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143화
스르륵.
누군가의 손이 닿자 머릿속에 2년 전 사건의 글귀들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마음속의 불길조차 완전히 사그라졌다.
‘...누구야.’
딱 중요한 내용을 읽으려던 타이밍에 방해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선일에게 더없는 불쾌함을 남겼다.
그것이 고의든 아니든 말이다.
덜컥.
이어서 어깨에 올라간 누군가의 손이 그를 눌렀다.
강한 힘으로 보았을 때, 꽤나 덩치가 있는 자다.
화악!
선일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지금은 모든 훈련이 끝난 상황이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전투에 들어간 것처럼 예리하고 재빨랐다.
그는 스스로 그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저놈 저거 위험하네.]
선일의 속에서 몰래 상황을 지켜보던.
아니.
그와 함께 살아가는 ‘비하인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선일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앗!
선일은 순식간에 어깨에 놓인 손을 잡아챘다.
그가 잡은 거대하고 투박한 손아귀에는 굳은살이 수없이 박혀있었다.
손의 주인이 무기술을 훈련한 무인이라는 점을 깨달은 선일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으득.
“으아악!”
힘을 살짝 쥐며 손을 비틀자 옆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선일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뭐야?”
어느새 성강의 설명은 전부 끝났는지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천천히 체육관 출구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몇몇 동급생들은 저 멀리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고 유리 또한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어깨에 올린 손의 주인인 박대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선일아, 손 좀 놔주라.”
머리 하나는 큰 우락부락한 덩치의 박대기는 얼굴을 찡그렸다.
원래도 잘 생겼다고 말할 수 없는 생김새였지만 더욱 망가진 표정에 선일은 급하게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 미안.”
평소에 부드러운 목소리 대신 짧고 깔끔한 사과 인사는 이선월과 닮아 있었다.
그 유명한 천검이가의 쌍둥이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만큼 똑같았다.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괜찮아?”
지금 선일은 당황함과 미안함이 섞인 얼굴을 지은 상태였다.
스킬의 힘이 아닌 진심으로 튀어나온 그의 표정은 매우 당황한 상태임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표정을 본 박대기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으응!”
‘무슨 힘이...’
박대기는 욱신거리는 손을 주물렀다.
잡고 있던 손에서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감각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상상 이상으로 강한 힘이었다.
선일의 키와 체구도 전혀 작은 편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덩치는 학생 중에서도 매우 큰 편이었다.
그렇기에 동급생들 중에서는 근력으로 자신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생각했는데.
마치 아버지를 마주한 듯한 악력과 분위기에 박대기의 몸은 순간 얼어붙었었다.
‘...나 우물 속 개구리구나.’
박대기가 힘에 압도된 순간, 선일의 머릿속에서는 익숙한 기계음이 울렸다.
띠링.
‘뭐지?’
지금 상황에서 들려올 만한 알림은 스킬의 발동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표정 숨기기 특유의 근육이 꿈틀대는 느낌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알림에 의문을 가진 선일은 박대기의 몸에 적양권의 마력을 집어넣으며 설계자를 확인했다.
‘...?’
설계자를 확인하는 순간, 선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뜻밖의 타이밍에 울린 알림의 내용은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니까.
[과거 에피소드의 내용을 일부나마 확인함으로 소유자 ‘이선일’에게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침식률이 소량 상승하며 동화가 진행됩니다.]
‘침식률이 올라갔다?’
에피소드가 끝나야 올라가던 침식률이 갑자기 상승했다.
이것만으로도 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곧바로 당혹이란 감정은 사라졌다.
왜냐.
욱씬!
‘으윽!’
동화가 진행될 때 시작되는 머리의 통증.
발을 옮기기도,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적어도 저번처럼 남들 앞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얼른 돌아가야 해.’
화륵.
선일은 아무도 모르게 마력을 활성화했다.
다행히 적양권의 따스한 생기는 정신까지 범람하려던 통증을 막아주었다.
하지만 고작 그뿐이다.
