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연구실에서 레크라가 쓰러졌을 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식당에 있었던 한 소년, 아니 한 소녀가 옥상에 있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옥상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 옆에 비치되어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오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유리는 아무도 모르게 감정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자.”
이어서 그녀와 같이 옥상에 올라온 선일이 손을 건넸다.
그렇게 유리의 앞에 다다른 손 위엔 평범한 자판기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커피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고마워.”
유리는 그가 건넨 커피를 받아 호로록 마셨다.
마찬가지로 바로 옆에 앉은 선일 또한 가볍게 커피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음료가 목으로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선일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어째서인지 유리는 자신을 부른 소년이 살짝 긴장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뭐 때문일까.
위험한 상황에 빠질 때도 쉽게 여유를 잃지 않았던 소년을 이렇게 긴장하게끔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문뜩 궁금해졌다.
“으음...”
선일은 그녀의 물음에 눈을 감으며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의 머릿속은 많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아침에는 악마의 씨앗으로 인해 쓰러진 하윤이 걱정되었고, 이후엔 그녀를 찾아온 쥬세피나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맘에 걸렸다.
그 와중에 수업 시간에 레크라가 꺼낸 이야기 또한 만만치 않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선일은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셋의 공통점.
그건 바로 그가 썼던 악사영에서 벗어난 전개 또는 설정이라는 점이었다.
“후우...”
이어서 선일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간결하게 사고를 정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뭐부터 물어봐야 하지?’
유리에게 물어봐야 할 것은 세 가지 요소 중에서 두 가지.
선일은 그중 먼저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해 질문 하기로 결정했다.
“혹시...”
그가 감았던 눈을 뜨며 천천히 입을 열자 유리는 살짝 긴장했다.
마치 곤란한 질문을 할 것 마냥 뜸을 들이는 그의 모습에 절로 모르게 힘이 들어간 것이다.
자신이 왜 이렇게 긴장했는지 알 수 없었던 유리.
이어서 선일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쥬세피나라고 들어 봤어?”
선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예상외였다.
하윤에 대한 질문 또는 이번 중간고사에 대한 내용이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쥬세피나?”
유리는 선일의 질문을 확인하듯 다시 한번 되물었다.
특정인에 대해 물은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그가 어째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응. 풀네임은 쥬세피나 바르사였어.”
그녀가 뱉은 말에 선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기억을 되감기 시작한 유리는 손으로 턱을 받치며 천천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쥬세피나 바르사...”
처음에 선일에게 성만 들었을 때도 어째 익숙하다 싶더니, 분명히 들어봤던 이름이다.
아니, 들어본 것으로 끝이 아니라 적어도 한번은 얼굴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흐음...”
유리는 눈을 감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언제 만났는지.
어떤 이유로 만났는지.
선일의 도움이 되기 위해 기억의 조각을 하나하나 붙이며 맞춰간다.
‘...왜 그러지?’
선일은 기억을 거듭할수록 유리의 표정이 점차 변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문이 든 그는 그녀의 표정을 읽기 위해 시선을 집중했다.
누구보다 남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뛰어난 선일은 순식간에 유리의 얼굴에 느껴지는 감정을 깨달았다.
‘당황.’
혹은 당혹감.
그리고 기억을 떠올릴 때 당혹감을 느낀다는 말은 바로.
‘기억을 못 할 때.’
선일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이름은 그녀의 기억 속에는 도장처럼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이름을 가진 인간에 대한 다른 특징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2년 전, 자신이 마탑에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던 시기에 만났다는 것.
‘그때 만난 사람들은 한정되어있어.’
그 말대로 유리가 마탑에 있었을 시절에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인 아서는 유리가 차기 마탑주가 되면 인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능력이 뛰어난 이들만 만나게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천검이가와 같은 대형 가문의 직계와 다른 마탑들의 후계자들,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이종족부터 과학과 마도공학의 연구자 등등 수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런 와중에 이름이 기억에 남았다?
‘분명 중요하거나 인상이 깊었다는 의미인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
애초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도 애매하다.
뭐랄까.
기억에 틈이 생긴 것처럼 중간중간 떠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누구였지?’
“혹시 특징 같은 건 있어?”
“검은 파마머리에 꽤 큰 안경을 썼어.”
“그런 외형적인 거 말고. 분위기 같은 느낌.”
유리에게서 바통을 받은 듯 선일은 생각을 이어갔다.
양호실에서 보았던 여자는 어떤 분위기를 가졌었나.
그 답은 금방 나왔다.
“골방에서 연구만 하는 괴짜...? 그러면서 신기하게 생기는 살아있고 성격도 좋아보였어.”
“어...”
평가가 박하다.
선일의 설명을 듣자마자 유리가 제일 먼저 떠올린 감상은 이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골방에 처박힌 폐인인데 어떻게 생기가 있다는 거야?’
선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쥬세피나에 대한 말은 매우 애매모호했다.
