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165화
주먹을 꽉 쥐고 선언하는 선일의 모습에 일행들 모두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이후 나타난 세 사람의 반응은 전부 가지각색으로 달랐다.
“...?”
고작 몇 마디일 뿐인데.
황신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얼어붙었다.
억지로 머리를 돌려 선일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해봐도 이성은 미래를 부정하며 도피를 원할 뿐이었다.
“...돌겠군.”
웬만하면 비속어를 뱉기는커녕 입에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선월이 말했다.
평소보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 심각성이 가득 드러났다.
연회 때 강적을 사냥한다고 하길래 당연히 그 3학년 교사라고 생각했다.
아니, 내심 그녀를 상대하기 바랐다.
이 시험에서 3학년 교사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신정율을 마주했을 때보단 승률이 높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이번 시험에 강적으로 등장하는 길드 [불사르기]의 리더, 신정율.
그는 선일과 선월의 아버지인 천검 이천야와 똑같은 이명을 가지고 있다.
하늘 위의 하늘.
천외천.
아무리 그가 말석이라고 해도 이들 수준으론 파훼는커녕 읽을 수도 없는 수준의 강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선월’이 당신에게 의문을 가집니다.]
형의 감정이 설정창을 통해 텍스트로 선일에게 알려졌다.
‘당연하겠지.’
그리고 선일은 망설임 없이 그의 의문에 대해 수긍했다.
자신은 강적을 사냥한다고 말했지, 콕 집어서 한 사람을 특정하지 않았으니까.
누구를 상대할지는 ‘강적’ 시스템이 등장하고 나서야 처음 이야기한 것이다.
분명 선월은 이 멤버로 3학년 교사라면 어떤 방법이든 이용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선일은 그들이 모르는 걸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형의 생각은 틀렸어.’
상대하기 쉬운 것은 오히려 반대라는 사실을.
작가인 선일은 신정율에게 존재하는 약점‘들’과 그에 대한 상대법 같은 정보들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비하인드의 공간에서 보았던 기억을 통틀어 전부를 말이다.
“분명히 할 만해.”
“...믿어보지.”
싱긋.
짧은 문답을 나눈 선월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긴 선일은 이어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어째서인지 유리는 말하기 전부터, 아니 방에서 나오기 전부터 얼빠진 얼굴로 선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어?”
그가 말을 걸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리의 눈빛이 맑아졌다.
이어서 유리는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선일의 앞에서 천천히 입을 벌렸다.
“...하윤이는 괜찮은 거야?”
“응?”
그녀에게 질문을 받은 선일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연합 중에서 유일한 마법사인 유리의 성격상 어째서 상대로 천외천을 선택했는지, 혹은 천외천과 싸우는 방법이 존재하는지를 물어볼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물은 예상 밖의 질문은 선일이 숨기고 있는 한 가지와도 관련이 있었다.
흠칫.
그들의 뒤쪽에서 잠자코 서 있던 하윤이 갑자기 몸을 떨었다.
유리가 한 질문에 당황한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선일이 모를 리가 없었다.
웅.
선일은 아무도 모르게 마력을 일으켰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실처럼 얇고 섬세한 마력은 선일과 하윤 사이의 공간에 동화되었다.
이어서 마력의 실이 소녀와 연결되자 소년은 그 속에 의지를 닮았다.
-제대로 연기해.
살고 싶으면.
부드러움으로 무장한 소년이 보냈다고는 믿기지 않는 살벌한 의지였다.
의지는 소녀의 머릿속에서 문장으로 변했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몸의 떨림을 억지로 멈췄다.
“전... 괜찮아요.”
‘연기 잘하네. 역시 악마.’
자연스레 연기하는 하윤을 보며 선일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는 하윤이 아니었다.
싸운 이후부터 하윤의 육체를 차지한 폭식은 여전히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폭식의 현재 상태는 그녀에게 갇혀있는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가둔 건 [밤하늘의 관측자]지만.’
전 칠죄 [폭식]을 상대로 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아티팩트는 지금 선일의 손에 없었다.
그러나 선일은 [밤하늘의 관측자]가 가진 세 번째 효과를 사용 중이었다.
‘역시 확실하네, 성유물은.’
악사영의 설정에서 달의 초월자가 가진 힘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존재를 감시하고 정화한다.
그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은 전부 정화의 힘을 일부나마 가지고 있는다.
[밤하늘의 관측자]가 가진 효과 역시 마찬가지.
