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무슨 짓을 한 거냐?”
숨을 고르던 선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연했다.
방금 일어난 일은 아버지인 이천야나 성강이라 해도 몇 번이나 물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헉헉... 힘들어 죽겠으니까 궁금한 건 나중에 질문해.”
선월의 뒤에는 자신보다도 배는 고통스러워 보이는 선일이 힘겹게 몸을 가누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차갑고 신경질적인 말투의 동생이었지만 선월은 환자에게 서늘한 분노를 표출할 정도로 악한 성정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앞에 있는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슨 짓을... 커헉! ...한 거야?”
[달의 바다]로 밀쳐냈을 때보다 몇 배는 멀리 밀려난 신정율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의 온몸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 듯한 상처로 가득했다.
이상하게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신정율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광기가 지혈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방금 선일이 쏘아낸 열천풍에 의한 것이었다.
‘9초식 열천풍(熱天風).’
선일의 머릿속에 각인된 적양권 중에서, 정확히는 적양권의 후반부 초식 중에서도 열천풍은 매우 단순한 효과를 지닌다.
뜨거운 하늘의 바람.
말 그대로 열천풍은 마력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다만 이게 일반적인 바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일정 경지에 이른 검사의 검기보다 날카로운 예기와 동시에 일정 층에 도달한 화염술사의 마법보다 뜨거운 고열을 가진 바람.’
듣기만 해도 엄청난 바람을 어떻게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괴물 같은 외부자의 인간에게까지 상처까지 남겼는데.
만약 이런 바람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있다면 세상을 볼 수 없는 봉사나 세상이 꽃밭으로 돌아가는 바보천치일 것이 분명하다.
쿨럭!
‘...확실히 피해를 입힌 건 좋은데 나도 몸이 정상적인 건 아니네.’
아니, 정상을 넘어 이 상태로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통증이 극심한 부상까지 입은 상태로 천류체를 한계까지 미친 듯이 사용한 데다가 적양권의 회복 효과까지 포기한 채 초식을 펼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탓에 선일은 입가에서 쿨럭하고 피를 토해냈고 몸통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상처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스슥.
선일은 입가에 묻어있는 검은 피를 무복 소매로 닦아냈다.
여전히 아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춰 있을 수는 없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멈추면 안 된다.
태양의 불꽃으로 회복을 최대한 억제했어도 저 괴물 같은 인간이 언제 다시 달려들지 모르니까.
즉 지금이 적기라는 거다.
“퉤! 다들 공격해!”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다.”
우우우우...
조용히 대답한 이선월이 들고 있는 달미르의 검날에 마력을 모았다.
밝은 달빛처럼 깨끗하고 맑은 푸른 달빛이 용의 비늘에 덧씌워진다.
“갈라틴! 칼리번!”
신정율을 기준으로 왼쪽에서는 붉은 대검 [갈라틴]이, 오른쪽에서는 금색 장검 [칼리번]이 허공에 빛을 뿌리며 쇄도했다.
검사가 칼날에 마력을 담는 것처럼 단순히 유리 자신의 마력으로 강화하기만 한 에고 소드들.
위력은 정식으로 시전한 [왕의 마법]과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그녀도 깨달은 거다.
신정율이 처음으로 큰 상처를 입은 지금 그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점을 말이다.
쉬쉬쉬쉭!
황신영 또한 유리와 마찬가지.
어딘가에 있는 나무에서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얼음 화살을 퍼부었다.
처음에 그녀가 쏘아냈던 기술인 한빙살은 광범위하게 쏘아내며 움직임을 제한했지만, 지금은 오직 한 곳에만 화력을 집중했다.
촤라락.
철컥!
선일은 이미 양손의 건틀릿을 권총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극심한 상처를 입은 지금 거동이 버거우니 적양권으로 근접전을 펼치기보다는 사격으로 견제를 하려는 것이다.
한 발 한 발의 화력은 초식과 비교가 힘들지만, 여명과 황혼에 각각 존재하는 스킬이라면 꽤나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을 테니까.
‘얼른 신하윤이 와야 할 텐데.’
신정율의 마지막은 그녀가 끝 맞춰야 한다.
그를 죽이는 건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이자 아버지의 복수란 이름의 숙명을 걷는 신하윤의 일이라고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단순히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벌이이다.
다시금 ‘악사영’의 중간고사를 떠올린 선일은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탕-!
“하하...”
정면에서는 막을 펼치며 쏘아지는 총탄과 상처를 입었다는 걸 믿지 못할 속도로 달려드는 소년 검사.
양쪽에서는 강대한 마력으로 감싼 두 개의 아티팩트들이 날아오고, 후방에서는 서늘한 냉기를 흩뿌리는 얼음 화살이 다가온다.
처음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쉴 시간도 안 주는구나.”
요즘 애들은 참 잘 배웠네.