애초에 생기가 있다는 말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연구자를 만나봤고 괴짜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한 사람 역시 만나봤다.
유리는 그 두 분류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괴짜랑 연구자는 절대 성격이 좋을 리가 없는데?’
그녀가 만난 괴짜와 연구자들은 대부분 성격이 괴팍했다.
좋게 말해야 괴팍하다는 단어고, 나쁘게 말하면 개싸가지, 미친 사람, 또라이, 싸이코 등등 수십 개는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식을 탐구하는 모든 인간을 만난 것은 아니었기에 일반화는 성급할 수도 있으나 유리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성격이 좋고, 생기가 있는 연구자...”
꿀꺽.
선일은 머리를 싸매는 유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30초 정도 되는 시간이 지난 후, 유리는 생각을 멈춘 듯 보였다.
이윽고.
“...생각났다!”
그녀의 입에서 밝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일이 기대하는 대답과 함께 말이다.
“진짜?”
“응응!”
유리는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속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질문의 주인공인 선일 역시 마찬가지.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과 같은 시원함을 느낀 선일과 유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웃음을 지었다.
싱긋.
씨익.
선일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 유리는 갑갑한 남장을 뚫어버리는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혹시 몰라서 물어봤던 건데.’
그렇다고 무작정 유리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충분한 근거가 있었기에 말을 건 것이었다.
‘외전들을 전부 기억해둬서 다행이야.’
악사영의 작가였던 시절, 그가 미리 구상해놨던 외전 스토리들.
물론 중간의 연중을 하느라 시작도 못 했지만, 대부분은 기억하는 스토리 중 하나가 바로 유리의 이야기였으니까.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 후계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느꼈던 그녀의 감정들을 그린 스토리였다.
‘운이 좋았어.’
선일은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외전이 이 세계의 역사가 되었을 가능성을 말이다.
작가였던 ‘강선일’이 자신의 창작물 속으로 빙의하며 대부분의 설정들이 현실이 되었다.
직접적인 스토리에 등장하는 설정과 인물들은 당연하고, 그저 적어놓기만 했던 히든피스나 인물들 또한 마주한 적이 있었다.
‘외전 역시 충분히 이 세계의 현실이었을 가능성에 걸어본 거였는데.’
그리고 그 도박에 성공했다.
건 판돈은 매우 낮았지만, 쥬세피나의 정체 혹은 과거의 정보라 한들 지금 그에게는 충분한 상품이다.
말 그대로 로우리스크 하이리턴, 아니 노리스크 하이리턴이었다.
“흠흠!”
잠시 선일이 미소 짓는 동안 제정신을 차린 유리는 작은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헛기침을 뱉었다.
그녀의 얼굴은 열이 나는 것처럼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선일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직감이 말했다.
괜히 꺼냈다간 그녀에게 혼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네가 말한 쥬세피나란 사람 옛날에 한 번 본 적 있었어.”
이어서 유리는 기억에서 되살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옛날?”
“응. 마탑에 있었을 때 우리 아빠가 초청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거든. 그것도 극진히 말이야.”
선일은 그녀의 말에서 살짝 이상함을 느꼈다.
유리의 아버지 아서라면 [영광스러운 왕국] 제1좌의 해당하는 마법사다.
영국의 마탑을 대표하는 12명의 마법사 중에서도 최고이고 그 수장이라 말할 수 있는 최고의좌.
물론 그들은 12명이 모두 마탑주라고 불리고 있지만, 진정한 마탑의 주인은 아서였다.
‘확실히 이상해.’
[영광스러운 왕국]은 설정상 3대 마탑에 들어가는 곳이다.
그런 대단한 곳의 수장인 아서가 극진히 초대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 물론 극진히 대접했다 해서 막 존대를 하거나 아랫사람처럼 행동했다는 말은 아니야. 뭐랄까... 마탑 입장에서 귀빈처럼 모시는 느낌이었어.”
자신의 말에 당황한 유리는 그의 반응을 꿰뚫어 보고 양손을 바쁘게 흔들며 말을 정정했다.
그녀의 말에 선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이미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마탑의 귀빈이라.’
흠칫!
그 순간, 무언가가 선일의 뇌리를 스쳤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레크라의 말.
이 세상에서 초월자나 악마와 비견되는 힘을 가진 존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조금 바꿔본다면.
-만약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이들도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레크라는 이런 질문을 남기며 잡담을 끝냈다.
하지만 선일은 그녀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마치 질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설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고의 경계가 넓어지는 순간...!
“선일아, 너 왜 이렇게 땀을 흘려?”
흠칫!
유리의 걱정어린 목소리에 선일은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몸을 확인한 그는 어느새 등과 목이 식은땀으로 젖었음을 깨달았다.
“집중해서 그랬나봐.”
“그래...?”
순간 자신이 미친 듯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나 유리는 그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방금 전, 선일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긴장이나 당황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더없이 거대하고 불길한 존재 혹은 미지를 마주한.
공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