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145화
비하인드가 말했던 잠금이 해제된다는 문장에 선일이 잠시 멈칫했을 때, 스크린에서 쏟아진 기억의 급류는 영화관 좌석을 부술 듯이 덮쳤다.
콰과과과...!
은하에 존재하는 수많은 빛 무리 중 하나의 별이 소년과 검은 형체에게 들이닥쳤다.
별빛을 마주한 선일은 자신의 옆에서 멈춘 비하인드에 앞에 나섰다.
마치 그를 지키려는 것처럼.
빛을 맞은 선일의 시야가 천천히 감기기 시작하며 신체가 입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
비하인드는 그의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동화의 빛이 닿지 않았다.
애초에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악사영의 에피소드를.
아니.
모든 사건들을 겪었던 존재니까.
[동화가 시작됩니다.]
설계자의 메시지가 스크린에 떠오르자 선일의 존재감이 영화관 안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악사영의 에피소드.
아니, [누군가]의 기억으로 향한 것이다.
[으으...]
직후 비하인드의 입가 주변에서 텍스트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 그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비하인드의 온몸을 채웠던 검은 물질.
아무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툭...
투두둑...
바닥에 떨어진 검은 물질들의 정체는 손톱만 한 크기의 문자들이었다.
한글뿐만 아니라 영어나 일본어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의 언어 등 세계 각국의 문자부터, 지금은 사라진 고대 국가의 과거.
하물며 악사영의 세계에서 살아가거나 혹은 그 존재가 사라진 수많은 이종족들이 사용하는 문자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자가 비하인드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스르르...
신체를 구성하는, 아니 껍데기처럼 붙어있던 글자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감춰진 몸이 드러나기 시작됐다.
그렇게 나타난 비하인드의 본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비하인드는 이제 갓 스물이나 됐을 법한 편안한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희미한 호선이 그려진 입가는 낯선 사람이 자연스레 다가갈 수 있는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선명한 눈매와 또렷한 검은색 눈동자는 자신의 사람들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란 신뢰를 내비쳤다.
부드러운 연갈색의 머리카락은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아침과 저녁의 하늘, 즉 따스함을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동화가 진행 중인 선일과 현실에서 ‘이선일’을 알고 있는 지인들이 그의 얼굴을 본다면 다들 하나같이 반응할 것이다.
왜냐.
비하인드의 본 얼굴은 선일과 완벽하게 똑같았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현시점의 ‘이선일’보다는 그 얼굴이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상태이니 완벽하게 같다라고는 말하기 모호하지만.
적어도 진짜 쌍둥이인 이선월과 비하인드를 선일의 옆에 두고 비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비하인드를 그의 형제로 인식할 것이다.
[이 기분은 매번 X 같네.]
존재를 억제하던 글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비하인드가 입을 열었다.
구속이 벗겨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텍스트로 말했다.
문자나 텍스트는 ‘강선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의 침식율이 상승해 일정한 퍼센트에 도달할 때마다 잠금 일부가 해제될 때마다 설계자 안에서 그를 도와주는 비하인드 역시 조금씩 구속이 풀렸으니까.
글자가 사라진 것이 바로 그 해제된 구속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세계에 선일이 있는 동안은 그대로 텍스트로 살아야 한다는 점.
딱 그뿐이었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비하인드.
[...이번 분기점만 지나면 그때부터는 조금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겠지.]
비하인드는 텍스트가 아닌 입으로 뱉는 소리가 그리워졌다.
물론 지금 상태로도 말을 할 수는 있다.
직전의 선일이 그의 감정과 동기화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어쩔 수 없이 소리쳤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비하인드는 웬만한 상황에는 대체로 텍스트로 대화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구속을 풀은 반동이 매우 거대하니까.
왜 영화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가.
노예가 억지로 구속을 풀면 그 이상으로 강하게 처리하는 장면.
지금 비하인드의 상황이 딱 그랬다.
[하하...]
비하인드의 웃음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구속, 아니 저주를 건 존재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런 상태가 되도록 원한 사람이 비하인드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의 저주는 그만큼 합당한 벌이었다.
오히려 외부에, 정확히는 선일에게 간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관대한 벌.
[...일단 그건 그렇고.]
비하인드는 조금 남아있는 글자의 조각들을 손가락으로 털어냈다.
터벅.
터버벅...
짧게 스트레칭을 한 비하인드가 이어서 다리를 움직였다.
온몸에 매달려있던 수많은 글자들이 없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몸이 가벼웠다.
그렇게 걸어간 비하인드가 멈춘 곳은 직전까지 별빛이 쏟아졌던 영화관 스크린이었다.
[나와요, 아저씨. 거기 있잖아요.]
“들켰냐?”
이제는 다시 검은색으로 암전된 스크린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짝 쉬어있는, 그렇지만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푸근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으차차...”
앓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서 빛이 들어왔다.
동화의 전조인 은하수의 푸른 별빛과는 대조되는 붉은빛.
짙은 불꽃이 연상되는 붉은빛.
신기하게도 그 빛을 코앞에 둔 비하인드는 뜨거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글자가 사라지자 감각이 살아 돌아온 것이었다.
“이 시간에는 온몸이 쑤신다는 말이지.”
스크린에 비친 붉은빛은 딱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빛의 뒤에서 중절모를 쓴 한 미중년이 걸어 나왔다.
