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151화
성강이 정호찬의 보고를 듣기 몇 시간 전, 선일은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파삭.
파사삭.
숲 안으로 깊게 들어갈 때마다 매캐한 탄내가 풍겨왔고, 발자국이 떨어진 나뭇잎에 닿을 때마다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이미 들어오는 푸른 빛의 초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선일은 감각을 방해하는 화재의 잔재들을 최대한 마력으로 처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폐허 도시가 있는 방향인 북서쪽으로 달리던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움찔.
“뭐지.”
달리면서 이상함을 느낀 선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평소에 보았던 하윤의 화염과는 어딘가 다르다.
‘분명 저번 합동 훈련 때만 해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어.’
그가 느낀 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불꽃 계열을 주로 사용하는 프로 헌터들조차 감을 잡기는커녕, 느끼지도 못 할 아주 작은 괴리감.
그것을 고작 학생인 선일이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다루는 불꽃이 신염이라 칭해지는 태양의 마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지옥불은 맞는데...’
숲이 타오른 잔재를 보았을 때, 악마와 마족이 사용하는 지옥불 특유의 느낌이 남아있다.
아마 본질은 같겠지만 어딘가 조금 이질적이다.
마치 특별한 무언가가 첨가된 느낌이다.
‘...설마?’
뇌리를 스쳐 지나간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직까지는 의심이었으나 그것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선일에게 존재했다.
키이잉.
천류체.
세상의 모든 흐름을 감지하고 흡수할 수 있는 최고의 체질.
지금 선일의 육체에서 태양을 보좌하는 청명한 하늘이 펼쳐졌다.
“흐읍!”
화아아...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춘 선일은 곧장 눈에 천류체를 부여했다.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눈동자에 들어오며 검은 눈동자가 하늘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힘이 부족했다고 판단한 선일은 계속해서 천류체의 기운을 눈동자에 주입했다.
욱씬.
절반의 힘을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잔재에서 보이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부담감을 감수하기로 한 선일은 천류체의 출력을 더욱 늘렸다.
욱씬욱씬욱씬!
눈동자가 부담하는 기운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통증의 빈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안구는 생물의 신체 중에서도 특히 약한 급소 중 하나다.
수십 년을 단련한 무인이라도 절대 단련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눈과 같은 급소였다.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초인들에게도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으윽.”
풀럭.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뱉은 선일의 몸이 흔들렸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눈에 잔재에 남아있는 기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지옥불 특유의 패도적인 흑염이다.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불꽃 사이사이에 불순물이 그득했다.
시체의 피처럼 구역질 나오는 검붉은 마기.
그것은 다름 아닌 하윤에게 기생하는 악마 [폭식]의 기운이었다.
‘이제야 알겠군.’
조금 전에 일어난 대화재에 의해 모든 것이 불에 타오르며 생기를 완전히 빼앗긴 것이다.
[폭식]의 기운은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동물과 식물 같은 생물부터 돌과 같은 무생물, 하물며 생기 같은 무형의 기운까지 전부.
그리고 그것을 하윤이 사용했다는 말은 즉 악마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는 의미였다.
쓰윽.
선일은 검게 타버린 볼품없는 숲을 바라보았다.
원작인 악사영에서도 하윤은 첫날에 이 숲을 태웠다.
그때 역시 악마화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녀가 지금 [폭식]에게 자아를 먹히고 있다는 것뿐.
‘큰일이네.’
뒷머리를 휘적거린 선일은 골치가 아팠다.
가뜩이나 원작에서도 악마화가 진행 중인 하윤을 막을 학생은 주인공 이선월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막아설 수 있었던 이유 두 가지 조건이 겹쳤기 때문이다.
첫 번째 조건은 당연히 하윤이 [폭식]에게 잠식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선월이 중간고사 직전에 받았던 마인 토벌 임무에서 특별한 ‘물건’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물건’은 지금 이 섬 어딘가에 있는 이선월이 가지고 있었다.
후우웅.
이질감의 정체를 확인한 선일이 천류체를 해제했다.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진 그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선일은 곧바로 설계자를 불렀다.
띠링.
기계음과 함께 그의 눈앞에 에피소드의 내용이 나타났다.
고작 텍스트 몇 줄이었지만 시야를 가득 채우기엔 차고도 넘쳤다.
[메인 에피소드: 악마와 소녀가 시작됩니다.]
[특수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세계의 분기점이 다가옵니다.]
[에피소드의 등급이 메인에서 히든으로 격상합니다!]
[에피소드의 등급이 히든에서 분기점으로 격상합니다!]
[분기점 에피소드: 악마와 소녀, 그리고 ■■■가 시작됩니다.]
