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162화
며칠 전.
“...후우.”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단 하루 전 천검이가가 개최한 연회에서 도망치듯 발코니로 나온 선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연회는 힘들다.
그저 참가만 하는 것부터 체질에 맞지 않는데 연회의 주연으로써 있는 중압감은 답답했다.
“...이럴 시간에 검이나 휘두르고 싶군.”
천생 무인인 그로서는 이런 연회 같은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행사보다는 검을 휘두르는 대련이 훨씬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 갑갑한 옷을 벗고 연무장에서 혼자 수련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한 가문의 미래를 이끌 후계자는 이런 답답한 자리도 참석해야 하니까.
하물며 연회를 개최한 이유가 자신이니 더더욱 빠지면 안 된다.
꽈아악!
주먹을 꽉 쥔 그는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아쉬웠다.
넥타이를 거칠게 뽑아버리며 목을 꽉 막고 있는 셔츠의 윗단추를 풀은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휘이잉...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의 뺨에 스쳤다.
선월은 거대한 본가의 공간 중에서도 이곳을 가장 좋아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
낮에는 태양이 존재했던 중앙을 차지한 달.
마지막으로 고민거리를 날려주는 듯한 시원스러운 바람까지.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세상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걸 느꼈다.
“좋군.”
선월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그저 풍경을 만끽하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집중은 난입한 누군가에 의해 깨져버렸다.
드륵.
저벅.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선월은 순식간에 몸을 돌렸다.
정확히 0.5초 만에 경계를 취한 선월은 곧장 검을 뽑기 위해 허리춤에 손을 올렸지만, 연회장 내에서는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너무 경계하는 거 아니야?”
익살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들어온 상대방은 아무 생각도 없다는 것처럼 손을 들어 올린 채 힘없이 휘저었다.
상대방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선월은 그의 손에 있는 특이한 문양의 장갑 한 쌍을 보고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뭐냐, 이선일.”
“놀랐어?”
씨익.
달빛을 받으며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한 소년을 보며 선월의 표정은 짜게 식어갔다.
그의 눈에 보이는 쌍둥이 동생은 단정한 복장을 갖춘 채 한 손에 기포가 올라오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긴 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이라기에는 어딘가 부적절한 모습.
선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녀석이.”
“아, 이거? 술 아니야. 사이다거든.”
“...”
확실히 사이다였다.
선월은 침묵했다.
그의 반응이 꽤나 살벌하면서도 재미있었기에 선일은 킥킥거렸다.
“큭큭.”
“...도대체 왜 온 거지.”
원작이나 빙의 첫날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관계.
세간에 말하는 형제간의 우애는 여전히 없었지만,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로를 향한 아주 미약한 신뢰 정도는 생겼지 않았을까.
작가지만, 작가가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은 아니야
적어도 가로막고 있던 철옹성에 아주 작은 흠집.
혹은 두꺼운 허물의 일부 정도는 벗겨냈다.
“하아...”
선일의 생각을 모르는 이선월은 경계를 풀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형.”
선월을 부른 선일이 짓던 웃음의 성질이 변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처음에 장난스러운 느낌과는 다르게 어딘가 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반사적으로 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선월이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형을 향해 선일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안할 게 하나 있어. 아니, 거래.”
“무슨..?”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선월은 떨떠름했다.
직후 그는 발견했다.
항상 동생의 입가에서 맴돌고 있던 웃음.
부드럽지만 꺼림칙하게도 속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그 표정이.
사아아...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다다른 벽.”
내가 넘는 법을 알려줄게.
***
신하윤의 몸을 빼앗은 폭식.
그녀는 분위기가 달라진 선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손거울은 뭐지? 꽤나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하하.”
선일은 말없이 웃었다.
분명 나의 개입으로 원작과 같은 전개는 비틀어졌을 텐데.
어쩜 저리 원작과 똑같을까.
선일은 입을 열었다.
‘그때 이선월은...’
“너에게 불길하다면 우리에게는 참으로 이롭다는 뜻이지.”
[네년에게 불길하다면 나에게는 참으로 이롭다는 뜻이지.]
선일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이선월의 대사를 인용했다.
원체 차갑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 이 세계의 주인공과 말투나 분위기가 비슷해졌다.
머릿속에서 헤엄치듯 떠다니는 글자들이 그를 조금씩 침식하고 있었다.
덮어쓰기의 영향이었다.
“하...!”
폭식은 기가 차는 듯 헛숨을 터트렸다.
그녀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웃음을 지은 선일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잘 봐.”
악사영에서 이선월은 이 거울을 사용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나는 다르다.
지금부터는 등장인물의 역할이 아니라.
[작가의 영역이다.]
키이잉...
손에 마력을 주입하자 손거울의 표면이 빛났다.
짙은 푸른빛과 은은한 노란빛이 점점 거울의 면을 삼키기 시작했다.
둘의 조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답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쿠웅.
“어라...?”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폭식이 무릎을 꿇었다.
아니.
‘신하윤’의 몸이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폭식은 느꼈다.
기껏 얻은 몸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자신의 존재감이 흐릿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와서 힘겹게 모은 권능 역시 소멸하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을 감추지 못한 폭식.
