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171화
이후로 하윤과 신정일과 붉은 여성을 향해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이어갔다.
또 한 명의 절친이자 자신을 잘 챙겨주는 유리라는 소년을 이야기할 때의 하윤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들떠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하하 착한 아이구나.”
“맞아요.”
이후로 선일의 형이라던 남자애에 대해 말할 때는 살짝 짜증이 난 얼굴이었고, 마지막으로 얼음을 다룬다는 여자애를 이야기할 때는 질린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하윤의 얼굴은 처음에 들어왔을 때보다 밝아 보였다.
‘잘 지내는구나.’
신정일은 대견스러운 딸을 보며 칭찬을 속으로 삼켰다.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딸의 표정은 지독한 감정들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점점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수록 표정은 풀어지다 못해 밝아졌다.
들은 내용으로는 좋은 친우들도, 사이가 안 좋은 악우들도 있는 듯 보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원래 사람이란 종족은 그렇게 관계를 이어가 전진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아빠 이야기해주면 안 돼요?”
“그럴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친 하윤은 신정일을 향해 조용한 미소를 지어보았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가족들처럼.
화목한 웃음만 가득한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하윤은 그때 처음으로 신정일의 이야기를 들었다.
태어난 후 처음엔 어떻게 마법을 접했고 또 무슨 일을 했는지를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성장한 자식이 부모의 삶을 궁금해하는 평범한 시간이었다.
“와아...”
밖에 있는 친구 같은 선인들과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악인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윤은 자연스레 빠져들며 감상에 젖었다.
동시에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기분이 푹 가라앉았다.
단둘만 있었을 때 삼촌이 아버지의 영상을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기억들.
분명 행복했었는데...
터억.
“딸.”
그때, 신정일이 하윤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불렀다.
아마도 딸의 복수심이 다시금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왜요?”
하윤은 신정일을 향해 또렷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딸의 모습을 잠시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신정일은 빙그레 웃었다.
아까 전부터 계속 느꼈던 거지만 딸은 그녀와 너무 닮았다.
자신과 닮은 고작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뿐.
그렇기에 기뻤다.
우리 둘을 모두 닮았다면.
아주 착한 아이라는 말이니까.
싱긋.
“엄마의 이야기도 궁금하지 않니?”
“당연하죠.”
진정으로 행복한 웃음을 지은 신정일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버지와는 다른 어머니의 삶.
신정일의 질문에 즉답한 하윤은 그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듣는 것을 기대했다.
“이제 이 엄마의 차례인가?”
아까 전까지 펑펑 울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여성은 어느새 남편인 신정일과 똑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근 17년이나 된 과거를 추억하며 천천히 감상에 젖기 시작한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아빠랑 내가 처음 만난 날은 꽤나 특별했지.”
신정일과의 일들을 뱉는 여성의 표정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처음으로 딸에게 어미의 일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스윽.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신정일은 눈을 감고 생전의 행복했던 기억을 되돌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딸인 하윤의 표정은 달랐다.
“...엄마가 천사라고요?”
“그렇단다. 물론 전직이기는 하지만 대천사의 좌에 있었지. 후훗.”
한참을 얼어붙어 있던 하윤의 입이 열리자 붉은 여성, 미카엘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7대 악마와 대칭을 이루는 7대 천사.
초월자인 미카엘은 평범한 마법사였던 신정일에게 사도직을 제안했고 이후에 사랑에 빠져 자신을 낳았다고 했다.
“엄마...”
미카엘은 하윤은 물기가 젖은 눈으로 미카엘을 바라봤다.
신정일도, 신정율도 말해주지 않았던 출생의 비밀이다.
하윤이 알고 있던 거라고는 자신이 태어나는 날 갑작스레 몸이 약해져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게 초월자와 인간의 사랑 때문에 그 반동을 자신이 전부 감당했던 거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괜찮아, 우리 딸. 엄마는 후회하지 않는단다.”
미카엘은 슬퍼하는 딸의 모습에 오히려 밝고 씩씩하게 웃어주었다.
필멸자보다 강한 초월자에게도 죽음은 차가웠고, 이별은 어려웠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었다는 것도, 초월자였을 때 상상하지도 못했던 가족을 이룬 것도 행복했다.
자신이 느꼈던 모든 안타까움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엄마라는 말은 생각보다.’
듣기 좋다.
사람들이 듣는 사랑 노래보다.
흥을 돋우는 축제의 분위기보다.
훨씬 더.
영원히 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여보.”
“응.”
미카엘은 신정일을 불렀다.
