 다루는 클리어의 인원들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외부자를 섬기는 이들은 광기라는 특성 탓에 평범한 마인이나 헌터보다도 강력한 성장을 이룩한다.
그중에서도 신정율은 한 오래된 자의 직접적인 관심을 받는 존재.
아무리 광기의 대부분을 다리 쪽에 집중했다지만 인간에게는 미물 혹은 거슬리는 존재로 생각되는 파리 따위가 그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은 절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상처에서 스멀스멀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한.
‘마기, 아니.’
그보다 상위의 힘이다.
신정율은 자신이 했던 걱정이 점점 유력해진 정답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얼굴이 차갑게 굳어갔다.
그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피붙이가 외부자나 악마와 같은 더러운 힘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바랬었다.
형과 형수의 힘만을 계승하기를 바랐으나 저렇게 만든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이곳에서 끝을 내야겠구나.’
“하아하아...”
-그래도 알려준 데로 꽤 잘 따라 하네? 상징체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재능은 충분하구나?
그 시각 하윤은 아래에 떨어진 신정율을 쳐다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하윤을 보며 그녀와 계약한 폭식은 말은 저렇게 했으나 은근히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직전에 그녀가 사용한 기술인 클리포트는 고작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사용하기조차 어려운 기술이다.
게다가 하윤은 폭식의 상징체까지 사용했다.
오랜 시간 동안 계약을 유지하며 초월자의 힘을 이해한 수준에 도달한다면 당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이다.
물론 그것도 웬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으나 하윤은 폭식과 계약을 맺은 지 1분도 채 되지 않은 채 사용했다.
영겁의 시간 동안 살아왔던 폭식조차 처음 보는 압도적인 재능.
반사적으로 감탄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일이다.
욱씬욱씬!
허나 하윤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일조차 힘겨워 보였다.
신정율과의 싸움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10분 정도 지났으나, 그녀의 체력과 마력은 바닥을 보일 정도로 극심한 소모를 보였다.
“워...원래 이렇게 힘...든 거에요?”
-당연하지. 이제 갓 대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햇병아리가 펑펑 써댈 리가 있겠어? 애초에 네 몸은 마력이 부족했다고.
현재 하윤의 몸 상태는 체력과 마력 모두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천사와 악마, 두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었어도 폭식의 말처럼 본신의 마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와중에 여느 비전 마법처럼 극악의 효율을 자랑하는 세라프와 무리해서 불러온 폭식의 권능들까지 사용했으니.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계약자가 되면서 하윤의 몸 상태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폭식이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많거나 상대가 약했으면 네 몸 안의 천사의 힘으로 천천히 회복하며 장기전을 노려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상황이 안 따라주네. 그냥 다른 기회를 노리는 게 낫지 않아?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너 그러다가 쓰러질 텐데? 네가 나와 계약한 이상 언젠가는 신정율을 넘어설 수 있을 텐데.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안 돼요.”
폭식의 권유에도 하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몸 안에 깃든 천사의 힘이 곧 있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윤은 애써 숨을 정리하고 폭식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그거 알아요? 우리 엄마가 대천사였다는 사실을.”
-엉, 조금 전에 계약자가 되면서 네 기억을 전부 읽었어. 좀 놀랍던데?
“그렇다면 잘 알겠네요. 당신 말을 따르면 분명히 신정율을 죽일 기회가 오겠지만 천사의, 엄마의 힘으로 저 사람에게 복수할 기회는 오늘 이후로 오지 않을 거란 사실도.”
하윤의 목소리에는 죽음조차 불사하겠다는 짙은 결의가 담겨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래쪽에서 온몸이 오싹해지는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휴. 고집하다가 죽어도 모른다?
“네.”
결국 하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폭식은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계약자를 위한 폭식이라는 대악마 나름의 배려였다.
우우우웅.
하윤의 아랫배와 심장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지금 사용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폭식이란 존재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도 있는 권능이었으니까.
크르르르...!
쿠와아!!!!!!
하늘에서 불길한 대악마의 힘이 강해지자 지상에 있는 신정율의 몸에 들어있던 광기가 몸서리쳤다.
두렵거나 자신이 질 것 같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그리고 그 손길이 닿은 자의 피를 몸에 적실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이었다.
신정율을 선택한 오래된 자, [크투가]는 피에 미친 존재였으니 말이다.
‘으윽...! 이... 미친 자식이!’
이어서 신정율은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가 자신의 몸을 삼키려 하자 거칠게 저항했다.
그러나 고작 인간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 그의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오래된 자의 광기가 아니라 [크투가] 본체의 의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결국 신정율이 사용할 수 있는 광기가 전부 몸에 깃들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666.”
그는 지금 [크투가]라는 존재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신의 피를 마시는 적색 짐승]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짙은 핏빛 기운을 두른 그가 악마를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갔다.
입과 손, 그리고 눈에 피를 흘리며 말이다.
오소소소...!
아래에서 미친 속도와 위력으로 날아오는 신정율.
소름이 오를 정도로 무서운 힘에 하윤은 도리어 눈을 감아버렸다.
마치 전투를 포기한 것만 같은 태도였으나.
-내 말을 잘 따라 해.
오히려 반대였다.
지금 하윤은 폭식의 권능을 불러오기 위해 준비를 한 것이었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누구의 박동일까.
그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어서 사선도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삼킨다.
“나는 모든 것을 삼킨다.”
-내 안의 모든 것은 섞이고 가로막힌다.
“내 안의 모든 것은 섞이고 가로막힌다.”
윙윙윙윙윙!
클리포트에서 나온 상징체가 호위하듯 주문을 외우는 하윤의 주변에서 빠르게 돌아다닌다.
이제 남은 구절은 단 하나.
하윤은 천천히 폭식의 말을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검은 말을 타고 기근을 퍼트리는 기수의 원형. 멸망을 부르는 칠죄 [폭식].
“나는 검은 말을 타고 기근을 퍼트리는 기수의 원형. 멸망을 부르는 칠죄 [폭식].”
[벨제바브다.]
그녀들의 선언과 동시에 검은 파리떼는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피투성이 짐승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