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170화
신하윤.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서 있는 남성은 영원토록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스윽.
스으윽.
발걸음을 옮겼다 혹은 걸었다.
아니, 이런 표현은 그녀의 상황과 맞지 않았다.
지금 신하윤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걷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그리움이라는 익숙한 힘과 사랑이라는 알 수 없는 힘.
이 두 가지 감정들이 그녀의 발을 잡아서 끌었다.
아버지로.
자신의 아버지라 보이는 이를 향해.
주륵.
하윤은 한참을 걸었다.
확실하게는 한참이라고 생각될 만큼 체감상 오랜 시간이었다.
하염없이 어두운 공간을 걸었을 때보다 저 앞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게 백 배 천 배 힘들었다.
주르륵.
아버지로 보이는 존재에게 다가가는 동안 하윤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다.
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들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윤에게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어둠보다 이 밝은 빛의 공간이 훨씬 어두웠다.
자신을 향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지 걱정이 되었다.
그가 2년 전 죽은 원인에는 분명히 신정율 뿐만 아니라 자신도 있었으니까.
투욱.
그 순간, 머리 위에 손길이 느껴졌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던, 이제는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몇 날 며칠을 그리워했던 익숙한 감각.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손이 머리 위에서 조용히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하윤의 심장은 격한 파도가 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하윤아.”
목소리를 들었을 때, 파도는 더욱 커져 거세게 심장을 두드렸다.
이제는 확실하게 느껴진다.
쓰윽.
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그녀에게는 영겁과도 같았다.
이어서 완전히 고개를 들었을 때, 하윤은 감고 있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는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성이 들어왔다.
“아...아으아...”
그의 입가에는 누군가와 겹치는 것만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남자를 보자마자 하윤의 눈에서 폭풍우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하윤이 온몸의 힘이 풀려 넘어지려 했을 때, 제대로 말도 못 하는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던 남성이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많이 컸구나. 우리 딸.”
“지...진짜 아빠야?”
평소 하윤의 입에 붙어 있던 존댓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안타까운 운명에 휩싸였지만 원래 그녀는 어디에서나 보이는 어린 소녀처럼 밝은 아이였다.
2년 전의 사건 이후 그녀가 존댓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경계심에서 비롯된 바였다.
“그래. 아빠야.”
신정일은 하윤을 품에 안고 나직하게 긍정했다.
직후 신하윤의 경계심이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에 풀려버렸다.
“으아아아앙....!”
그리움을 느낄 때마다 눈물을 흘렸던 눈가.
그곳을 막고 있는 댐이 터진 것처럼 하윤은 2년 전부터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신정일은 오열하며 자신을 있는 힘껏 끌어안는 자신의 딸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빠!아빠!으으...”
“우리 딸 울보네.”
부드럽게 말하며 딸의 온기를 느끼던 신정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음이 저려오는 부녀의 상봉에 뒤에서 어색하게 움직이던 여성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벅...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신정일에게서 떨어진 하윤은 최대한 울음을 참고 여성 쪽을 바라봤다.
여성의 새하얀 머리카락은 이 공간처럼 은은한 붉은 기를 머금었고, 눈동자 또한 붉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은 함부로 다가가지 못할 것 같은 신성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신하윤’이라는 사람의 17년이라는 짧고 기구한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
“설마...”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처음 만났더라 해도.
응당 가족이라 하면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진짜... 엄마에요?”
“하...윤아.”
붉은 여성은 지금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가슴에 온갖 감정들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움과 슬픔, 안타까움 같은 감정들 중에서도 여성의 심장을 가득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었다.
자신은 저 아이를 낳은 뒤 세상을 떠났으니까.
저렇게 성장한 내 딸을 이렇게 일찍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울컥.
소녀와 여성은 하나같이 똑같은 타이밍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신정일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눈가를 훔쳤다.
분명 자신을 똑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저 광경을 보며 어떻게 착각을 부정할 수가 있을까.