신정일은 그녀가 이야기를 하던 도중 자신을 부른 갑작스러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미 직감하고 있던 바였다.
“하윤아.”
“우리 딸.”
“네?”
신정일과 미카엘은 동시에 하윤을 불렀다.
그들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는 사실에 하윤은 이상함을 느꼈다.
이어서 하윤의 눈엔 두 사람의 기척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어...엄마?아빠? 둘 다 몸이 왜 그래요?”
덜덜 떨던 하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돌아오는 이별이란 차가운 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란 모래가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하윤아. 여기 보렴.”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미카엘이 하윤을 불렀다.
그러나 하윤은 그 목소리를 모른 척 외면했다.
지금 미카엘을 바라보면 이 짧은 만남이 끝이라는 걸 직감했다.
“엄마 처음으로 딸에게 하는 소원인데 안 봐줄 거야?”
미카엘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밝은 말투를 유지했지만 그녀 역시 이별은 슬펐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해서 이쁜 딸과 같이 있고 싶었지만 거스를 수는 없다.
소멸하기 직전, 누군가의 배려로 영혼의 편린을 하윤의 무의식에 남길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아주 예쁜 딸과 만나 즐겁게 대화할 수 있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흐흑.”
결국 뒤를 바라본 하윤은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딸의 슬픔에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아낸 미카엘이 팔을 벌렸다.
“우리 딸 마지막으로 안아봐도 되겠니?”
하윤은 망설임 없이 어머니의 품에 달려들었다.
결국 미카엘은 그제야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작구나. 그래서.”
안을 수 있어.
딸의 몸을 단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던 것.
미카엘의 유일한 후회이자 소원이 지금 이뤄졌다.
화아아악...!
미카엘의 등에서 천사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녀의 머리색과 똑같은 붉은색의 천익.
아주 미약한 대천사의 권능이 딸의 몸에 깃들었다.
하윤은 몸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힘에 미카엘을 바라봤다.
“이건...”
“선물이란다.”
흐르는 눈물을 조금씩 닦아낸 미카엘이 밝게 웃었다.
곧 소멸하게 될 영혼의 힘이었다.
미카엘은 딸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한 뒤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서 아빠한테 가보렴.”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하윤은 뒤를 돌아 신정일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미카엘은 소리를 죽인 채 맘 편히 울 수 있었다.
“우리 공주님.”
신정일은 2년 전과 똑같은 다정하게 미소를 지은 채 울고 있는 딸과 눈을 맞췄다.
그는 미카엘과 다르게 하윤의 머리를 보물 다루듯이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날은 네 잘못이 아니란다. 오히려 내 잘못이지.”
신정일이 언급한 날은 그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날이었다.
동시에 하윤이 자신의 동료를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려 했던 날이었다.
“아쁘아...!”
“그러니까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죽음을 맞은 것은 자신임에도 신정일은 다정한 목소리로 딸을 위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모로서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하윤아.”
“...웅.”
마지막일 수도 있는 아빠의 다정한 목소리에 하윤은 울음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게 신정일은 마지막 소원을 딸에게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정율이가 큰 잘못을 한 건 알아.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잘 알고. 그렇지만 꼭 한 번은.”
대화를 해보면 좋겠어.
마지막 소원은 참으로 소박하면서 거대한 것이었다.
자신을 죽인 장본인이자 딸의 원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랑했던 동생.
이제는 단둘만 남은 혈육이 서로를 죽이는 건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건 너무 잔인하니까.
유일하게 신정일이 할 수 있는 건 딸과 동생의 손에 서로의 피를 묻히지 않게끔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꼭 들어줄 거지?”
오열 중이던 하윤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신정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부터 자신의 얼굴은.
너무나 사랑했던 두 여성과 마찬가지로 일그러져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신정일도 미카엘처럼 하윤의 이마에 작게 키스했다.
직후 그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 하윤에게 들어갔다.
천사인 미카엘의 힘과 인간인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세상에서 유일한 마법 [세라프]
[세라프]를 집대성한 지식들이 두 사람의 열매인 하윤에게 깃들었다.
그렇게.
“밥 잘 먹고 건강해야 한다?”3
“친구들은 많이 사귀고.”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네게 주지 못했던 것 이상으로 사랑하렴.
...네.
신하윤은 웃었다.
하염없이 울면서도 밝게 웃었다.
부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늘에서 잘 보이도록.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안타까웠던 소녀는 밖을 향해갔다.
-여보.
-사랑해.
그리고 한 천사와 한 인간은 아니, 자랑스러운 딸을 가진 부모는.
조용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