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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은 지나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
3학년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각자 삼삼오오 모여 식당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치이익...!
화끈한 불향과 함께 고기 냄새가 식당 안쪽을 물씬 풍겨온다.
점심부터 최고급 스테이크라니.
식사 이후 곧바로 오후 시간을 훈련으로 대체하는 학생들에게는 부담이 될 테지만, 그 말은 일반적인 학생들의 입장에만 해당한다.
“오 스테이크.”
오늘 메뉴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학생들은 각자 식판을 들고 음식들을 집기 시작했다.
선일 또한 마찬가지.
그 역시 오늘 점심 메뉴를 식판 위에 올려놓고 빈자리를 찾았다.
“여기야, 여기! 선일아~”
선일은 보았다.
자신을 향해 유리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광경을.
스르륵...
하지만 선일은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얼이 살짝 빠진 표정과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복잡해 보이네...’
쓰윽...
그의 표정을 본 유리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오늘 선일의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것을 말이다.
‘하윤이 때문인겠지.’
그녀는 아침부터 쓰러진 하윤을 떠올렸다.
유리 또한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쉬는 시간마다 양호실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 지금까지도 말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정신을 차려 일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조퇴시킬 방법도 없다.
그렇기에 걱정되는 것은 당연할 텐데...
지금 느끼는 감정은 또 다른 것 같았다.
“하아...”
유리는 선일이 고개를 돌리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지...”
덜그럭.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은 유리는 자신의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식당 의자를 들었다가 놨을 때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유리.”
“선일아?”
의자 앞에 앉은 사람은 방금 눈빛을 마주했던 선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자신과 안 먹는다고 했었는데.
어째서 온 것일까.
유리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시간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어볼 게 생각나서 잠깐 왔어.”
그렇게 말을 하는 선일의 손에는 음식은 물론, 식판도 없었다.
아까 전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음식까지 버리고 온 것을 보면 뭔가 심각한 질문인가 보다.
설마 하윤과 관련된 질문인가 궁금해진 유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
그렇기에 감정을 읽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을 확인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잘 모르겠네.’
그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표정숨기기란 스킬이 발동한 상태였다.
여전히 쓰러져 있는 하윤에 대한 걱정과 양호실에서 만났던 쥬세피나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정보를 모아야 된다.’
당혹감.
선일은 지금 세 가지 감정을 감춘 상태였다.
표정숨기기가 발동한 그의 얼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천외천인 엘레나나 성강, 그리고 레크라만이 그렇게 숨겨진 그의 표정에서 희미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마인인 레크라는 표정숨기기의 이질감 말고도 [선을 지탱하는 자]의 기운 또한 느꼈지만 말이다.
“그래?”
유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눈을 통해 지금 선일이 느끼는 감정을 읽는 것은 포기한 것이다.
그럴 때는 직설적으로 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덜그럭.
유리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식판을 들었다.
아직 식판에는 꽤나 많은 양의 음식들이 남아있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의자를 원래 자리에 집어넣은 유리.
그녀는 먼저 자신에게 다가온 선일의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나 다 먹었으니까 가자.”
***
“으흠~.”
레크라의 입에서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한고에서 배정받은 연구실.
레크라의 연구실은 학생들이 오지 않도록 본관이나 체육관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으으윽...”
연구실에 구비된 편안한 가죽 소파에 앉아있던 레크라가 기지개를 켰다.
오늘 아침 그 꿉꿉한 공간도 나왔고 예정된 수업들도 전부 끝났다.
게다가 자신은 오후 훈련엔 들어가지 않는다.
그야말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이어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레크라는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는 탁자로 천천히 다가갔다.
“뭐부터 할까나~?”
저 책들이 전부 요즘 부쩍 흥미가 생긴 관심사들이다.
물론 그녀의 관심은 저걸로 끝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어서 레크라는 책을 천천히 뒤적거리며 흥얼거렸다.
“오늘은 뭘 할까요~.”
아직 완성하지 못한 마체병기?
이 학교에 존재한다던 악마의 혼혈?
그것도 아니면....
멈칫.
갑자기 레크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의 손은 한 책의 표지를 쓸고 있었다.
