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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율이 광기의 메시지에 당황했을 때, 선일은 감정을 날카로운 칼날처럼 벼리며 신정율을 살폈다.
그의 머릿속은 전투에 방해되는 잡생각들은 모두 치워놓은 채 ‘외부자의 개’라는 빌런의 빈틈만 찾고 있었다.
언제든 여명의 스킬, ‘프로미넌스 레이’를 적중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저렇게 무방비한 상태인데도 제대로 된 틈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선일은 모든 스킬을 발동한 상태였다.
적양권, 천류체,
천외천의 강자가 쉽게 빈틈을 보일 리가 없었다.
‘오는 건가.’
신정율이 있었던 자리에 더 이상 영웅은 없었다.
검은 잔상을 털처럼 휘날리며 선명한 피를 잔뜩 입에 머금은 금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666.”
[붉은 짐승]
쿠구구구...!
어떤 수식어도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붉은 짐승]
인간의 살을 씹고 피를 삼키는 흉악한 악수(惡獸).
그런 흉수가 지금 선일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으르르르....
꿀꺽...
선일은 앞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히 앞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어떤 것이든 상하관계는 존재한다.
갑과 을.
강자와 약자.
그중 현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바로.
포식자와 피식자.
‘하하... 이런 감정은 거의 두 달만이네.’
빙의 이후 들어간 첫 번째 던전.
그곳에서 밤피르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무력감을 지금 신정율의 앞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내가 어째서 하윤이를 찾는지. 또 나에게 외부자의 힘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만.”
알아볼 기회는 많겠지.
섬짓...!
거대한 살의가 나를 잡기 위해 움직인다.
S급 이하의 헌터라면 움직일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베테랑들보다 나약한 학생이라면 움직이기는커녕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을 것이 당연하다.
그래.
약한 인간이라면 말이다.
타탓!
선일의 발은 조금의 주춤도 없이 앞으로 달렸다.
신정율과 직접 근접 전투를 펼치기 위해.
무모한 짓이었으나 ‘프로미넌스 레이’를 적중시킬 틈을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보다 몇 배 이상 강한 적의 기운을 마주했으니 평소만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평소보다 둔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지금까지 고된 성강의 훈련을 받아왔던 그에게 신정율의 기운은 충분히 버티고도 남을만한 힘이었다.
게다가 신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적양권, 하늘의 흐름을 읽는 천류체 이 두 스킬이 선일의 근육과 신경, 마나 코어 등 온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활기를 불어넣었다.
물론 선일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 중요한 점은 아니었다.
“빠르구나.”
부드럽고 난폭한 미성이 귀를 스쳤다.
신정율은 어느새 밀쳐내기 전처럼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촤아악-!
‘오른쪽에서 떨어지는 사선 베기.’
아니, 베기보단 찢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공격.
금수의 앞발이 가진 강렬한 폭력이 소년에게 쏟아졌다.
화륵.
불꽃이 일렁인다.
외부자의 광기에 대응하는.
초월자의 신성이다.
촤락.
백색의 총기는 금빛의 탄환을 발포하지 못했다.
아니, 발포하지 않았다.
총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기에는 너무 늦었으니까.
대신 백금색의 금속은 주먹을 방어하는 작고 단단한 벽이 되었다.
콰드드드득...!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게 만변무형은 아니다.
악사영이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어떤 아티팩트, 어떤 성유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강의 경도.
그게 과연 외부자의 힘에도 통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외부자의 힘을 두른 신정율의 손톱이.
초월자의 힘을 두른 이선일의 장갑에 가로막혀 부서졌으니까.
“...!”
“후우...”
최고의 경도를 방어에 이용할 때는 더없이 든든해진다.
나를 지키는 방패가 되고, 사람을 지키는 성벽이 된다.
그렇다면 공격으로 사용될 때는?
부서지지 않는 방패의 단단함이 적을 노린다면?
고오오오...
그때 비로소 방패는 변한다.
날카로운 끝은 적의 살을 꿰뚫는 창이 되고, 단단한 표면은 적의 뼈를 부수는 해머가 된다.
“적양권 1초식.”
태양의 근원이자 중심인 광구(光球).
인간의 존재감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불꽃이 피 묻은 짐승의 아가리로 향한다.
-XXXX!
분노에 찬 광기가 소리친다.
지금 [붉은 짐승] 안에 들어가 있는 광기의 양은 정확히 20퍼센트.