통증이 몸을 채우지 않도록 잠시 지체시켰을 뿐 여전히 움직일 방법은 없었다.
멈칫.
‘...큰일이네.’
선일은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그를 눈치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선일이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역시나 무용지물이었다.
‘아이 씨. 그냥 쓰러져야 하나?’
적당히 둘러댈 방법은 없었다.
이대로라면 말이다.
그 순간.
[에휴.]
텍스트가 다시 한번 눈앞에 올라왔다.
에피소드가 종료될 때마다 떠올랐던 딱딱한 문장과는 다르다.
그것만으로 메시지를 보낸 이가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선일은 수신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비하인드?’
[그래, 멍청아.]
그가 속으로 한 생각에 비하인드는 텍스트로 대답했다.
자신을 한심해하는 말투에 선일의 얼굴에는 썩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장 발동한 표정 숨기기에 그의 표정 변화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어서 다시 한번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지금 동화가 진행되는 건 곤란하지. 도와줄게.]
띠링.
비하인드가 도와준다는 의지를 내비치자 또다시 기계음이 들렸다.
그의 메시지를 다른 쪽으로 치워버린 선일이 곧바로 설계자를 확인했다.
[‘비하인드’의 요청에 따라 동화가 잠시 미뤄집니다.]
설계자를 확인하자마자 시야 한구석에 작은 숫자들이 생겨났다.
그 의미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새로운 텍스트가 떠올랐다.
[04분 30초.]
찰칵.
찰칵.
설계자의 기계음과는 다른 새로운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마치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서로 틈을 마주할 때마다 만들어지는 소리.
타이머가 의미하는 바를 선일이 모를 리가 없었다.
화악...!
직후 머릿속이 완벽하게 깨끗해졌다.
마치 침식률의 상승으로 인해 생겨났던 두통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찰칵.
한 번 더 톱니바퀴가 마주하자 선일의 몸은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나 먼저 갈게!”
시야의 타이머가 완전히 0으로 변했을 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서 동화는 시작될 것을 말이다.
***
시간은 아직 저녁이었지만 작은 방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전등은 꺼져있고, 커튼은 완전히 닫혀있는 방은 보기만 해도 갑갑했다.
밖에서 보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완연한 암흑이었다.
하아하아...
그러나 방 한구석에는 한 사람이 이불을 둘둘 말고 있었다.
한 소녀였다.
고등학생치고는 매우 작은 체구의 소녀.
덜덜덜덜...
소녀의 몸이 떨렸다.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한편으로는 곧바로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정한 표정이었다.
남에게 날을 선 듯 대하지만.
한없이 사람을 갈구하는 가냘프고 여린 어린아이다.
화악...
창문을 제대로 닫아놓지 않았는지 밖에서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그대로 커튼을 흔들었고 그 탓에 꽉 닿아놓았던 커튼에 틈이 생겼다.
손가락 한 마디가 겨우 들어갈 것 같은 작은 틈은 완전한 어둠에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이어서 그 사이로 살포시 뜨거운 햇빛이 들어왔다.
“...”
빛이 자신에게 닿고 나서야 소녀는 일어섰다.
살에 닿은 햇빛은 따뜻했다.
마치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인상의 소년을 연상케 했다.
상처를 치유해주고 희망을 선사하는 구원.
[소녀]에게 [소년]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으득.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존재는 [소녀]뿐이었다.
[또 다른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짜증 나.”
‘또 다른 얼굴’이 말했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들’은 이질적이었다.
언뜻 보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
그렇지만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와장창!
증오였다.
사무치게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
그런 부정적이고 포악한 감정이 어째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일까.
아니, 애초에 무엇에 대한 증오인지는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욱씬욱씬!
감정은 하나가 아니었다.
연민.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정확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동정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며 대부분의 힘과 영혼의 격을 잃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낱 인간에게 동정을 받을 처지는 아니었다.
“...동정 아니야.”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두 존재는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생충과 숙주 같은 느낌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와서 그런지 서로를 꿰뚫어 보았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은 아주 최근, 아니.
직전에 보았던 기억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