죽음이라는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그녀의 눈동자는 심각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선일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거울의 이름은 [밤하늘의 관측자]야.”
연회에서 제안했던 거래의 조건은 단순히 중간고사에서 선일 자신의 연합이 되어달라는 이야기 하나가 아니었다.
벽을 깨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자신에게 이 [밤하늘의 관측자]를 넘기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조건이었다.
‘그의 특수 임무는 마인들을 소탕하는 것이었지. [밤하늘의 관측자]는 그 과정에서 얻은 아이템이고.’
자그마치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성유물.
그것도 그의 힘인 달을 상징하는 초월자의 손길이 닿은 성유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원래라면 달의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나는 개방조차 하지 못해.’
하지만 덮어쓰기는 다르다.
덮어쓰기의 능력은 악사영에서 한 장면을 선일의 몸에 재현하는 것.
그것은 마법이나 주술과는 다른, 어쩌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초월자의 권능과도 비슷한 효과였다.
이 알 수 없는 능력은 마력이란 변화가 불가능한 기운까지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선일은 태양의 형제인 달의 힘을 일시적으로 일으켜 [밤하늘의 관측자]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선월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하겠지. 자신이 쉽게 벽을 넘는 방법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말이야.’
원작대로라면 이선월은 [밤하늘의 관측자]에게 존재하는 달의 힘을 흡수하며 벽을 넘는다.
그러나 지금 [밤하늘의 관측자]는 자신의 손에 있었다.
쉽게 넘는 기회를 빼앗은 것 같아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 대신에 정상적으로 벽을 부술 방법을 알려줬으니 괜찮을 것이다.
치이이익...!
[밤하늘의 관측자]의 효과는 극적이었다.
만월을 상징하는 거울이 조금씩 빛으로 채워졌고, 반대로 폭식의 존재감은 점점 약해져 간다.
그녀의 상징체인 파리떼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고, 폭식이 사용한 알 수 없는 육각형 또한 흐릿해지며 사그라들었다.
전황을 완전히 뒤집는 힘.
그것이 바로 성유물이었다.
“[밤하늘의 관측자]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악한 존재들을 약화시키지. 그 상태가 지속된다 해도 완전히 소멸하는 건 아니지만, 일시적으로 인계에 약해진 상태로 잠시 강림시킨다. 그것을 강림이라 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씨익.
벙쪄있는 폭식의 얼굴을 보며 선일은 부드럽던 입가를 비틀었다.
그 웃음은 얼음장보다 차가웠고, 굶주린 파리떼보다 더욱 잔인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 이 말이 한마디로 무슨 뜻이냐면.”
네 약해빠진 본체가 이 자리에 그대로 나올 거라는 의미야.
선일은 폭식의 귀에 말이 잘 들리게끔 목소리에 마력을 담았다.
하윤의 얼굴을 한 악마는 소년의 말뜻을 깨닫고 분노를 표출하며 권능을 일으켰다.
“이...이 빌어먹을 태양의 자식이!”
“어이쿠.”
위이이이잉-!!!!!!!!!
화르르르르르...!
남아있는 파리떼들이 진득하게 선일을 물어뜯으러 달려들었고, 클리포트라는 이름의 육각형에서 살아있는 칠흑의 불꽃이 쏟아졌다.
하지만 선일은 마력을 주입하고 있는 자신을 처리하겠다는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성검 갈라틴] 완전 개방.
염(炎)의 수호천사.
들고 있던 갈라틴이 뜨겁게 빛나며 선일을 중심으로 불꽃의 돔을 만들어 방해했다.
마치 성강의 대지 방패와 선일의 일출의 벽이 하나가 되는 형상.
게다가 그 안에는 악마의 힘과 상반되는 천사의 잔재까지 존재했다.
그야말로 수호천사(Guardian Angel).
사락.
콰르르르.
흑색의 불꽃은 약해졌으나 적색의 불꽃은 여전히 강맹했다.
약육강식.
이것은 생명체에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기에 흑염 또한 선일의 불에 흡수되었다.
키이이익-!!!
티티티틱.
역겨운 파리는 비명을 지르며 불나방처럼 수호천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들이 불에 닿을 때마다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으아아아...!”
자신의 힘이 더 이상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폭식이 울분에 차 소리쳤다.
권능이 하나하나 소멸할 때마다 그녀의 존재감은 하윤의 몸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악마의 존재감이 소녀에게서 완벽히 벗어났을 때, 남아있는 것은 칠흑 같은 연기뿐이었다.
“네놈은 어째서 나를 방해하는 거냐!”
“너는 신하윤을 좀먹고 있으니까.”
“내... 내게 자유를 준다면 네놈에게 내 힘의 절반을 주마!”
“필요 없어.”
선일은 즉답했다.
더없이 단단한 그의 목소리가 그의 신념을 그대로 드러냈다.
폭식은 저런 신념을 가진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이년의 생명력은 빠르게 소진되어 죽는다! 네놈이 그걸 원하는 건 아닐 테지!”
힘을 주겠다는 유혹 또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폭식은 결국 하윤쪽을 보며 소리쳤다.
만약 선일에게 방법이 없었다면 먹힐 협박.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얘는 안 죽어.”
그리고 너도 안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