제어할 수 있는 광기의 절반 이상이 들어간 흉수가 말한다.
[저놈을 죽이라고.]
오싹...!
주먹을 날리던 선일은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만약 그게 맞다면 이전에 그의 공격을 막을 때부터 몸을 더더욱 강하게 압박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갑자기 신정율이 이런 기운을 내뿜는 이유가 뭘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걸 알아볼 시간은 없었다.
웅.
순간 무적을 집어넣어야 할지 고민했던 선일.
그는 손에 쥔 여명에 마력을 잔뜩 주입하며 전음을 보냈다.
-시작해 형.
-알았다.
단 0.1초의 텀도 없이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이 된다.
직후.
“백천창월류 우수식.”
“검은 기사를 위해, 기사는 왕을 위해.”
“조상이시여...”
소년과 소녀들의 목소리가 선율처럼 두 사람의 귓가를 흔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선일과 신정율의 반응은 극적으로 달랐다.
광기를 다루는 강자는 의문을.
태양을 다루는 약자는 웃음을.
직후.
“초승달 베기.”
“아발론!”
“한빙살(寒氷撒)!”
목소리가 들린 지 약 3초도 되지 않아 온갖 방향에서 공격들이 날아들었다.
위쪽 하늘에서는 하늘색의 차가운 화살비가.
양쪽 측면에서는 금색의 아름다운 검화가.
뒤쪽 허공에서는 푸른색의 날카로운 검기가.
마지막으로.
“홍일강권.”
정면에서는 붉은색의 위협적인 권강이.
전부 천외천, 아니 외부자의 개 한 명을 향해 쏟아졌다.
‘이런...!’
신정율은 온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들이 전부 학생들이 펼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직전에 탈락시켰던 학생들과는 다르다.
그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위력.
공격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충분히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운이 담겨 있다.
‘피해야 한다.’
전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들을 방어하기에는 늦었다.
답은 회피.
허나.
어디로?
찰나의 망설임.
망설임은 전투에는 독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수많은 경험을 한 베테랑도, 아직 어린 학생들도.
사선에 몸을 담근 헌터인 이상 잊으면 안 되는 법칙이다.
-...XXX, X XX.
내놔라, 네 몸을.
추악한 음성이 머릿속에 날아든 순간, 제어하고 있던 광기의 의지가 더없이 명확해진다.
자연스럽게 의지가 강해지며 [붉은 짐승]에 들어가는 광기의 양 또한 급증한다.
신정율이 제어 가능한 최대 광기의 30퍼센트를 넘어 순식간에 35, 40, 50퍼센트까지 치솟는다.
직후.
슈카아악!
콰지직!
소소소솟!
주인에게서 벗어난 수많은 공격들이 신정율에게 도달했다.
아니, 신정율이 있던 ‘자리’에 공격들이 도달했다.
화아악!
흙먼지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코앞에서 공격을 날렸던 선일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신정율은 공격을 하나도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떻게?’
어떻게.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바로 이거였다.
재능 넘치는 ‘악사영’의 주조연들.
그들이 각자 기운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부은 절기들이 상하좌우 모든 방향에서 쏟아졌던 상황이다,
아무리 외부자의 힘을 가진 천외천이라 해도 완전히 회피할 수 있지 못할 거라 장담했다.
“너희들의 힘은 위험하다.”
그러나 그는 피해냈다.
흙먼지가 걷히자 선일의 눈앞에는 온전한 상태의 신정율이 서있었다.
피해를 입은 기색은커녕 변화조차 거의 없었다.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변화라면 핏빛 기운이 더 짙어졌다는 점일까.
스윽.
신정율의 팔이 흐려졌다.
단순히 피한 것으로도 모자라 바로 앞에 있는 선일을 향해 온전히 남아있는 손톱을 휘두른 것이다.
공격이 오는 건 보았다.
그러나 다섯 수, 열 수 앞에 있는 강적의 공격을 본다고 해서 온전히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회피 역시 불가능.
촤자작...!
결국 반응이 늦은 선일이 입은 무복에 네 줄기의 붉은 선이 그어진다.
실선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얇았던 선은 그대로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푸슈슈슉!
선홍색의 피가 하얀 무복을 적시기 시작한다.
밤피르 이후 처음 입은 깊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
그로 인해 선일은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컥!”
“단단하네.”
이어서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선일의 상처에 딱딱한 무언가가 조용히 다가왔다.
무언가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운에 그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리려고 했으나.