분위기부터 울음을 터트리는 표정까지.
그 누구보다 두 사람은 닮아있었으니까.
***
안타까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던 아버지.
자신을 낳고 세상을 떠났던 어머니.
부모라고 불리는 두 사람과 다시금 조우하게 된 하윤은 한참을 울고 난 뒤 진정할 수 있었다.
물론 붉은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훌쩍훌쩍...”
“엄마, 그만 우세요.”
“미앙.”
오늘 처음 봤다고 말할 수 있는 하윤이 그녀를 위로하며 쩔쩔매고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딸과 부모의 감동적인 재회였을 텐데.
지금은 그저 울보 아이를 보듬는 것 같다.
“여보, 처음으로 아니 오랜만에 만난 하윤인데 그렇게 계속 울기만 할 거야?”
“...아닝.”
신성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던 여성은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곧이어 그녀가 완전히 울음을 그치고 나서야 하윤과 신정일은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후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셋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하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고.
신정일은 자신이 죽고 나서 많이 달라진 듯한 딸에게 어떤 말을 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붉은 여성 역시 신정일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침묵을 깨야 했다.
“...아-.”
“어떻게 살아왔니.”
하윤이 먼저 살얼음 같은 침묵을 깨려는 순간, 신정일이 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하윤.
결국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없으니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어요.”
하윤의 이야기는 신정일이 목숨을 잃은 순간부터 시작했다.
사람들과 동료들, 그리고 가족을 구하려다가 죽은 아버지.
그를 죽인 혈육이자 원수, 신정율은 영웅이라 칭송받았다.
반대로 신정일은 이 세상에 악마를 강림시킨 장본인으로, 자신은 그런 죄인의 딸이라 사람들의 비난과 적의를 받으며 살아왔다.
“매일매일이 죽을 거 같았어요.”
하윤은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이야기를 담담히 뱉었다.
격한 감정을 꾹꾹 누른 딸의 목소리에 붉은 여성은 다시금 울음을 터트렸고 신정일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혹시라도 아빠나 엄마를 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수천 번 생각했지만 그래도 죽을 수는 없었어요. 신정율은 세간에 영웅이라 불리고 아빠는 세상 사람들에게 배신자라고 욕을 먹는게 참을 수 없었어요. 물론 죽는 것도 무서웠지만요.”
“그래...”
입안에 쓴맛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죽음에 대해 고민했다는 자식의 말을 듣는다면 누가 힘들지 않을까.
그 밝았던 딸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했다는 사실에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으나 신정일은 참았다.
참아냈다.
“...많이 고생했구나.”
“...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입술을 물어뜯은 신정일이 조용히 내뱉으며 하윤에게 끌어안았다.
어깨를 끌어당긴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으나 하윤은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게. 열심히 살았구나, 우리 딸.”
이어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닦아낸 붉은 여성이 부녀의 머리를 안았다.
하윤은 다시금 부모의 온기를 느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누가 저를 후원해주셔서 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래? 학교는 괜찮았니?”
어느새 이야기는 처음 학교로 온 순간까지 도달했다.
중학교까지도 자신과 동생에게 교육을 받았던 딸.
이런 이쁜 아이가 학교에 갔다니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마치 아빠처럼요.”
말을 이어가면서 하윤은 자연스레 우연처럼 만난 소년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능글거리고 무언가 꿈꿍이를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멀리하려 했으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와 거리를 두는 건 어려울 것이다.
소년은 말 그대로 태양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하...’
하윤이 누구를 생각하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딸이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부터 단순히 친구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과 지금 옆에 있는 붉은 여성처럼 말이다.
씨익.
신정일은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빠와 삼촌밖에 모르던 딸이 누군가를 찾았다는 것은 분명 좋은 변화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나도 아버지였구나.’
“좋은 친구구나.”
신정일은 조용히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질문에 하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