[분기점에서의 선택에 따라 당신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이 미칩니다.]
‘조심하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이번 중간고사가 분기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본능이나 직감도 그렇게 말했지만, 확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장 최근 보았던 동화 이후 비하인드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분기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해 줄 수 없어.]
동화라는 이름의 기억을 본 이후 우리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눴었다.
평소와 다르게 대부분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기점이라는 주제로 나눴던 말들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우연일까.
“잡생각은 그만하자.”
또 안 좋은 습관이 도졌다.
선일은 의구심을 떨쳐내고 다시금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물었다.
-나한테 걸린 잠금 때문이야?
[아니.]
질문에 대답하던 순간, 비하인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답답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 나도 알지 못해서 그래. 알았으면 내가...!]
울컥.
비하인드는 말을 하던 와중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지던 선일은 기시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강화도에서의 동화가 끝났을 때, 느꼈던 후회감이 비하인드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래도.]
마음을 추스른 비하인드가 다시금 허공에 텍스트를 띄웠다.
[중간고사를 조심해.]
“고맙다.”
짧은 문답.
그것으로 분기점에 대한 대화는 끝났다.
이후의 말들은 마찬가지로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그건 그렇고.”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뒷말을 흐리며 중얼거린 선일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게 물든 숲과 어울리는 먹구름 낀 흐릿한 날씨.
이런 날씨라면 섬 어디에 있는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화르륵.
그의 몸에 불꽃이 깃들었다.
장소는 그다지 좋지 않으나 그럼에도 충분하다.
떠오르는 태양을 신호탄으로 하기에는 말이다.
쿠구구구구...
주먹에 불꽃이 휩싸였다.
처음에는 그저 손을 감싸는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꽃의 크기는 커져갔다.
역설적으로 마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주변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일의 신경은 온전히 단련된 주먹과 뜨거운 마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초 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화아아...
처음과는 다르게 중형 몬스터의 머리만큼 커진 붉은 구가 감싸고 있었다.
신호탄을 날릴 준비가 완전히 끝나자 선일은 이어서 자연스레 자세를 잡았다.
“후우...”
오른발을 뒤로 옮기고 팔은 자연스레 굽혀 등 뒤로 당긴다.
자유로운 왼손은 보이지 않는 표적을 가리키는 것처럼 앞으로 뻗었고, 마력이 집중된 오른손은 허리춤에 놓는다.
선일의 자세는 시위가 당겨져 있는 활, 아니.
[총알이 장전되어있는 한 자루의 저격총과도 같았다.]
방아쇠에 손가락이 완전히 자리 잡은 순간.
적양권의 첫 번째 초식.
홍일강권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태양이 구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랐다.
콰아아아-!
쿠구구구구...!
공기가 떨렸다.
단순히 홍일강권의 기운이 강력했기 때문은 아니다.
하늘 위로 솟아오른 초고온의 불꽃은 주변에 떠오른 먹구름을 전부 소멸시키며 거센 바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바람은.
촤아아!
더없이 뜨거운 태양의 곁에서 머물며 천상의 빛을 가리는 모든 방해물을 치웠다.
그 광경은 더없이 아름답고 상쾌해 자연스레 구겼던 소년의 얼굴을 피게 만들었다.
싱긋.
어두운 구름을 벗어나 점점 자유로워지는 하늘을 보며 선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번 에피소드가 끝날 때는 다시금 이런 장관을 보고 싶어졌다.
“이제 조금 기다리면 되겠네.”
***
부스럭.
홍일강권을 쏘아낸 후 몇 분 지나지 않았을 때, 선일은 새로운 인기척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인기척‘들’이었다.
그 수는 정확히 3명.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학생들의 정체를 확신한 선일은 싱긋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뒤를 돌았다.
“왔어?”
자신의 뒤에 있는 세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선일은 본능적으로 마음을 놓았다.
아니,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누가 이 학생들을 보고 안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며 머저리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선일아!”
[고귀한 왕국]의 유망주이자 [왕의 첫 번째 마법]을 다루는 천재 마법사.
유리 펜드래건.
“이선일...”
악귀 사냥꾼 가문 [멸악]의 정통 후계자이자 [만년설]이라는 최상위 마력을 다루는 천재 궁수.
황신영.
“...쳇.”
마지막으로 천검이가의 적통이자 현 가주인 이천야와 비견되는 검의 천재.
그리고 악사영의 주인공.
이선월.
씨익.
선일은 웃었다.
스킬의 힘을 빌리지 않은 진심의 미소였다.
“빨리 왔네?”
세계에서도 유명한 천재들.
선일은 처음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와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이제 슬슬 시작할까?”
그는 처음부터 이들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