까드드득...!
이미 소년의 눈에서 짐승은 멀어졌다.
언제 저기까지 간 걸까.
의문에 대한 해답을 깨닫기에는 그의 정신이 흐릿해졌다.
뒤이어 갈비뼈를 유압프레스로 짓누르는 듯한 강렬한 충격이 중추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쿠우웅!
선일의 몸은 쓰레기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한참을 굴러온 그의 무복은 땅바닥의 흙먼지로 더럽혀졌다.
“커헉...!”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선일은 검은 핏덩이를 토했다.
인간이 가진 생존본능이 반사적으로 고통을 둔하게 만든다.
그로 인해 가뜩이나 느렸던 반응이 더더욱 느려지기 시작했다.
“끝이다.”
단 한 번의 발돋움으로 거리를 좁힌 신정율이 다시금 피로 물든 손톱을 휘두른다.
죽음, 그 불쾌한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쿠콰콰콰!
타닥.
허나 죽음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어느새 다가온 여덟 자루의 검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화살들, 그리고 그와 대칭되는 검은 무복을 입은 한 소년이 핏빛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그그극!
“허.”
신정율은 자신의 움직임을 막아선 검은 머리의 소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광기가 말한다.
저 녀석 또한 위험한 냄새가 난다고.
그렇게 외부자의 개가 흥미롭게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목덜미를 스치는 살기를 감당하고 있던 이선월이 소리쳤다.
“으윽! 이선일! 정신 차려라!”
‘...차려야 해.’
하아하아, 깊은 상처를 입고 순간적으로 머릿가 멍해졌던 선일은 검처럼 날카로운 이선월의 음성에 다시 집중했다.
아쉽게 공격은 통하지 않았지만 괜찮다.
안타깝게도 상처를 입었지만 괜찮다.
애초에 이번 공격으로 신정율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최대한 신정율을 밀쳐낼 수 있어?
선일의 전음에 이선월은 검으로 대답했다.
다른 적이었다면 베는 것에 집중했겠지만 천외천을 상대로는 막아서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끼긱.
벽을 넘어섰다 한들 같은 급은 아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단순히 버티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근육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허나 이선월은 이겨냈다.
그리고 믿었다.
‘백천창월류.’
빌어먹을 동생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이 상황을 타파할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울컥울컥.
한계를 넘어서는 기운을 마주했기에 속에서 죽은 피가 역류한다.
본래라면 뱉겠지만 이선월은 피를 한 번에 삼켰다.
꿀꺽.
붉은 짐승을 막아선 푸른빛의 검기가 날에 집중되자 남색으로 변했다.
이렇게 힘을 집중하는 기술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곧장 내상을 입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선월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모았다.
그렇게 짙다 못해 완전한 검은색으로 변했을 때.
“달의 바다.”
흑색 검기는 진동과 함께 넓은 범위로 퍼져나갔다.
말 그대로 바다를 연상케 하는 백천창월류의 범위기였다.
경지에 이른 이선월이 사용한 [달의 바다]는 난폭한 해일이 되어 적을 휩쓴다.
허나 상대가 좋지 않았기에 이선월의 검기는 광기에 막혀 잔 상처 몇 개들과 함께 밀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허억허억... 네 말대로 했다.”
끄덕.
숨을 헐떡거리며 힘겹게 목소리를 뱉는 이선월을 향해 선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밀쳐내기만 해도 충분하다.
고고고고고...
몸에 깃든 천류체를 회복에 집중하며 순식간에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인다.
빠르게 차오르는 단전의 마력 코어.
마력이 회복되는 즉시 심장 쪽의 코어로 올린다.
생명을 관장하는 태양의 성질이 강렬하게 움직이는 생기를 뿜어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만감을 일으킨다.
두근...
미약한 두근거림과 함께 선일의 몸이 움직인다.
시작을 상징하는 여명은 머리를 막을 수 있도록 이마 앞에 위치했으며 끝을 상징하는 황혼은 복부를 가릴 수 있도록 단전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주먹을 다루는 무투가의 자세라기에는 그의 자세는 특이했다.
본디 무술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데에 중점이 있다.
그러나 선일이 삼은
인간에게 중요한 장기와 상처를 막지 않고 방치했으니 이 어찌 무술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움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힘은 평소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심장을 중심으로 원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호흡을 시작한 심장처럼 땅이 약동하기 시작했다.
“적양권... 9초식.”
열천풍(熱天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