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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일이 정신을 잃음으로써 둘의 대련이 끝났을 때.
다른 곳에서는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아으.”
탐욕 교단 소속의 마인, [연구자] 레크라는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먼지를 털어냈다.
“머리 아파...”
이게 숙취인가?
실없는 소리를 뱉으며 일어난 그녀는 남아있는 두통에 불편한 티를 팍팍 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레크라의 상태는 방금까지 쓰러져있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운이 좋았잖아?”
어질러진 연구실 안을 보며 휘파람을 부른 그녀의 뒷목이 시큰거렸다.
그녀가 말한 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죽는 줄 알았네~”
초월자와 동등한 힘을 가진 악마의 존재를 느끼기만 해도 평범한 인간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으니까.
아무리 인간보다 강인한 정신을 가진 헌터나 이종족이라 해도 정신이 망가지고 평생을 폐인으로 살아간다.
단순히 존재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이 부서지는데 하물며 그들이 직접 인간에게 의지를 보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육체에 끝이 찾아오는 것은 물론이요, 영혼이란 한 생명의 존재 자체가 갈가리 찢어진다.
말 그대로 완전한 죽음, 아니 소멸이다.
툭툭.
헝클어진 머리와 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옷을 정리한 레크라.
연구실 안팎에 기척을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무 강하게 한 거 아니에요?”
주인인 레크라를 제외하면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는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레크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본다면 분명 정신이 이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할 것이다.
단순히 그녀가 천재 마법사라는 사실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법에 미쳐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레크라의 정체가 마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물며 악독한 마인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는 실력자인 추기경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말을 건 존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탁.
그 순간, 탁자에 올려뒀던 병이 쓰러졌다.
마치 연구실에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말이다.
병의 움직임은 쓰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뻥!
병의 입구를 막고 있던 코르크가 갑자기 터져나가며 바람이 빠져나갔다.
이후 안쪽에 있던 액체가 천천히 밖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스르륵.
안쪽에 들어있던 액체는 바로 이물질이 묻어있는 더러운 액체 황금이었다.
병을 벗어난 황금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날아들며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입 좀 다물어라, 멍청한 X.]
더러운 황금이 허공에 만든 문장은 탐욕의 악마가 보낸 것이었다.
레크라를 향한 메시지.
자신을 상징하는 물건을 매개체로 말을 전달하는 것은 직접 의지를 전달하는 방식보다 부담감이 적었다.
“끽하면 연구를 못 할 뻔했잖아요~! 아직 이 세상엔 알고 싶은 지식이 너무 많은데!”
레크라는 신랄한 욕설이 들어있는 악마의 메시지에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댔다.
언뜻 여유로워 보이는 그녀지만 속으로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녀가 알려고 했던 외부의 존재들.
탐욕의 주인은 형체와 능력 그리고 진명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들 가장 혐오했으니 말이다.
덜덜...
만약 그들의 부산물에 접촉하려 한 사람이 레크라가 아닌 다른 마인이었다면 격노한 탐욕은 그의 영혼이 순환하지 못하도록 먼지로 만든 후, 지옥의 강 스틱스(Styx)에 던졌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레크라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소소소...
완전한 소멸.
레크라는 평범한 죽음과 비교조차 불가능한 가능성에 소름이 끼쳤다.
핥짝.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소멸은 어떤 기분일까.
죽음과는 다른 느낌일까.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탐구심을 가지는 레크라에게는 전부 질문거리였다.
[...네년이 나의 사도가 아니었다면 그냥 미치도록 내버리는 건데.]
레크라가 지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탐욕이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
욱씬욱씬.
다음 문장을 보는 순간, 레크라의 시큰거렸던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탐욕이 보낸 메시지.
매개체로 전달되어 한 차례 필터링이 되었음에도 황금의 문장에는 위대한 격을 지닌 상위 존재의 메스꺼운 악의가 잠재되어 있었다.
“너무하셔라.”
레크라는 살벌한 마몬의 메시지에도 그저 웃기만 했다.
여유를 연기해도 그녀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탐욕에게 사랑받는 사도라 할지라도 그들의 악의를 받아내기엔 무리였다.
타앗.
탐욕은 황금으로 신관에게 받은 고서를 들어 올린 후 연구실 구석으로 던졌다.
악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확실한 사실은.