광기가 회복으로 돌아서며 일부나마 제어가 가능해진 신정율은 쓴웃음을 지으며 방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다른 학생들이 신정율과 격한 전투를 하는 동안 신하윤은 어두운 방에 힘없이 앉아있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흐릿한 그녀의 눈동자는 새까만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는 신하윤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니,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생기가 없었다.
타인의 시선.
자신의 인식.
전부 잊어버린 그녀의 눈은 말 그대로 죽어있었다.
그 순간, 하윤의 손이 움찔거렸다.
치지직.
마치 보이지 않는 리모컨의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그녀의 시야 앞에 노이즈가 들어왔다.
남들의 눈에는 마법이나 주술 같은 효과도 없는 흑백의 노이즈였지만 이 공간의 주인인 하윤의 시선에는 달랐다.
주르륵...
“아...아...”
흐릿한 눈동자에서는 한줄기의 눈물이 흘렀고 힘겹게 연 입에서는 당연한 언어가 아니라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웅웅거리는 노이즈는 하윤의 귀에 익숙한 소리들로 변했다.
-하하하하!
제일 먼저 들린 건 시끌시끌한 웃음소리였다.
심장이 따뜻해지고 행복만 가득한 단란한 가족들에게서만 나오는 소리이다.
-아빠! 삼촌!
다음 건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와 보드라운 살결을 가진 소녀의 얼굴에는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어린 시절의 신하윤 자신이었다.
-우리 딸! 아빠 기다렸어?
-하윤이, 너 얼른 손 씻고 와!
어린 하윤의 웃음에 호응하듯 웃음기 섞인 어른들의 말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와 순수했던 시절의 삼촌이었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 돌아가고 싶은 시절.
두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아무 걱정 없었던 과거는 이젠 누군가의 꿈이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그저 아름답고 슬프기만 할 뿐인 기억.
-...하윤아.
‘어...?’
신하윤이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익숙한 가족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남아있던 가족은 아버지인 신정일과 삼촌인 신정율처럼 남성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부른 이는 절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여성의 것이었다.
여성의 음성은 이어졌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 □□가 없어도 항상 행복해야 해.
-그 어떤 역경이 닥쳐도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렴.
-언제나 내가 너를 바라보고 지킬 테니.
-다시 한번 사랑한단다.
-영원히.
주르륵.
여성의 음성, 아니 편지를 듣자 어째서인지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이 감정은 뭐라 했더라.
그래.
그리움이었다.
‘누구지...?’
목소리를 찾고 싶어진 하윤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하염없이 걸었다.
하윤이 자리 잡은 검은 공간은 정신의 심층 세계라 부르는 곳이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 잊기 싫은 추억 하물며 잊고 싶은 악몽이 전부 기록되어있는 정신 즉 무의식이었다.
‘하아하아...’
얼마나 걸었을까.
사람들을 인도하는 불빛도, 이정표도 없이 앞으로만 걷던 하윤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잔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발로 직접 움직여야 한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매우 고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잔재가 기억에 남았다면 그만큼 가깝지만, 말 그대로 어딘가에 박혀있다면 그 장소는 의문에 갇혀있다.
어디까지 또 언제까지 가야 할지 모르니까.
하아하아.
욱씬.
턱 끝까지 가쁘게 차오르는 숨.
걸을 때마다 아파오는 머리와 심장.
행복한 추억, 고통스러운 기억과 슬픈 경험 그리고 분노를 자아내는 과거.
모든 걸 마주하며 마음이 꺾일 만도 하지만 하윤의 발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리움의 정체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울컥.
이름도, 목소리도, 얼굴도, 성격도, 분위기도, 하물며 웃는 이유도.
전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웃는 걸 보면 그들과 가까웠던 사이인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을 되돌릴수록 고통스럽고 통탄할 뿐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을 거야. 아니, 멈출 수 없어.’
하윤은 움직였다.
그녀의 발이 닿는 무의식은 아버지를 잃었던 그 날의 과거처럼 검었지만.
화아악...!
언젠가부터 은은한 붉은빛으로 밝아지고 있었으니까.
하윤은 직감했다.
빛이 완연하게 강해졌을 때.
그리움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으윽...’
붉은빛이 점차 강해진다.
어느새 빛은 검은 공간에 적응되어 있던 그녀의 눈이 부실 만큼 밝아졌다.
하윤은 생각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 슬픈 그리움의 이유를 볼 수 있다.
그렇게 하윤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 눈물로 얼굴이 범벅되었을 때.
-하윤아.
-오랜만이구나.
봄처럼 포근하고.
여름처럼 뜨거우며.
가을처럼 씁쓸하고.
겨울처럼 차가웠던.
-우리 딸.
-우리 딸.
사랑의 온기와 이별의 냉기로 잔뜩 물들였던.
잊을 수 없는 남자.
잊을 수밖에 없던 여자.
자신이라는 열매를 맺었던 두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