[꿀꺽.]
남성이 스크린에서 나오자 비하인드의 목젖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텍스트는 짧았으나 그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했다.
압도와 경외.
단순히 걸어왔을 뿐인데, 중년 남성에게서는 절대 뒤집을 수 없는 격과 존재감이 느껴진다.
화르륵...
그리 큰 덩치가 아님에도 중년 남성에게서 풍겨오는 아우라는 더없이 무겁고 거대했다.
비하인드 역시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절대 약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중년에 비하자면 그저 하나의 미물일 뿐.
그와 남성을 비교했을 때, 가장 어울리는 비유는 반딧불이와 태양이다.
빛을 내뿜는 존재들인 것은 맞다.
그러나 반딧불이는 그저 지상의 한구석만 채우는 데만 급급하나 하늘의 태양은 이 세계 전체를 아우른다.
...주륵.
비하인드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잠금이 풀리며 과거의 감각이 돌아오는 건 너무나 반가웠으나 한편으로는 다시 느끼기 싫은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숨을 한 번 들이쉰 비하인드가 중년의 눈앞에 텍스트를 보냈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건 오랜만인 거 같은데. 웬일이에요?]
“끌끌끌끌...”
떠오르는 텍스트를 본 중년은 웃음만 지었다.
웃음의 의미를 깨달은 비하인드는 손으로 스스로 눈을 가렸다.
그의 제스처는 신기하게도 선일과 똑같았다.
[하아... 또 세상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뭘 했을 것 같나.”
중년 남성이 비하인드에게 대답하며 히죽거렸다.
자신만 알고 있는 수수께끼를 맞추라는 의도는 언제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필멸자였던 존재의 입장에서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분명 만났던 다른 초월자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중년은 초월자 중에서도 가장 전능한 자였으나, 한편으로는 가장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였다.
그를 오랜 세월을 알고 지냈지만, 여전히 이 성격과 존재감은 적응되지 않는다.
물론 앞으로도 적응할 생각은 없다.
“궁금하지 않냐? 들어보면 되게 재밌을 텐데?”
응응?!
마치 친구를 놀리는 어린아이 같은 짓궂은 말투에 비하인드의 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거스를 수는 없다.
[눈]이 있는 이상 그의 수호를 받는 모든 존재들은 남성의 말을 절대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남성의 권능이었다.
‘참자... 내가 참는 거야...’
열받은 비하인드는 속으로 참을 인(忍) 세 개를 그렸다.
어느 세상에 가든 옛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만약 선일이 가진 ‘표정 숨기기’라는 스킬이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아쉽게도 그 스킬은 ‘강선일’에게만 존재하는 힘이었다.
곧장 마인드 컨트롤을 한 비하인드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궁금합니다.]
“사실 별거 안 했어, 그냥 저 밖에 나가서 외부자하고 오래된 자들 몇 죽인 거 정도?”
[...네?]
이 사람, 아니 이 초월자가 지금 뭐라는 걸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비하인드의 얼굴에 차가운 금이 갔다.
순간 귀를 의심한 그가 중년에게 되물었다.
[아니, 아저씨. 뭘 했다고요?]
“외부자랑 오래된 자 죽였다구.”
[????????????????]
엄청나게 놀란 비하인드의 말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그러나 중년 남성은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텍스트들을 가볍게 치웠다.
너무나 여유로운 태도에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비하인드의 입이 열렸다.
직후.
“미...쳤어요? 으윽!!!”
그의 입에서 사자후와 비견될 만한 음성이 터졌다.
텍스트가 아닌 육성으로 말이다.
곧바로 온몸이 구속되는 감각이 몸을 제어하며 위험이라는 경고문이 귓가에 울렸지만, 방금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진짜 외부자들을 건드렸다면 그건 사고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것도 세계 자체를 뒤엎을만한 대형 사고.
“예끼! 소리 좀 줄여라! 깜짝 놀랐네.”
[아니, 왜 그런 짓을...?]
중년의 여유로운 태도에 비하인드의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저 초월자, 아니 또라이의 생각 이해할 수 없다지만 이 정도로 사고를 치는 미친 짓을 할 거라고는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에이! 괜찮아.”
그런 와중에도 사고를 친 당사자의 손짓에서는 뻔뻔함이 묻어나왔다.
남성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진짜로 괜찮은 것처럼 느껴진 비하인드는 조금 화를 가라앉혔다.
물론 진정됐다 한들 거대한 불꽃에 물 한 바가지를 쏟은 정도였다.
조금의 이성을 되찾은 비하인드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요.]
“엉?”
[뭐 어떻게 된 건데요? 원래 그놈들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안 움직이기로 했잖아요.]
제대로 된 상황 설명을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한 비하인드가 물었다.
빠르게 올라오는 텍스트를 읽은 중년 남성은 입을 열었다.
“옛날엔 그랬었지.”
[옛날이라고요?]
“그래.”
그 말을 들은 비하인드의 표정이 변했다.
중년의 대답에서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상함의 정체를 깨닫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마?]
비하인드가 다음 텍스트를 띠우는 순간, 남성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분위기가 무겁게 변한 남성의 입이 천천히 열렸고.
“그래.”
이어지는 남성의 말은 비하인드에게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었다.
“그 녀석들이 저 아이의 존재를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