사락.
손에 닿을 때마다 먼지가 묻어나온다.
그만큼 낡아빠진 책이지만 어째서인지 아침에 대치했던 검은 남자가 들고 있던 책과 기운이 비슷했다.
레크라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수 년 전 그녀가 처음 신관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났을 때 받았던 책이었으니 말이다.
우우우우...
레크라는 마기를 손에 일으켰다.
허나 평소에 그 추악한 검은색이 아닌 특이한 금색의 마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아는 한 소년이 가진 [태양]의 마력과 비슷한 금색은 아니다.
빛과 열기.
선과 정의.
공정과 청렴.
이 세상을 지킬 영웅이 가질 모든 요소가 합쳐진 찬란한 기운이 선일의 [태양]이었다면.
영웅은 되지 못하기에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탐하는 폭군의 기운이 바로 진정한 [탐욕]의 마기였다.
“정했다.”
이어서 그녀는 마기를 두른 손으로 고서를 들었다.
고서는 자격 없는 자의 의지를 거부하듯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파르르르...!
그와 동시에 외부로부터 강렬한 부정형의 기운이 느껴졌다.
책의 기운이 불편해진 레크라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일반적인 마기가 아닌 탐욕의 성질이 들어간 마기를 사용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만약 교단에 속한 자라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공통적인 마기를 운용했다면 분명 외부의 힘은 경계를 뚫고 들어와 악마의 힘을 어지럽혔을 것이 분명했다.
“기분 나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레크라의 입가에는 고혹적인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책에서 또 다른 반응이 일어났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의지를 가진 고서는 마치 포기한 것처럼 진동과 내뿜는 기운을 멈추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얌전해진 거니?”
그제서야 만족한 레크라는 운용하던 기운의 수준을 한 단계 내렸다.
탐욕의 성질이 사라진 마기는 악마를 모시는 사제와 전도사들이 사용하는 검은 마기로 변했다.
펄럭.
첫 장을 펼치자 인간은 읽을 수 없는 문양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평범한 인류부터 헌터와 마인, 그리고 이종족을 전부 포함한 단어였다.
레크라 또한 마찬가지.
그녀 역시 인간에 속해있는 이상 고서의 제목을 비롯해 적혀있는 모든 문자는 읽을 수 없었다.
왜냐.
책을 읽을 자격이 없으니까.
“세상 밖의 신...”
하지만 알 수 있다는 것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다.
레크라는 펼치자마자 첫 번째 장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이 책을 건네준 신관이 해석해줬으니 말이다.
“우리가 믿는 신들에게도 위치가 존재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이들은 바로 외부자와 오래된 자들. 이 세계로 따지면 초월자나 악마와 비슷한 힘을 가진 그들은 오직 하나의 존재만을 공통적으로 섬기고 있었다.”
하아, 첫 번째 장에 있는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던 레크라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신관이 해석해 준 내용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마치 뇌에 각인된 주문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이어서 그녀는 신관에게 들었던 말을 계속해서 뱉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시는 단 하나의 존재. 그분은 어떤 세상에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안다. 만약 그분께서 우리들이 존재하는 공간에 도래한다면.”
우주에 새겨진 모든 존재는 모두 ■■로 돌아가 공평한 결말을 맞을 것이다.
중간의 단어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할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아...”
그렇기에 궁금하다.
현 시점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사악한 힘.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났고, 도대체 어떤 존재가 이 책을 작성한 것인 걸까.
이 책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고, [그분]은 누구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하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자신의 결말임을 알고도 다가가는 불나방처럼.
자신의 목숨이, 아니 존재 자체가 소멸하더라도 이 지식을 깨닫고 싶어 했다.
지식을 탐구하는 레크라의 눈엔 알 수 없는 광기가 가득 차 흘러넘쳤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정신 세계로 강림했다.
-안된다.
투욱.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힘은 무엇보다 강렬했다.
유혹에 걸린 것처럼 숨을 뱉어대던 레크라가 곧장 정신을 차렸을 정도니까.
“으윽!”
뇌가 터질 것 같은 격통에 레크라는 그대로 머리를 끌어안고 자리에 풀썩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