떠오르는 달을 비추는 거울은 부정한 존재를 약화시키고, 실체화시키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부정의 힘을 봉인하고, 몸에 가둬 봉쇄하는 힘.
한 번 죽었던 폭식의 존재감은 너무나 미약했고 성유물은 그녀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격이 높았다면 실패했겠지.’
물론 선일은 애초부터 실패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빙의 후 하윤을 처음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생각해두었던 계획이었다.
말 그대로 원작자로서 역량을 힘껏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여기까지는 성공적이었는데.’
갑자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생각을 이어가던 선일의 웃음이 조금씩 삐걱거리자 ‘표정 숨기기’는 곧바로 그의 감정을 숨겼다.
‘원래 내가 성유물의 힘으로 봉인한 폭식이 신하윤과 계약을 맺게끔 유도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작은 변수가 생겼다.
몸을 뺏긴 시점 이후부터 신하윤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원작과 다르게 폭식을 제거하지 않았으나 존재감이 약해진 이상 다시 본체의 의식이 돌아와야 하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쓰읍...
신하윤은 어째서인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급해진 선일은 폭식에게 그 이유를 물었으나 되돌아오는 답은 자신도 잘 모른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지만 하윤과 폭식은 엄연하게 다른 존재였으니 각자 가진 무의식에는 거의 간섭을 못 한다는 이유였다.
가장 큰 적이 외부자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선일은 어쩔 수 없이 폭식의 힘을 일부 해제했다.
그녀를 이용해 3일 안으로 하윤의 의식을 되찾아오라 협박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하윤의 의식은커녕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여전히 신하윤이 나올 기미는 없냐?
-으응...
-네가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아니야!
합리적인 의심에 폭식은 선일이 쏘아낸 마력의 실을 이용해 격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메시지에는 자신을 죽일 뻔한 존재가 각인시킨 공포가 내포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숨었냐, 신하윤. 걱정되니까 얼른 나와.’
이 목소리는 들리지 않겠지만.
선일은 이 마음이라도 어떻게든 전달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
화아아...
하늘에서 두 개의 빛 무리가 나타났다.
빛 무리는 자연스럽게 땅에 떨어지더니 두 개의 신형으로 변했다.
쥬세피나 바르사와 신정율.
중간고사의 마지막 조건, [강적]이 사선도에 등장한 것이다.
“흐으으음~”
움직이기에 앞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쥬세피나가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에게는 오랜만에 느끼는 고향의 향기였다.
철그럭.
우웅.
차칵차칵.
들뜬 쥬세피나의 옆에는 신정율이 말 한마디 없이 장비들을 점검했다.
그가 입은 장비들은 전부 일반적인 마투술사와는 거리가 먼 물건들이었다.
마법사처럼 마력을 다루면서도 무인처럼 움직이는 마투술사.
그들은 날렵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벼운 복장을 선호하지만 신정율은 마법사들이 착용하는 일반적인 로브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손에는 질긴 가죽으로 만들어진 붉은 장갑이 있었다.
이어서 신정율은 열 개의 손톱에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칼날들을 끼웠다.
그렇게 완성된 장갑은 짐승의 것과도 같아 살벌함을 자아냈다.
“후우...”
“신정율 형제님은 어디로 가실래요?”
그의 전투 준비가 완전히 끝나자 쥬세피나가 말을 걸었다.
정비는 끝났지만, 신경이 다른 곳에 팔려있던 신정율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예?”
“저희 둘이 같이 다니는 것은 밸런스 파괴잖아요? 적어도 학생들한테는 기회를 줘야죠.”
언뜻 평범한 말이었지만 신정율은 쥬세피나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외부자나 오래된 자를 모시는 사람 특유의 광기가 그녀의 눈에 비추어 형형한 안광이 그의 몸을 훑었다.
물론 신정율도 다른 생각이 존재했기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아, 저는 저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제가 반대쪽으로 갈게요! 헤헤.”
쥬세피나는 헤픈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저 순수한 얼굴 속에 기괴한 광기와 열망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그녀처럼 신정율 또한 광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광기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인간이 타인을 존중하듯 클리어가 모시는 신들도 서로의 결정을 존중한다.
“저 먼저 움직일게요. 오늘 저녁에 봐요!”
어떻게 행동할지 완벽하게 조율이 되자 쥬세피나가 먼저 움직였다.
곧이어 그녀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떠나갔을 때, 신정율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고 싶구나. 내 조카야.”
바깥의 존재에게 몸을 넘긴 청년.
그의 광기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혈육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동시에 학생들의 워치에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강적이 도착했다.]
그렇게 에피소드의 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