지금 탐욕이 이곳에 강림했다면 아마 반경 수십 킬로미터의 생명체들은 깡그리 황금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꿀꺽.
[적당히 해라.]
마른침이 넘어가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레크라의 몸은 긴장감에 경직되었다.
다행히 탐욕이 보낸 다음 메시지에는 악의가 없었다.
다만 메시지의 의도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경고.
절대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였다.
씨익.
거대한 악의에서 벗어나 몸을 추스른 레크라가 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란 참 아이러니한 존재다.
하지 말라는 행동은 더욱 하고 싶어지니 말이다.
탐욕 또한 매개체인 황금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 생각을 눈치채고 있었다.
[폭식의 부활을 위해 그 녀석들과 협력해야 하는 건 알지만, 적당히 엮여라. 잘못하면 흔적도 없이 세계에 입력된 너 자신이 사라질 거다.]
메시지를 읽는 순간.
흠칫.
레크라의 반응이 극적으로 변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악의를 받아들여도 웃음만 짓던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일그러졌다.
춤을 추듯 나풀거렸던 몸은 얼음으로 가득한 한빙지옥(寒氷地獄)에 떨어진 것처럼 흔들렸다.
씻을 때도, 미지를 연구할 때도, 적과 싸울 때도.
하물며 잠을 잘 때도 절대 멈추지 않았던 사고가 굳었다.
탐욕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었다.
덜덜덜덜...
목숨과 존재는 물론.
내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백 년을 넘는 세월 동안 알아낸 연구 결과와 질문에 대한 답, 전부 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했던 흔적이 사라진다.
레크라에게 있어 무(無)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공포이자,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알아들었으면 너무 관여하지 마라. 우리의, 아니.]
나의 목적만을 생각해라.
스륵.
그 말을 끝으로 탐욕의 악마 [마몬]의 의식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
...
오후 훈련이 끝나고 1학년들은 전부 단상 앞에 모여있었다.
원래 실전 훈련을 끝난 학생들은 큰 행사가 없는 이상 해산한 후 각자 기숙사로 돌아갔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체육관 안에는 평소의 북적거림 대신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 이유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전부 알고 있었다.
곧 있을 대한고 최대의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을 말이다.
저벅.
저벅..
투욱.
“다 모였군.”
학생들의 앞에 선 성강은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엔 자신의 제자와 몇 초간의 눈을 맞추는 것으로 시선을 거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모은 이유는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모를 리가 없겠지.”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침묵은 긍정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성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그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파앗!
성강이 그 말을 꺼낸 순간, 뒤에 있던 스크린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렇게 펼쳐진 화면은 지도였다.
“일주일 뒤면 시작할 중간고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성강의 말에 학생들의 눈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도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엔 사면이 바다로 막힌 섬이 있었다.
“이 섬이 어딘지 모르는 학생은 없을 테지.”
당연하다.
이곳의 학생들은 전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조기교육을 듣고 온 헌터 지망생들.
한국에 설립된 여러 곳의 헌터를 키우는 특성화 고등학교 중, 가장 유명한 대한고의 시험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유일하게 정보를 알지 못하는 학생이라면 단 한 명.
이 자리에 없는 배신자의 딸, 신하윤뿐이었다.
1학년들은 성강의 말을 경청했다.
“중간고사는 5일간 진행된다. 방식은 주어진 시간 동안 생존하는 서바이벌이다.”
여기까지는 전부 알려진 내용이었다.
체육관 안에 있는 1학년들은 다른 정보라도 얻기 위해 최대한 성강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단순히 살아남기만 한다면 순위를 매길 수 없다. 그렇기에 너희는 모두 특별 점수를 노리겠지.”
꿀꺽.
밝은 미래를 노리는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시험의 보상을 노리는 학생들의 눈이 빛났다.
욕망에 찌든 학생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평가를 한 성강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특별 점수는 당일에 공지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족으로 붙인 마지막 말에 학생들은 본능에 따라 직감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불길함이었다.
“이게 가장 중요하군.”
뜸을 들이는 성강을 보며 학생들은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익숙하다.
마치 전에도 이런 상황을 마주했던 것처럼 말이다.
언제였을까.
학생들의 머리는 순식간에 회전하며 익숙함의 원인을 추측했다.
그러나 성강은 그들보다 빠르게 선언했다.
“이번 훈련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30명은.”
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